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61)

7화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원래 ‘나’는 길드 말고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톨이였다.

‘도망 노예라고 둘러댔던 게 틀린 말은 아니었나?’

도망 노예가 그렇듯, ‘나’ 역시 신분이 말소된 상태다.

본의 아니게 나는 이안에게 진실과 근접한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정보.

‘그 목소리의 정체가 나인이었을 줄이야!’

나인이라니.

하필이면 하고 많은 암흑 길드 중, 나인이라니.

나인은 소설 속에서 지독하리만치 여주인공을 괴롭히던 집단이었다.

전 대륙을 아우르는 최고의 암흑 길드로서 악명을 떨치는 암살자 집단.

그놈들은 여주인공을 손에 넣기 위해 비인륜적인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안을 지독한 흑마법의 저주에 빠뜨려 폭군으로 돌변시키는 원흉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나인이라니.’

이건 너무 스케일이 컸다.

‘어딜 가든 넌 우릴 벗어날 수 없어.’

그림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온몸을 내달리듯 소름이 퍼져 나갔다.

“이거 미치겠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아까 화끈했던 허벅지의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뭐지?’

옷자락을 들춰 본 나는,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아악!”

내 허벅지에,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76’이라는 숫자가, 아주 선명하게.

“아이린 님! 무슨 일이신가요!”

누군가 힘차게 문을 박차고 열었다.

나는 황급히 옷자락을 도로 내렸다.

웬 소녀 한 명이 내게로 도도도 달려왔다.

“아이린 님! 괜찮으신 건가요?!”

“누, 누구세요?”

“아, 저는 오늘부터 아이린 님의 시중을 들게 된 아네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방금 비명 지르시는 것 들었어요! 괜찮으신가요!”

아네트의 커다래진 눈망울에 걱정이 가득 담겼다.

난 일단 소녀를 안심시켜야 했다.

“괜찮아요. 벌레…… 를 발견해서.”

“네?! 벌레요?”

아네트는 소스라칠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비장히 주먹 쥐었다.

“어디에 있나요! 이 아네트, 당장 박멸하겠습니다!”

“이미 멀리 도망간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제법 다부지게 쥔 주먹이 무색하게도 아네트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귀여운 소녀였다. 하지만 난 지금 아네트와 정답게 대화 나눌 시간이 없었다.

“아네트 양. 만나자마자 미안하지만, 절 이안 님께 데려다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지금 단장님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이안에게로 향하면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내 허벅지에 새겨져 있던, 그 ‘76’이란 숫자.

그건 아마 저주의 증거일 확률이 높았다.

‘내게 시간제한 저주를 걸어 놨다고 했지.’

원작에서도 나인에 의해 같은 저주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제한 시간 안에 임무를 해결하지 못한 그자는, 저주의 문신이 새겨진 부위부터 불이 붙어 온몸이 타올랐다.

머릿속에 생생한, 그 끔찍했던 묘사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일 년 안에 이안을 끝장내라고 했던가?’

이안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짓을 시도했다간 분명 내 목숨이 먼저 달아날 것이다.

“완전 웃기는 놈들이네. 지들이 직접 하든가!”

아니면 활동 자금이라도 주든가!

별 지원도 없으면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하청을 줘?

뒤늦게 분통이 터져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 아이린 님, 뭐라고 하셨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네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소녀가 부끄러운 것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뭐야, 이 난데없이 귀여운 생물체는.’

절망에 절망이 겹치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던져진 힐링 요소 같았다.

“어머, 저기…….”

“단장님의 연인이다.”

복도를 지나는 날 발견한 사람들은 또 수군거렸다.

기분 좋은 수군거림은 아니었지만 지나갈 때마다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비켜 주니 편하긴 했다.

머지않아 나는 이안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내 방문을 고해 주었다.

“단장님, 그분께서 드셨습니다.”

기사들은 ‘그분’이라는, 굉장히 묘한 단어로 나를 지칭했다.

‘진짜 연인한테 밀회라도 온 것 같잖아.’

곧 끼익,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의외란 듯한 표정의 이안이 나를 맞이했다.

“생각이 벌써 정리됐습니까? ……뭡니까.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하얀데.”

나는 잠시 동안, 말없이 이안을 마주 보았다.

성기사단장 주제에 나한테만 불량한 말투.

게다가 성직자 주제에 유령 운운하는 걸 봐도 알 수 있듯 사실 신앙심도 딱히 깊진 않다.

하지만 이안은 명실공히 이 제국 최고의 기사였다.

새삼 그가 허리춤에 매고 있는 검으로 시선이 갔다.

작중의 이안은 저 평범한 검만으로도 일개 대대를 혼자 상대할 만큼 강했다.

하물며 지금은 아공간 속에 잠들어 있을 진짜 성검을 장착하면, 감히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런 그도 결국 나인이 심어 놓은 사악한 술수에 당하기는 했지만…… 그건 많은 일이 꼬이고 꼬였던 탓이니까.

“아이린 양.”

딱딱히 내 이름을 뱉는 이안의 불친절한 얼굴이, 이 순간 놀랍게도 동아줄로 보였다.

‘자, 침착해. 침착하자. 이서연.’

난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가진 선택지를 떠올려 보자.

첫째, 나인의 명령대로 이안을 ‘끝장’낸다.

이건 말도 안 됐다.

원래의 76번에겐 무슨 신묘한 재주가 있었는지 몰라도, 난 아니었다. 지금은 검을 쥐는 방법조차 모르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안은 군대가 몰려온다 해도 ‘끝장’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괜히 세계관 최강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1번은 무조건 탈락.

‘선택지 둘째, 냅다 달아난다.’

역시 현명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나인은 전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암흑 길드다. 어설프게 도망쳤다간 금세 그놈들의 손아귀에 잡힐 터였다. 따라서 2번도 탈락.

그리고 마지막, 셋째.

마지막 선택지를 떠올린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선택지가, 지금으로선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단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난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말했다.

지금 최선의 선택지는 역시 이것뿐이다.

“합시다.”

“예?”

“약혼. 하자고요.”

“……갑자기?”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자고 하셨잖아요. 그새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만…….”

이안이 내게 한 발자국을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중하게 내린 결론이길 바랍니다. 내 부인이 되겠다는 말. 진심입니까?”

느릿하게 얼음이 미끄러지듯, 등골로 소름이 끼쳤다.

어쩌면 사자를 피하느라 호랑이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굳게 떨림을 감췄다.

직감이 말했다.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지금 이것이 최선이라고.

“네. 진심으로 한 말이에요.”

그러자 이안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대신.”

“대신?”

이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주세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는 얼른 덧붙였다.

“성기사단장의 약혼자가 된다면 엄청난 주목을 받겠죠. 단장님 정도 되는 위치라면 적도 많을 것 아니에요? 당신은 차마 해치지 못했던 자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절 인질로 잡으려 들지도 모르죠.”

“그 점은 걱정 마시죠. 나와 한배에 타기로 한 이상, 아무도 감히 당신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테니.”

호언장담이 고맙기는 한데…… 솔직히 지금 나로선 나인 다음으로 무서운 게 눈앞의 이분이시기도 했다.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털어 내며 말했다.

“호위도 붙여 주세요. 항상 절 지켜 줄 수 있는 실력자로요. 마력이나 성력이 있는 분이면 더 좋겠네요!”

아까처럼 그림자 마법으로 침투해 오는 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게 말이지.

이안이 또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나는 지레 찔려서 덧붙였다.

“안전에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제가.”

“……알겠습니다. 호위는 당연히 붙여 드리려 했으니 역시 걱정 마시죠. 그보다…….”

이안이 살짝 허리를 낮췄다.

보석처럼,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한층 가까이서 나를 직시했다. 난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그 눈을 바라보았다.

“애인과는 확실히 헤어지는 겁니까?”

“아.”

애인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었지.

그땐 확실하지 않았지만, 원래 76번의 기억을 두 번이나 떠올린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76번은 외톨이였다.

나인 이외엔 76번이 변장하지 않은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외톨이.

‘그 말인즉, 쓸데없이 신경 써야 할 이전의 인연이 없다는 거지.’

약혼 발표를 했다가 ‘네가 날 두고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며 달려올 원래 애인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난 이안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헤어질게요.”

“죽고 못 사는 연인이라고 했으면서?”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난 흠, 헛기침을 하곤 대답했다.

“으음. 마음은 아프지만 이별해야죠. 대의를 위해서.”

“흐음…….”

이안이 빤히 나를 훑어보았다.

아, 약혼해 준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뭘 이렇게 꼬치꼬치 따져!

잠시 후 이안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다.

“양다리는 안 됩니다.”

“……양다리라니. 어차피 이안 님과 하는 건 가짜 약혼이잖아요?”

“아무튼 안 됩니다. 이런 관계는 신뢰가 생명이라는 것도 모르십니까?”

허, 참.

뭐, 어차피 칠락팔락 연애나 하고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으니 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봐야 자기만 손해지, 뭐.’

기껏 잘 빠지게 타고난 얼굴과 몸을 수절하며 낭비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요.”

내 흔쾌한 대답에 제법 만족스레 웃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이제 요구 사항을 들어 봅시다.”

“아.”

그렇지.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아 있었다. 이안이 살피듯 나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돈 때문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닌 것 같고…….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였습니까?”

“흠, 흠.”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이제부터 제 요구 사항을 말씀드릴게요.”

이안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흥미로운 빛이 감돌았다. 루시안 역시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보였다.

나는 살짝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일단, 제안하셨던 금액은 감사히 수용할게요.”

“좋습니다. 1천만 마르스. 그리고 또?”

“실력이 뛰어난 호위를 붙여 달라는 건 이미 말씀드렸고…….”

“최상급 방어 아티팩트도 선물드릴 테니 염려 마시죠. 안전에 민감한 새 약혼자님을 위해서.”

“감사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1천만 마르스보다도.

“일 년 뒤엔 제가 제국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는지 이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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