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61)

9화

‘으음.’

긴장으로 배가 살살 아려 왔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이안뿐만 아니라 온 제국민을 속여야 한다고?

‘가능하냐, 이서연.’

모르겠다. 자신 없었다.

“흐으으.”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숨을 뱉은 나는, 곧 홱 고개 들었다.

‘아니. 자신이 있든 없든 해내야 돼.’

그래야 살아남는다.

이안을 속여야 일단 일차적으로 그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고, 일 년을 버텨야 이안의 도움을 받아 나인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작에서 읽은 지식은 앞으로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어.’

나는 앞으로 일어날 굵직한 사건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안 같은 주요 등장인물들의 설정도 꽤 기억났다.

‘예를 들면, 앞으로 일 년쯤 뒤, 여주인공이 데뷔하는 날 제도에 엄청난 번개 폭풍이 일지.’

그 번개 폭풍은 그날 성녀로 각성한 여주인공이 처음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사건이 된다.

여주인공의 능력은 무려 날씨를 조절하는 것. 각성한 여주인공은 그 능력으로 번개 폭풍을 가라앉혔다.

‘이후 가뭄이나 수해로 고통받는 지역을 많이 구해 줬지.’

성녀들의 권능은 대부분 생명을 구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여주인공의 능력은 확실히 자연재해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기에 알맞았다.

아무튼.

그런 번개 폭풍을 미리 사람들에게 귀띔해 준다면, 사람들은 수해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역시 성녀님의 은혜라며 날 찬양하겠지!

물론 여주인공의 공로를 가로챌 생각은 없기에 이건 어디까지나 예시지만.

‘문제는, 내 기억력이 그렇게까지 천재적이지는 않다는 건데.’

그래도 나는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를 세 번이나 정독한 전적이 있다.

몇 페이지 몇 줄에 무슨 문장이 있는지까지는 몰라도, 대략적인 내용은 떠올릴 수 있었다.

‘해낼 수 있어.’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예지’라는 능력하에, 난 원작 속 전개를 아무 위화감 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게다가 마침 일 년 뒤엔 세상에서 잠적할 예정이니, 책이 끝난 뒤의 정보는 모른다는 단점도 커버할 수 있지.’

물론 원작 지식을 너무 남발할 순 없었다.

내 개입으로 스토리가 뒤틀리는 것도 걱정되었고, 밑천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니까 가끔만 써먹자. 임팩트 있는 걸로!’

“좋아, 좋아.”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미래를 한두 번 맞혀 주면, 그 무시무시한 성기사단장도 나를 좀 소중히 다뤄 주지 않을까?

“성녀님, 부르셨습니까?”

그때, 커튼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헉, 맞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안 경.”

나는 최대한 기품 있는 목소리로 커튼 밖의 인영에게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고마워요.”

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안 경은 이안이 오늘 붙여 준 나의 호위 기사였다.

레이피어를 주로 사용하는, 키는 아담하지만 몸집이 탄탄한 검사. 검에도 능통한데 마법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루시안은 조안 경이 언젠가 소드 마스터까지 오를지 모르는 인재라고 살짝 귀띔해 주었다.

‘그런 대인재가 나 하나만을 호위하다니…… 낭비 아냐?’

그런 생각이 살짝 들긴 했지만, 난 모른 척 조안 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날 노리는 상대는 다름 아닌 나인이었다. 준비는 아무리 확실해도 부족했다.

뎅, 뎅.

그때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계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는 책을 덮고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내일부턴 아주 벅찬 일정이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일단 바로 사흘 뒤에 약혼식을 거행하겠다고 했지, 그 사람.’

무슨 약혼식을 사흘 만에 올린담.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어도 이보단 느릴 것 같았다.

‘하긴. 소문이 더 난잡하게 퍼지기 전에 미리 판을 벌리긴 해야 해.’

약혼식 준비도 준비였고, 나 나름대로 알아봐야 할 일들도 있었다.

‘일단은, 이 시간제한 저주부터 풀어야지.’

나는 잠옷 자락을 살짝 들춰 보았다.

허벅지에 그려진 ‘76’이란 숫자는, 아까보단 훨씬 흐릿했으나 그래도 자세히 보면 윤곽이 확실히 보였다.

일 년 안에 이안을 끝장내지 못하면, 난 저주에 의해 허벅지부터 활활 타오를 것이다.

‘다행히 원작에서 여주가 이 시간제한 저주를 푸는 장면이 나왔었지.’

원작에서, 나인이 여주인공의 절친한 친구에게 시간제한 저주를 건 적이 있었다.

여주인공에게 독약을 먹이라는, 무시무시한 저주였지.

다행히 여주인공은 제한 시간 내에 저주를 풀어낼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 방법을 나도 이용해 볼 참이었다.

‘먹혀야 할 텐데.’

아니, 먹힐 것이다.

먹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죽은 목숨이니까.

‘하이고, 하필이면 빙의를 해도 이렇게 기구한 몸에 빙의했냐…….’

한탄하며 나는 이불을 덮었다.

아무튼 슬슬 내일을 위해 잠들 시간이었다.

나는 협탁 위 등불을 끄며 말했다.

“주무세요, 조안 경.”

“안녕히 주무십시오, 성녀님.”

폭풍 같았던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 * *

“으음…….”

밝은 아침 햇살에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아이린 님, 기침하셨나요?”

아네트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나는 내게 닥친 일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안, 성녀, 거짓말, 가짜 결혼, 나인까지.

무엇 하나 꿈이 아니었다.

‘……최악의 아침이다.’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아네트, 물 있어요?”

“넵! 지금 가져다드릴게요!”

곧 아네트가 침대의 캐노피를 걷고는 물잔을 가져다주었다.

웬 종이 뭉치들이 놓인 쟁반도 함께.

“확인하실 신문도 함께 대령했습니다.”

쟁반 위에는 다양한 신문사의 신문들이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우와. 대기업 회장님 된 기분.’

“고마워요, 아네트 양.”

“헉, 말씀을 낮추세요……!”

아네트가 부끄러운 듯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나는 쟁반에 든 신문 중 하나를 들춰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들춘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또 <제국의 아침>이었다.

어제 나와 이안의 스캔들을 대문짝만하게 실은 바로 그놈들.

“헉, 아이린 님! 그 신문은……!”

아네트도 뒤늦게 깨달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난 이미 1면을 똑똑히 본 뒤였다.

오늘 자 <제국의 아침> 1면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었다.

「베일에 싸인 성기사단장의 그녀!

취재진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분투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제 연인을 숨기기 위한 에스테반 경의 철벽 수비인 것인가?」

‘제발 신경 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절규했으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이 평범한 제국민 중 하나였다면 이 신문을 눈 반짝이며 사들였으리라는 것을.

아네트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아이린 님. 미리 빼놓는다는 걸 깜빡했어요.”

“아니에요. 저도 알아야죠, 이런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걸.”

<제국의 아침>은 가십을 주고 싣긴 하지만, 삼류는 아니었다.

거의 모든 살롱에는 이 신문이 꽂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영향력 있는 신문이다. 그런 신문의 1면을 이틀째 차지하고 있다는 건, 현재 제도에서 가장 큰 가십이 나와 이안이라는 소리였다.

‘뭐, 당연하지만.’

나는 한숨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네트가 물어 왔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이린 님?”

나는 여상히 답했다.

“마탑에 갈 거예요.”

“네? 마탑에요?”

아네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끄덕였다.

“살 것들이 좀 있어서요.”

“제가 대신 다녀올까요?”

“아니에요. 직접 가서 고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채비 도와드릴게요!”

아네트가 첫 임무를 맡은 표정으로 비장히 말했다.

임시 거처의 옷장에는 신기하게도 내 체구에 맞는 옷들이 여러 벌 들어 있었다. 루시안이 신경 써 준 모양이었다.

무난한 나들이용 드레스를 입은 나는 그 위에 망토를 걸쳤다.

“요즘 유행인 후드 달린 망토를 완벽하게 소화하시네요! 너무너무 예뻐요, 아이린 님!”

아네트가 손까지 붕붕 흔들며 좋아해 주었다.

‘후드 망토가 마침 유행이라니, 잘됐어.’

나는 후드를 푹 뒤집어쓰며 그렇게 생각했다.

후드 덕에 나는 마차장까지 큰 시선 집중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아네트가 나 대신 마부에게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소설 속에서나 보던 마탑에 가게 되다니. 갑자기 좀 떨리는데.’

풍경이 빠르게 변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탑이 무엇인가. 판타지 소설의 로망이 집약된 건물 아니던가.

천재 마법사와 현자들이 밀집한 공간! 지식의 상아탑!

‘음, 물론, 이 소설 속 마탑은 여타 판타지 소설 속 마탑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도착했습니다, 아이린 님.”

조안 경이 친절하게도 나를 마차에서 에스코트해 주었다.

조안 경의 손을 잡고 내린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다…….’

묘사로만 읽던 마탑을 마주하는 기분은 꽤 경이로웠다.

새하얀 대성당 건물과 달리, 검푸른빛이 맴도는 두 채의 쌍둥이 건물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긴장을 숨기며 당당히 마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서비스 정신 가득한 대사가 나를 반겼다.

고개를 들자, 정면으로 보이는 데스크에서 아주 친절하게 생긴 마법사가 우릴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망토를 더 꾹 눌러쓰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다행히 워낙 특이한 손님이 많은 곳이기에 이런 내 행동이 튀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구매하고 싶은 마도구가 있어 방문했는데요.”

“그러시군요. 직접 쓰실 용도인가요? 선물용인가요?”

“제가 직접 쓸 거예요.”

“직접 사용하시는군요, 고객님. 그러시다면 저희 직원이 바로 상담 도와드리겠습니다!”

데스크에 선 마법사가 웃으며 말하자, 또 다른 직원 마법사가 나를 일인실로 안내했다.

그 과정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완벽히 상업화가 됐다더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마탑은 본래 마법사들이 모여 순수히 연구하는 기관이었다. 보통 판타지 소설 속 마탑이 다 그렇듯.

그런데 현 천재 마탑주, 리젤로가 마탑을 장악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탑 개혁을 선언한 리젤로는 고립되어 가던 마탑을 구석구석 뜯어고쳤다.

그 결과, 채 십 년도 지나지 않아 마탑은 지금과 같은 완벽한 상업 시설이 되었다.

덕분에 전에 없던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쥐고 있다고도 들었다.

“상담실은 이쪽입니다, 고객님.”

데스크의 마법사가 환히 웃으며 내게 방문을 가리켰다.

마법사인지, 이달 제일 친절한 직원상을 받은 서비스직 베테랑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