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61)

10화

“조안 경. 아네트 양. 그럼 다녀올게요. 시간이 살짝 걸릴 것 같으니 저만 기다리지 마시고 볼일들 보세요.”

나는 뒤를 돌아보며 방긋이 웃어 보였다.

거의 상업 시설로 변모한 마탑이라지만, 그와 별개로 계속 고집하는 마탑만의 훌륭한 전통이 있었다.

손님 상담은 무조건 일대일로 한다는 것!

조안 경은 나를 혼자 보내는 것이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이견 없이 나를 보내 주었다.

이래 봬도 마탑은 난공불락의 요새. 단 한 건의 도난조차 일어난 적 없는 범죄 청정 구역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만큼은 조안 경도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오늘 고객님의 상담을 도와드릴 2급 마법사, 로젤린 메이어라고 합니다!”

상담실로 들어서자 또 다른 마법사가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빠르게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마도구나 스크롤뿐 아니라, 마법 약재도 판매하시는 것, 맞지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어떤 재료가 필요하실까요?”

“붉은 투구꽃의 뿌리, 보이어 산 튤립, 카쿨타 진액과 오르비 열매를 구하고 싶어요.”

빠르게 내 주문을 받아 적은 로젤린이 방긋 웃어 보였다.

“다행히 대부분 바로 조달해 드릴 수 있는 재료들입니다. 단! 한 가지만 빼고요.”

“네? 한 가지라뇨?”

“현재 마약 단속 기간이라, 마약 성분이 있는 카쿨타 진액은 유통 제한 품목으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쿠쿵.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마약이라니?! 그런 소린 들어 본 적 없어!’

소설 속에선 이런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냥 마탑주 리젤로가 조달해 준 재료로 여주가 약만 제조하면 됐었으니까.

‘금수저 인맥을 타고난 여주랑 나는 여기부터 차이가 나는구나!’

“어떻게…… 구해 볼 수 없을까요? 제가 사정이 아주 급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단속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고객님.”

손끝이 차게 식었다.

시간제한 저주는 특정한 재료로 만든 마법약을 일정 기간 이상 섭취하면 해독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해독약 배합법은 리젤로가 여주를 위해 특별히 개발해 낸 것으로, 세간엔 알려진 바가 없다.

문제는 반드시 ‘일정 기간 이상’ 섭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정확한 기간은 책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대충 반년 이상은 꾸준히 복용해야 했던 것 같다.

“단속 기간은 언제까지인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반년보다 더 걸릴까요?”

“어디 보자,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단속만 끝난 뒤였다면 바로 구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한 달! 그 정도면 기다릴 수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답변 감사드려요. 그럼 나머지 재료들만 먼저 구매할게요.”

“바로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고객님.”

나는 지갑을 꺼내 총 23 마르스를 지출했다.

어제 계약 성립과 함께 이안은 센스 있게도 1천 마르스를 먼저 현금으로 지급해 주었다.

나머지 금액은 내가 계좌를 개설하고 나면 그곳으로 넣어 줄 예정이었다.

“거래 감사합니다. 고객님.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연구실 층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마법 아카데미 입학 상담 서비스를 그곳에서 해 준다던데, 제 친구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서요.”

나는 로젤린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황급히 물었다.

움직일 시간이 부족했다. 조안 경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기 전에 연구실까지 들러야만 했으니까.

“연구실 층은 다른 쪽 탑을 통해 가시면 됩니다, 고객님. 아시다시피 쌍둥이 탑은 바로 옆에 있으니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저쪽 문으로 나가도 될까요?”

나는 들어온 곳과 다른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요, 편하신 문을 이용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객님. 상담원 로젤린 메이어였습니다!”

나는 로젤린의 인사조차 끝까지 듣지 못하고 허겁지겁 문을 나섰다.

들어왔던 문과 반대쪽 문으로 나온 덕에 조안 경은 보이지 않았다.

‘십 분 안에 끝내고 돌아오자!’

내가 마탑에 온 목적은 두 가지.

첫째, 시간제한 저주를 풀 해독약 재료를 구할 것.

그리고 보다 시급한 둘째. 성녀 검증 절차를 거짓으로 통과할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방법 역시 원작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물론 성당을 속이는 일이니만큼,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지금 마탑주 리젤로와 직접 대면할 계획이었다.

원작 속에서, 여주는 성녀 검증 절차를 속임수로 통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그때 도움을 준 것 또한 리젤로였다.

‘물론, 리젤로의 애정을 한 몸에 받던 여주와 달리 난 돈을 내야겠지만.’

그것도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야만 하겠지.

하지만 투자해야 할 것엔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고 배웠다.

이안에게 받을 1천만 마르스의 첫 거금 지출은 여기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혹시나 조안 경을 마주칠까 조심하며 나는 마탑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반대편 탑으로 건너가는 거리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근처에서 축제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창 사람들을 제치고 바삐 걷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러지 마세요……!”

“아니, 우리가 뭐 나쁜 사람들이야?”

“잠깐만 놀자는 건데 왜 그러시나, 사람 무안하게.”

“빨리 돌아가 봐야 해요! 비, 비켜 주세요!”

이건, 아네트의 목소리잖아.

두리번거린 나는, 저쪽 골목길 초입에서 아네트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벽에 등이 닿은 아네트와,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불량배들을.

“재밌는 구경 시켜 준다니까? 성당 신도 아가씨들은 본 적도 없을 재미난 거 말이야.”

“성당 출신이라 그런가? 되게 고리타분하네?”

“밥 먹고 기도만 하나, 어깨가 무슨 종잇장처럼 여리여리한데?”

불량배 한 명이 아네트의 어깨를 움켜쥐려 했다.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우렁차게 외치며 골목길에 끼어들었다.

“당신들 뭐야!”

“엉?”

“이 아가씬 또 뭐야?”

불량배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돌아보았다.

괜찮아.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번화가였다. 지금은 가벼운 시비로 보이니 다들 참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위험해지면 누군가 최소한 신고라도 해 줄 것이다.

“아네트 양, 이리로 와요.”

“아, 아이린 님……!”

“오호, 이 아가씨 이름이 아네트였어? 이름도 귀엽네.”

“새로 온 아가씨 이름도 귀여워. 아이린 양, 같이 놀자.”

그런데 내가 개입해서 당황할 줄 알았던 불량배들은, 어째 기죽지 않고 나까지 몰아붙였다.

나는 당황을 숨기며 골목길 밖을 흘긋 돌아보았다.

그러나 지나가던 몇몇이 한두 번 골목길 안을 흘끔거릴 뿐, 대부분 앞만 보고 걷기에 바빴다.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그래, 아이린 양?”

“그래, 후드 좀 벗어 봐. 그늘져서 잘 안 보이잖아.”

불량배들이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내게로 다가왔다.

한 불량배가 내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곤 눈을 끔뻑거렸다.

“자…… 잠깐. 이 얼굴, 신문에서 본 그 얼굴 아냐?”

“뭔 신문? ……잠깐. 그러고 보니까 진짜 비슷한데?”

“그, 성기사단장이랑 연애한다는 그 여자 얼굴이랑 똑같잖아!”

불량배들은 놀랍게도 모두 가십지 애독자들인 듯했다.

내가 신문 속 그 ‘이안의 연인’임을 알아본 불량배들이 저들끼리 소란을 일으켰다.

“지, 진짜 성기사단장의 여자다.”

‘어쩌면 이거, 잘된 걸지도.’

내가 이안의 ‘그 여자’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불량배들도 쉽사리 날 건드리지 못할 터였다.

웬만큼 간 큰 놈이 아니고서야.

“야, 야, 보내 버리자.”

“그래, 잘못 고른 것 같다.”

역시나 불량배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잠깐, 잠깐.”

제일 덩치가 큰 불량배가 끼어들었다.

“궁금하지 않아? 그 성기사단장이 자기 순결을 내다 버릴 정도의 여자라니 말이야.”

“…….”

덩치가 씩 웃으며 나와 거리를 좁혔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기에? 응?”

……여기 있었네, 간 큰 놈.

가까이서 보니 덩치는 다른 놈들보다 더 눈이 맛이 가 있었다.

위험한 냄새를 맡은 나는 홱 거리를 돌아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소리라도 쳐서 도움을 구할 때였다.

그런데, 돌아본 곳에는.

‘어?’

거리와 골목길 사이를, 보랏빛 막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제 밖에선 안이 안 보일 거야. 우리 오붓하게 통성명부터 해 보자구, 응?”

“그러고 보니 나도 좀 궁금하긴 하네. 뭘로 그 단장을 꼬신 거야?”

“구경만 해 보자는 거야, 아가씨. 구경만.”

아무래도 어느 틈에 불량배 중 하나가 골목길에 결계 마법을 씌운 것 같았다.

‘……미친놈들. 여자 희롱하자고 이런 짓까지 하냐.’

“그, 그분께 손대지 마세요!”

아네트가 빽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내 앞을 가로막은 아네트의 팔이 발발발 떨리고 있었다.

“오, 신도 아가씨. 아가씨가 먼저 놀아 주려고?”

불량배들이 킬킬 웃으며 다가왔다.

젠장.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살며시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네트 양.”

“네, 넷?”

“뛰어요! 지금!”

외침과 함께 나는 품속에서 뾰족한 열매 알들을 몽땅 뿌리듯 던졌다.

그러자, 펑! 펑!

허공을 향해 던진 열매가, 불량배들에게 닿자마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으억! 뭐야!”

“앗! 으앗! 따가워!”

“아네트 양! 달려요!”

아네트의 손목을 붙잡은 나는 골목길 밖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보랏빛 막에 부딪혀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뭐야, 이 결계. 시야만 차단하는 게 아니었어?!’

“저급 결계예요, 아이린 님! 물리적으로 충격을 가하면 곧 깨질 거예요!”

“아우, 따가워!”

“앞이 안 보여!”

불량배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우리는 열심히 결계를 두들겼다.

곧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결계 위로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된다!’

희열에 차 더 강한 힘을 담아 결계를 내리친 순간이었다.

“으앗!”

주먹에 닿아야 할 결계가 사라졌다.

나는 내리치던 힘 그대로 앞을 향해 고꾸라졌다.

몸이 기우뚱 넘어가고, 순식간에 땅바닥이 가까워졌다.

부딪힌다. 나는 본능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충격은 없었다.

‘어?’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무언가가 나를 받쳐 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나는 나를 받아 준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 상태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아, 이제 좀 앞이 보이네.”

“이것들이 진짜! 좀 놀고 보내 주려 했더니만 감히 이딴 짓을…… 엉?”

“자, 잠깐. 저 사람, 설마…….”

불량배들 역시 서서히 사태를 파악하곤 나와 마찬가지로 굳어 버렸다.

나는 몹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뚝뚝 끊어지는 인사를 건넸다.

“여, 여기서 다 뵙네요?”

이안은, 그런 내게 미소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할 뿐.

“약혼식 날짜까지는 얌전히 있어 달라고 당부했던 것 같은데, 예비 부인님.”

이안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또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하하. 잠깐 바람만 쐰다는 게, 일이 살짝 꼬여 버렸네요.”

“성당 안이 많이 답답하셨나 봅니다.”

“하하, 아무래도 낯선 곳이다 보니…….”

“그래서.”

내 말을 뚝 자르며 이안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마탑엔 무슨 일로 친히 행차하셨는지, 설명 좀 해 주실까요. 부인.”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저 호칭이 지금처럼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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