13화
‘이 교단은 신도를 얼굴로 뽑나.’
이십 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싶은 남자는, 온몸에서 나른하고 흐느적거리는 기운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성스러울 만큼 금욕적이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안과는 딴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놀라게 했나요?”
“아, 아닙니다.”
나는 별것 아니었다는 듯 여상스레 책을 덮었다.
남자의 시선이 내가 덮은 책을 흘긋 스쳤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은 도서관이 쉬는데, 레이디께서 혼자 안에 계시기에 알려 드리러 왔답니다.”
“아, 쉬는 시간인가요?”
나는 고개를 틀어 사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 사서석엔 아무도 없었다.
‘사서 선생님…… 그렇게 친절히 인사해 주시더니, 절 까먹으셨나요.’
적막한 도서관에는 묘하게 음산한 분위기가 흘렀다.
금발남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입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성당 안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서 혼자 계시면 위험하십니다.”
남자는 아름답다는 말을 마치 날씨가 좋다는 말처럼 자연스레 했다.
노골적인 칭찬에 나는 괜히 뺨을 긁적거렸다.
‘그런데,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나?’
무려 신문에 데뷔해 버리는 바람에 웬만한 수도인들이라면 내 얼굴을 알고 있을 텐데.
금발남이 말을 이었다.
“성당 생활은 익숙해지셨나요? 아이린 님.”
역시. 나를 알고 있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다들 친절하고 좋은 분들이셔서 쉽게 적응했어요.”
“다행인 이야기군요. 혹시 조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조언이요?”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금발남을 돌아보았다.
금발남이 화려한 눈매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엘룬교에선 일주일에 한 번은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죠.”
그런…… 미덕이 있었지. 참.
이제야 원작 속 지식을 떠올린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미사에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금발남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하지만 참석 여부만 따질 뿐, 미사의 종류는 상관없습니다. 예를 들면 내일 열리는 미사는 거의 미사라는 이름의 3종 철인 경기죠.”
……뭐?
의외의 말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간신히 놀란 기색을 숨기며 금발남을 돌아보았다.
“그렇군요.”
“하하. 그런 체력 단련이 없는 미사도 많습니다. 가령 월요일에 열리는 미사는 그저 기도문을 읊는 것이 전부죠.”
월요일.
무조건 월요일에 참석한다.
깊이 다짐한 나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금발남을 흘긋거렸다.
가벼워 보이는 생김새와 다르게 그는 의외로 정말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그랬군요. 아직 대성당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더 많은데,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쯤이야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죠. 아름다운 레이디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말한 금발남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를 처음 뵈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군요. 레이디의 손등에 키스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금발남이 살짝 허리를 숙이곤 내 손등을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진짜 신도 맞아?’
물론 엘룬교의 문화에 성 엄숙주의는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은 좀 특이했다. 여자를 한 백 명 정도는 꼬셔 본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으으음, 난 일단 정혼자가 있는 몸인데. 외간 남자한테 손등을 줘도 되는 건가?’
고민하자 금발남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이안 경께서 혹시 꺼려 하시나요? 독점욕이 많은 편인지?”
이안 경?
그 호칭에 나는 우뚝 굳었다.
이 나라에서, ‘경’이란 호칭은 동급이나 아래 계급을 부를 때 쓴다. 말하자면 하대였다.
그리고 현재 이안을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제국을 통틀어서 단 두 명.
엘룬교의 최고위직인 추기경과…….
‘황제.’
나는 빠르게 남자를 훑었다.
원작 속 시대의 추기경은 노년에 가까운 여성이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원작 속 황제에 대한 묘사를 떠올렸다.
분명 여주인공은 그를 금발이 눈부신 이십 대 후반의 미남자라고 묘사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남자와 정확히 일치하는 묘사였다.
긴장으로 주먹에 꾹 힘이 들어갔다.
‘황제가, 왜 내게 이런 식으로 접근을.’
생각해 보면 황제가 내게 호기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접근하는 방식이 예상을 벗어났을 뿐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 돌려 입구를 돌아보았다.
입구까지만 나가면 조안 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조용하자, 고개를 슬쩍 기울인 남자가 곧 씨익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꽤나 빠르시네, 성녀님.”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예를 차려야겠지.
막 고개를 조아리려던 순간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폐하.”
절도 있는 미성이 귓가를 울렸다.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서부터 이안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아우님.”
금발남, 아니. 황제가 슬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아우님의 정혼자와 대화를 좀 나눠 볼까 했는데, 어떻게 알고 바로 달려오는군.”
“그렇다고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미리 언질하셨다면 제가 수행했을 것을.”
이안이 순식간에 내 곁까지 도달했다.
나란히 선 형제를 본 순간, 나는 왜 진작 황제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의아해졌다.
둘은 꽤 닮아 있었다. 특히 눈동자가 똑같은 청안이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이 더 많기도 했다. 머리 색부터, 취하는 자세, 표정까지.
황제가 유들유들 흐르는 물이라면 이안은 차디찬 서릿발 같았다.
그 얼음 같은 얼굴 위로, 마치 그려 낸 듯한 정중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미소.
분명 웃고 있는데도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건 내가 황제의 추악함과 이안의 증오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정작 황제는 저 미소에 나처럼 과민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
“그보다, 아우님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레이디께서 놀라셨겠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얼른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예를 차렸다.
“이것 봐.”
황제가 혀를 찼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황제임이 밝혀짐과 동시에 남자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나를 ‘레이디’라 부르며 눈웃음치던 태도의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이안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제 정혼자께서는 낯을 가리는 편입니다.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제게 하시죠.”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 각별한 아우의 첫 연인이지 않으냐? 너는…… 흐음. 이런 타입이 취향이었군.”
황제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순간 내가 마치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부위별로 철저히 품평 당하는 기분.
불쾌감이 전신을 내달렸으나 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였다.
“아이린.”
이안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좀 더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보다 외간 남자 쪽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아, 음. 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이안이 이끄는 대로 그의 등 뒤에 끌려갔다.
곧 이안의 너른 등이 내 시야를 가렸다. 아예 황제가 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거의 얼굴만 좀 시야에 걸치는 수준이었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건 마치, 이안이 나를 감싸 준 것 같았다.
“외간 남자?”
황제가 재밌다는 듯 픽 웃었다.
“정혼자의 손윗사람이 어찌 외간 남자지?”
“제가 아닌 이상 전부 외간 남자죠. 설령 친형님이라고 해도 저 자신은 아닙니다.”
“네가 웬일로 독점욕을 보이는구나.”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안과 흡사한 표정이었으나, 서늘한 한기를 풍기는 오리지널과 달리 이쪽은 재수 없기만 했다.
“원래는 무엇도 욕심을 내지 않았지 않나. 어머니의 애정도, 아버지의 인정도. 안 그래?”
‘……미친놈.’
나는 이안 뒤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이안이 선대 황후의 애정도, 선대 황제의 인정도 마땅할 만큼 얻지 못한 건 저 사람 탓이었다.
이안 에스테반. 뭐든지 잘하는 2황자.
명석한 두뇌에, 희대의 재능을 타고난 검술 실력, 반듯한 성품까지.
이안은 그 누가 보더라도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재목이었다.
실제로 선황이 살아 있던 당시, 이안을 황태자로 추대하는 것이 제국의 미래를 위하는 쪽이 아니겠냐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라시드라고 그걸 모르지 않았겠지.’
그럴수록 라시드는 이안을 칭찬하는 소리에 몹시도 예민해졌다.
어머니가 이안의 머리만 한 번 쓰다듬어 줘도, 아버지가 칭찬만 한 번 건네도 미친 듯이 히스테리를 부렸다.
히스테리는 선황이 이안에게 자신의 보검을 넘긴 순간 절정에 달했다.
이안이 성기사단에 입단하며 황좌를 노릴 의지가 전혀 없음을 암묵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면, 아마 라시드는 이안을 암살하려 들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미 몇 번 시도했을지도 모르고.’
겉모습은 반반하지만, 라시드는 제 안위를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든 처리하는 파렴치한이었다.
심지어 원작 속에서, 궁지에 몰린 라시드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다.
‘댐을 개방해서 이안이 탈취한 수도를 통째로 수몰시키려 했었지.’
이안뿐 아니라 수많은 제국민들마저 몰살하겠다는 미친 계획이었다.
나는 라시드를 바라보는 눈에 경멸이 서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복잡한 감정에 빠진 나와 달리, 이안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고저 없이 서늘했다.
“제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
어머니의 애정도, 아버지의 인정도 제 것이 아니라고 당연한 듯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담금질했으면, 저런 포커페이스가 나오는 걸까.
“하지만 이 사람은 다릅니다.”
이안이 내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제가 발견하고 제가 택한, 제 사람이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입만 벙긋거렸다.
아무리 연기라고는 해도, 이안 입에서 이렇게까지 집착이 흘러넘치는 대사를 들을 줄이야.
‘독종이다. 독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