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 *
마탑에 다녀온 날 저녁.
나는 루시안이 가져다준 『제국 전도』를 읽는 척하면서 속으론 앞으로 살아남을 방도에 대해 궁리하고 있었다.
한창 골몰해 있는데, 문밖에서 아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님, 차를 가져왔어요.”
“어서 들어와요!”
“오늘은 베르가모트 향이 아주 좋은― 헉!”
“왜 그래요?”
놀라는 소리에 의아해진 나는 침대 캐노피를 걷고 문 쪽을 내다보았다가, 마찬가지로 놀라고 말았다.
조안 경이 널찍한 공간에서 목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훅, 훅. 목도를 내리칠 때마다 내뱉는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조안 경? 뭐, 뭐 하세요?”
“단장님께서, 훅. 내려 주신 벌을 받고 있습니다.”
“버, 벌이라고요? 몇 번 채워야 하는데요?”
“오천 번입니다.”
“오천 번이라니요!”
기절할 것 같았다.
오천 번이라니. 그건 학대였다.
나 때문에 내 방에서 학대가 일어나고 있었다니. 나는 대경실색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너무한 처사예요! 제가 단장님께 말씀드리러 갈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이린 님? 아이린 님께서, 훅,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몹시 유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나와 대화하면서도 계속해서 목도를 휘두르는 조안의 표정이 몹시 평온해 보이긴 했다.
“오천 번이 유하다니요!”
“진심입니다. 단장님께서 전에 없이 너그러운 처분을 내려 주셨습니다. 아이린 님께서 저를 두둔해 주신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목도질을 멈춘 조안이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그러고는 다시 목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 동네 무인들에게 목도 오천 번 휘두르는 건 아침 산책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진정한 나는 주섬주섬 책을 챙겨 의자에 반듯이 앉았다. 남은 저렇게 고된 훈련을 하는데 혼자 퍼질러 누워 있기가 좀 그랬다.
아네트 역시 내 옆에서 차를 따라 주고는 감탄한 눈으로 조안 경을 구경했다.
“으, 음료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넷.”
아네트의 제안은 간단히 거절당했다.
우리는 잠시 경외감을 갖고 조안 경을 지켜보았다.
목도를 휘두를 때마다 조안 경의 팔근육이 꿀렁거렸다.
‘대단해…… 여자도 저런 몸이 되는구나.’
그런데, 불량배들이 말한 ‘미친개’는 무슨 뜻이었을까?
저렇게 차분하고 절제된 조안 경에게 영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다.
‘나중에 아네트 양한테 슬쩍 물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제국 전도』를 덮었다.
방 안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영 생존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일하게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얻으러 다녀야 할 때였다.
‘내 무기는 정보다. 방어구도 물론 정보뿐!’
“저, 도서관에 좀 다녀올까 해요.”
“수행하겠습니다.”
조안 경이 곧장 목도를 내려놓곤 나를 도서관까지 안내해 주었다.
‘으음. 수상한 서적을 좀 뒤적거려야 하는데.’
그러자니 조안 경의 눈치가 보일 것 같았다.
고민 끝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자, 조안 경은 고맙게도 도서관 입구에서 기다려 주기로 했다.
나는 한결 안도하며 도서관 내부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사서가 날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깍듯이 안을 안내해 주었다. 검증은 안 치렀지만 성기사단장의 보증 덕에 이미 성녀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취급이었다.
‘이안의 인정이라는 게 진짜 엄청나구나.’
새삼스레 이안의 영향력을 실감한 나는 도서관을 빙 둘러봤다. 다행히 도서관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책꽂이를 둘러보던 나는 먼저 『성녀의 역사』을 골라 펼쳤다.
나와 같은 예지의 권능을 지닌 성녀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수확은 나름대로 있었다.
역대 예지 능력자 성녀는 몇 존재했었다.
개중엔 시시때때로 적중률 100%의 예언을 해 떠받들어졌다는 기록으로 나를 주눅 들게 한 성녀도 있는 반면,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성녀 아그네스 블루아. 예지 권능 소유자.」
내 눈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아그네스는 생전 권능을 딱 한 번 발휘했다고 했다.
성녀로 부름받자마자, 단 한 번.
그리고 그 뒤론 영영 권능을 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지금까지도 구세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 단 한 번의 예언이 대마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딱 한 번의 예언으로 영원히 추앙받다니…… 가성비 최고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계속해서 사기를 쳐야 하는 삶은 소시민인 내 심장에 너무나도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다소 불경한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곧 묘한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아그네스 성녀가 죽기 직전 남겼다는 유언이었다.
「그때, 난 그 예언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유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을 구한 예언이었는데, 하지 말았어야 했다니?
「내 예지 때문에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럭저럭 유지되어 오던 인간과 마물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 결국 우리는 마물을 북부 밖으로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스러졌던가.」
수백 년 전 글일 텐데도,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통한이 손에 만져지는 듯했다.
나는 당황하며 유언을 마저 읽었다.
「어쩌면, 예지의 권능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는지도 모른다.」
유언은 그렇게 끝이 났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나는 뺨을 긁적였다.
그 대단한 성녀가 마지막에 이런 후회를 하며 죽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마무리에 입맛이 썼다.
그때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나는 깜짝 놀라 사서 쪽을 돌아보았다. 사서는 장부 같은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게서 관심을 거둔 걸 확인한 나는 슬그머니 코너를 옮겼다.
뒷세계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코너로.
‘어디 보자…… 여기 있다. 『암흑 길드 일람』.’
나는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작중에서 나인에게 시달리던 여주인공이 이런저런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경로가 바로 이 책이었다.
목차를 뒤진 나는 곧 ‘나인’ 항목을 찾아냈다.
‘불법 도박장 설립부터 인신매매, 살인 청부까지 안 하는 게 없는 사상 최악의 집단.’
나인의 악업은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계속해서 나왔다.
그나마 밝혀진 게 이 정도다. 음지에선 더한 짓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원작에서는, 무려 소드 마스터인 이안을 타락시키기도 했지.’
원작에서 사실 이안 에스테반은 불운의 캐릭터였다.
친형에게 친아버지가 살해당했음을 알고, 십여 년간 칼을 갈아 온 복수귀.
마침내 황위 찬탈에 성공하지만 그때 이미 그는 나인이 건 사술에 당한 상태였다.
이안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술은, 그의 증오와 복수심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마침내 실체화하게 된다.
‘거의 이안이 황제가 되자마자, 였지.’
사술의 목적은 세뇌였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이안은 나인의 꼭두각시가 되어 껍데기 황제로써 이용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이 어디 보통 인간인가.
그의 영혼은 사술에 곧이곧대로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나인 길드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 나인은 이안을 길들이는 데 제대로 실패한 것이다.
이안을 세뇌하는 건 나인이 길드의 존폐를 건 대작전이었으니, 실패한 게 그들로서는 상당한 유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하트 제국에게는 더더욱 유감이었다.
‘세뇌엔 당하지 않았지만, 대신 사술은 이안의 증오를 미친 듯이 증폭시켰지.’
십여 년간 그를 갉아먹어 온, 형에 대한 복수심.
아버지를 죽인 형, 그 밑에 무릎 꿇은 채 지내 온 세월 간 쌓인 증오.
그것들이 몇십 배로 증폭돼, 마침내 그는 미쳐 버리고 만다.
‘폭군, 피에 미친 황제.’
그게 이안을 부르는 수식어였다.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던 성기사단장은 그렇게 끔찍하게 타락하고 말았다.
그런 그를 막기 위해 원작에서는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이안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고…… 제국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원작은.
‘첫사랑을 직접 처단해야 했던 원작 여주인공에게 크나큰 트라우마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미쳐 폭주하다 죽어 버린 이안보다는 목숨이라도 건진 여주인공의 사정이 나았다.
원작 이안의 운명을 떠올리니 입맛이 썼다.
‘만약, 이안이 사술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걸 막을 수만 있다면, 이안은 그 비참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예지한 척 원작 내용을 이야기해 준다면?’
나는 쿵쿵 뛰는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걸리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나는 이안이 사술에 걸린다는 것만 알 뿐. 나인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걸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둘째, 내가 그런 짓을 한 게 들킨다면, 나인은 백 퍼센트 날 죽여 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어쩌면, 예지의 권능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는지도 모른다.’
아그네스 성녀의 마지막 유언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이안이 희생되었지만, 어쨌든 원작 속 제국은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된다. 원작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통치 아래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해피 엔딩이었다.
‘그 흐름을 내가 뒤바꾼다면.’
나비 효과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세계 반대편에서 토네이도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
하물며, 원작의 커다란 흐름을 방해한다면.
그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일단은 내 살길부터 골몰하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당장 태풍 앞 촛불처럼 위태로운 건 내 목숨이었다.
하지만 책을 더 뒤져도 나인에 대해 그럴듯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나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나인은 베일에 싸인 암흑 길드. 실체 없는 안개에게 쫓기는 기분이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들처럼, 뒷골목 정보 길드 같은 곳이라도 돌아다녀 봐야 하나.’
아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야 뒷골목을 누비다 위험에 처해도 구해 줄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왜 위험한 곳에 갔냐고 으르렁댈 사람이 있으면 있었지…… 갑자기 또 서럽네.
아무튼.
‘아마 머지않아, 그쪽에서 또 내게 접선해 올 거야.’
나인은 아직 내가 자기들 뜻대로 임무를 열심히 수행 중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안의 약혼녀라는 지위를 얻어 냈으니 어쩌면 날 기특하게 생각 중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반드시 접선해 올 것이다. 머지않아, 어쩌면 결혼식 이전에.
생각에 잠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대고 있었나 보다.
문득 느껴지는 피 맛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입술이 상하시겠습니다, 레이디.”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금발의 미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복장을 보아 엘룬교 신도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