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61)

6화

“저, 루시안 님.”

“예. 말씀하십시오.”

“이안 님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요?”

루시안이 곤란한 듯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마 단장님은 최대한 성녀님과 합의를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조정하시려 할 겁니다.”

“그러시겠죠.”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성녀님께서 이안 님의 제안을 수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루시안으로서는 당연히 그럴 터였다. 그는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 이안만을 모시며 살아온, 진정한 충복이자 오른팔이었으니까.

이안이 추기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안은 물론 그 또한 십여 년 노력해 온 세월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추기경이 된다는 것은, 엘룬교 최고위직이 된다는 것.’

그건 즉, 성기사단장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을 거머쥔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에서 이안은 추기경이 되자마자 온 성기사단을 지휘해 황궁을 습격한다.

이안의 복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 개인의 능력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성기사단의 군세 덕이 컸다.

“성녀님께 불합리한 요구라는 것은 압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성녀님을 두고 수군거릴 테니 필히 고달파지시겠지요.”

“…….”

“하지만 이건 단장님께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1천만 마르스를 주저 없이 내 거셨을 만큼.”

“저, 루시안 님.”

“제게까지 경어를 쓰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어, 음…… 그렇다면. 루시안 경.”

“예, 성녀님. 말씀하십시오.”

나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묻기로 했다.

“이안 님께서는, 차기 추기경 후보에서 완전히 탈락한 건가요?”

“예. 아무래도.”

루시안이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순결하지 않은 이는 엘룬 신의 최고 시종이 될 자격이 없다, 는 것이 율법이니까요.”

“그렇…… 군요.”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내 기색을 살핀 루시안이 말했다.

“신경이 쓰이십니까? 성녀님.”

“음, 네. 아무래도요.”

나는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솔직히, 이안 님은 어제까지만 해도 탄탄대로를 걸었잖아요. 최연소 성기사단장 겸 최연소 소드 마스터…… 다들 차기 추기경으로 입을 모아 그분을 말했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이안은 소설 속에서 성공적으로 추기경이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제국의 주신 엘룬은 무력의 신이다. 자연스레 신도들은 무력을 숭상했다.

가장 강한 성기사가 성기사단장이 되고, 선대 추기경이 은퇴할 때까지도 최강의 자리를 유지한다면 이견 없이 차기 추기경이 된다.

루시안이 얼굴에 따스한 미소를 걸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단장님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께서도 지금 여러모로 경황이 없으실 텐데. 성녀님께선 참 따뜻한 분이시군요.”

그건 아니고, 그냥 내 탓이니까 신경이 쓰여서 그런 건데.

나는 양심이 아파 슬그머니 루시안의 시선을 피했다.

루시안이 후후 웃고는 말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단장님은 추기경이 되지 못하시겠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뺏기는 것도 아니니까.”

“네?”

나는 눈을 끔뻑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 순간, 소설 속에서 스쳐 가듯 읽었던 한 문장이 벼락처럼 떠올랐다.

「추기경이 되는 첫 번째 조건, 최강일 것. 두 번째 조건, 소드 마스터일 것.」

보통 첫 번째 조건인 최강이 되려면 이변이 아닌 이상 두 번째 조건인 소드 마스터여야 했다.

거기에 소설 속에서 이안이 추기경 후보인 시대에는 더욱 특별한 점이 있었다.

역대급으로 소드 마스터가 배출되지 않은 시대였던 것이다.

“현재 이 대륙에서 소드 마스터는 단장님이 유일합니다. 따라서 단장님이 추기경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 자리는 공석으로 비게 되죠.”

“그렇군요! 잠깐,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안이 추기경 자리를 원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추기경이 갖는 엘룬교의 병권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만약 추기경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병권은 자연스레, 그 바로 아래 직위인 성기사단장에게 가겠구나!’

맙소사.

그랬던 거였어.

난 입을 떡 벌렸다.

이제야 이안이 생각보다 분노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컨드 플랜이 존재하기 때문이었구나.’

물론 그래도 나 때문에 이안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사실일 터였다.

우선 겉으로는 흠결 하나 없던 그의 이미지에 얼룩이 진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겠지. 그 외 추기경이 병권 외에 갖는 이런저런 권한들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아무튼, 이안은 여전히 성기사단장으로서 병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날 아예 죽이려 들지는 않더라!’

나는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하며 걷던 우리는 어느덧 막다른 복도에 도착했다.

복도가 끝나는 부분 바로 앞엔 커다란 방문이 있었다.

“이곳이 성녀님께서 당분간 머무실 임시 거처입니다.”

루시안이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을 들여다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예쁘다.’

하얀색을 메인 컬러로 해 정갈히 꾸며진 방은, 예쁜 데다가 넓었다.

정신없이 방을 구경하는 내게 루시안이 말했다.

“정식 거처는 성녀 검증 절차가 끝난 뒤 제공될 겁니다.”

‘이게 임시 거처라고?’

정식 거처는 대체 얼마나 더 좋다는 거야?

“더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요, 성녀님?”

“아뇨, 일단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또 궁금한 게 생기신다면 언제든지 이 루시안을 불러 주십시오. 곧 성녀님을 모실 애기 신도와 호위가 도착할 겁니다. 문을 노크해도 놀라지 말아 주세요.”

루시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방 안엔 적막만이 남았다.

‘혼자가 됐구나.’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몇 시간 내내 연달아 사건이 터진 탓에 나도 모르게 많이 피곤했었나 보다.

나는 비틀비틀 걸어 침대 위로 엎어졌다.

‘와, 미친 듯이 푹신해.’

침대는 내가 누워 본 어떤 침대보다도 고급이었다.

이게 정말 임시 거처라고? 여기서 평생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어.

‘이안의 제안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는데…….’

지나친 피로에 눈꺼풀이 금세 무거워졌다.

잠들 때가 아닌데. 억지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안녕, 76번.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헉?”

나는 귀를 감싸고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짙은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악, 악마? 마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누…… 누구야.”

애써 떨림을 가라앉히며 묻자, 그림자 쪽에서 킥킥거리며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겁먹지 마. 잘하고 있다고 알려 주러 온 거야.

“…….”

―그런데, 보고를 하지 않더군.

그림자가 스르르 내게로 미끄러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연기가 음험하게 속삭였다.

―윗선에서 네게 큰 기대를 걸고 있어. 지체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

―음. 혹시 딴마음을 먹은 건 아니겠지?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이 세상에 가족은커녕 연고라곤 없는 널 거둬 준 건 우리뿐이잖아.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한기가 몸을 감쌌다. 나는 덜덜 떨리는 턱을 간신히 고정시켰다.

―그럼, 76번. 앞으로도 기대할게. 실망시키지 말아 줘. 한 사람을 몰락시키기에 스캔들 하나만으로는 모자라겠지? 확실히 처리하라고.

“…….”

―기억해. 네 목숨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어딜 가든 넌 우릴 벗어날 수 없어. 잊진 않았겠지만 다시 일깨워 주지.

그와 동시에, 허벅지에 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아아악……!”

―네게 걸어 놓았던 저주는 물론 아직도 유효해. 기한은 알고 있듯이 올해까지다. 그 안에 넌 이안을 끝장내야 해. 정치적으로든…… 뭐, 아니면 그냥 목숨 그 자체이든.

그럼 잘해 보라고. 그 말을 끝으로 그림자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헉, 헉…….”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방금, 방금 그건 뭐였지.’

날 76번이라 부르던 목소리는, 일전에 떠올린 기억 속 목소리와 똑같았다.

‘낮고 쉬어 빠진 목소리.’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억지로 주먹 쥐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굳은 머리를 움직이려 애썼다.

‘역시, 그 목소린 내 몸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게다가 목소리는 ‘우리’라고 했다.

내 적이 한 명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미치겠네.’

나는 힘겹게 호흡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너무 무서웠다.

검은 그림자가 마치 사람처럼 서 있던 모습은 다시 떠올려도 미칠 듯이 공포스러웠다.

성당에 침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면, 적은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란 소리다.

‘어떡하지?’

이안에게 도움을 청할까?

아니, 그건 불가능했다.

이안은 내가 모르는 세계의 모르는 몸속으로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 따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안뿐 아니라 누구도 믿지 않아 줄 터였다.

‘섣불리 도움을 청했다간 내가 첩자가 맞았단 걸 내 입으로 증명하는 꼴밖에 안 돼.’

도움을 청할 사람 따윈, 없었다.

무력감과 공포가 목을 조르듯 압박했다.

그와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제 절 놓아주세요. 제 부모가 절 팔았던 몸값이라면 어떻게든 벌어서 드릴게요.’

이건 ‘내’ 목소리였다. 즉 진짜 76번의 목소리.

‘나’는 누군가에게 빌고 있었다. 간절함과 절망이 애원하는 ‘내’ 가슴 속을 꽉 메웠다.

‘몸값? 웃기고 있네. 네 어미아비가 돈 몇 푼 받고 널 팔아넘긴 이상 넌 영원히 우리 소유야.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봐. 배신자에겐 죽음뿐이란 걸 모르진 않을 테지? 넌 죽고 난 뒤 시체조차도 우리 거라고.’

‘나’는 슬펐다. 서러웠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암흑 길드, ‘나인’에 팔려 왔다.

나인에 팔려 온 순간 ‘나’의 신분은 말소되었다.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었다.

노예보다 못한 존재.

그런 ‘나’를 길드는 가축처럼 부렸다.

위에서 내려오는 임무를 수행하고, 또 수행할 뿐인 인생.

친구도 만들 수 없었다. 임무를 할 때마다 모습을 바꿨기에 ‘나’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불행했다.

이런 세상 따위 탈출하고 싶었다.

아예 새로운 세계로, 길드는 물론 ‘나’를 고통스럽게 내버려 둔 신까지 모두 없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임무를 시작하기 전날 밤―

“……헉.”

나는 잠에서 깨어나듯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마지막은 뭐였지?’

그래서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몹시 찜찜한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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