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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61)

4화

부하가 우물쭈물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 일단은, 그, 그러니까, 사모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사모님은 무슨 사모님이에요!”

내가 사색이 되어 외치자 부하가 더듬거렸다.

“하지만, 단장님의 연인이신 거니까…….”

“아,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네? 헉, 그럼 하, 하룻밤만 통정을…….”

“조용.”

이안이 손을 들었다.

나와 부하는 동시에 합, 입을 다물었다.

“…….”

이안이 천천히 제 이마를 쓸어 올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알 수 있었다.

저 사람, 지금 완전 열 받았다는 거.

‘당연히 그렇겠지.’

생긴 것이야 여자 수백 울려 봤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수준이지만, 저 얼굴로 사실 이안은 동정남이었다.

오로지 추기경이 되기 위해, 그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순결을 지켜 왔다.

그렇게 고이 지켜 온 순결을,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웬 여자한테 하루아침에 뺏길 뻔한 것으로도 모자라.

전 국민에게 광고까지 된 것이다.

루시안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단단히 이번 음모를 계획한 듯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될 수가 없지요.”

“하하하.”

사진을 바라보며 이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진 속의 흐트러져 있는 갈색 머리 여자와 은발의 남자는, 누가 봐도 애정 공세에 열정적인 한 쌍의 커플이었다.

“제대로 걸려들었군.”

이안이 잇새로 씹어뱉듯 말했다.

곧 그의 손아귀 안에서 신문이 와작 구겨졌다. 루시안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단장님. 사실과는 다르나 이 사진은 너무 노골적으로 찍혀 있어서…….”

“그래. 더 발뺌해 봤자 꼴만 우스워지겠군.”

이안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서리처럼 차가운 눈동자에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거 피차 곤란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성녀님.”

“…….”

“당신과 나. 아무래도 완전히 동침한 사이로 낙인찍힌 것 같은데.”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미치겠다.’

이안이 그래도 아직까진 날 성녀님이라 불러 주긴 했지만, 그조차 비꼬는 기색이 다분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끌려간다.’

성기사단 전용 지하 특수 고문실에……!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선량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고충을 겪으시다니…… 엘룬 신께서도 안타까워하고 계시는 것이 느껴져요. 단장님, 일단은 진정하시고 우리 함께 대책을 궁리해 볼까요?”

“당신.”

“네, 단장님?”

“역시 사기꾼 냄새가 풀풀 나.”

“…….”

이런, 아직은 성스러운 연기가 부족한가.

“저 역시 너무나 당혹스러워요. 도대체 그 짧은 순간에 어떤 놈이 사진을 찍은 걸로도 모자라 신문사에 제보까지 한 걸까요?”

“…….”

“완전히 순도 100% 미친놈이군! 색출해서 감방에 처넣어야 해요!”

나는 입술을 축이며 정말 열 받은 척 떠들었다. 실제로 열 받기도 했고.

눈으론 쉴 새 없이 이안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튼 난 절대 이 일을 꾸민 자들과 연관 없다는 걸 어필해야 했다.

‘누가 봐도 내가 저 사진 찍은 놈이랑 한 패거리 같은 상황이잖아! 그리고 아마, 난 그놈이랑 한 패거리인 게 맞을 거고.’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키라던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를 76번이라 부르던 그 목소리.

“레이디.”

손을 내린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양옆으로 꺾었다.

뚝, 뚝, 소리가 나는 게 미치도록 공포스러웠다.

나는 얼른 착실히 대답했다.

“예, 이안 님.”

“방금 나눈 대화가 아니었다면, 난 그대를 적으로 간주해 곧장 지하 감옥에 처넣었을 겁니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솔직히 이 순간 내가 이안이었다면 고래고래 소리치며 이 첩자를 당장 가두라고 외쳤을 것 같았다.

이안이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우리 성녀님께서는 날 믿게 하는 데 성공하셨지.”

헉.

희망적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보’를 말한 이상 나는 그대가 성녀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뭐, 어차피 일주일 뒤면 판명 날 일이기도 하고.”

일주일 뒤 일어날 성녀 검증 절차, 말이지.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안 님.”

“하지만 일이 이렇게, 더럽게 꼬여 버린 이상.”

‘더럽게’를 말하는 순간 부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안의 눈에 가득한 살기를 애써 모른 척했다.

“당분간 우리 성녀님께서는 나와 동행해 주어야겠습니다.”

“그, 그래야 할까요?”

“물론이죠. 일단은 어떻게든 입을 맞춰, 이 빌어먹을 스캔들을 가라앉혀야 할 테니.”

* * *

레하트 제국의 수도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말도 안 돼!”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신문을 쥐어짜며 뭇 귀부인들이 외쳤다.

“단장님께 여, 여, 여자가 있다니. 아아, 기절할 것 같아…….”

“이렇게 저속한 사진이라니……! 하늘이 무너져도 단장님만큼은 영원히 모두의 단장님인 줄 알았는데!”

몇몇 이들은 신문을 코에 박을 듯 가까이 들이댔다.

“그런데, 상대는 대체 누구죠? 이런 생김새의 영애는 사교계에서 본 적이 없는걸요!”

“단장님께서 설마 외국인과 사고를 치신 걸까요?!”

“아아아, 기왕 순결을 잃으실 거면 내수로 돌리셨어야죠!”

“이 레이디는 도대체 누구인 거죠!”

소식은 빠르게 황궁까지도 퍼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레하트 제국의 젊은 황제, 라시드가 지그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우리 동생께서 여자를 다 만들다니.”

“그 올바르고 완벽한 기사단장이 설마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재무대신, 브리어트 공작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시드가 픽 웃었다.

“이거 한동안 수도가 시끌벅적하겠군. 늘 오락에 굶주려 있는 백성들에게 뼈다귀를 던져 주다니, 동생님께 거하게 칭찬이라도 해 줘야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폐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곧 있을 추기경 선발에 이변이 생기겠군요?”

라시드가 천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안타까운 일이지만. 교리의 율법이 지엄하니 어쩔 수 없겠군. 순결을 잃은 신도는 최고위직에 오를 수 없지.”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추기경 최고 유력 후보였던 성기사단장이 이런 식으로 낙마하다니…….”

“그것도 여자 때문에 말이야. 하하,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어.”

커다란 웃음소리가 국무회의실을 가득 울렸다.

* * *

부하를 급히 내보낸 뒤, 이제 방엔 나와 루시안, 그리고 이안만이 남았다.

“신문이 이미 수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고 합니다. 신문을 회수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단장님.”

루시안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둘뿐이군. 첫째. 성녀님을 파헤쳐 사실은 날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투입된 사기꾼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솔직히 지금 그게 이안으로서 최선의 선택지인 것은 맞았다.

고문해서라도 실은 이안의 침실에 숨어든 사기꾼이었다는 나의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이 그에겐 최선의 방법이다.

‘솔직히 실제로도 그게 진실이고.’

“나로선 그편이 가장 편하긴 한데 말입니다, 성녀님.”

이안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애써 의연히 화답했다.

“……첫째라고 하셨잖아요. 둘째 방법은 없나요?”

“물론 있기는 합니다.”

“부디 말해 주세요.”

나는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이안은 말해 달라는 건 말하지 않고,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골치 아프군. 당신이 정말 성녀라니.”

탐탁잖다는 목소리긴 하지만, 분위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안은 나를 어느 정도 믿고 있다.

나는 속으로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황의 유해를 언급한 건 역시 성공적이었어.’

그때 이안은 날 완전히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미리 신뢰를 얻어 두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대화해 볼 새도 없이 끌려갔겠지.

이안이 느긋이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 와중에도 여유가 배어 나오는 태도를 유지하는 건 그의 특기인 듯했다.

“성녀가 출현한 곳이 하필이면 내 침대 안이었다는 진실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게 뻔하고.”

“……그건 확실히 그렇죠. 엘룬 신께서도 참. 왜 하필 절 그런 곳에 떨구셨는지…… 하하, 하.”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이 둘째 방법으로 넘어가야겠군요.”

드디어 둘째 방법을 들을 수 있는 건가!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성녀님과 내가 교제 중인 사이였다고 인정하는 것.”

“역시 뭐든 첫째보단 둘째가 낫네요. 아무래도 그 방법이 훨씬― 네? 예? 뭐라고요?”

내 당황하는 모습이 퍽 맘에 들었는지, 이안이 싱긋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승낙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저기요, 잠시만요!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요!”

“사람들에게 문란하게 여겨지는 것보단 지고지순한 이미지가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는 건 이상하죠! 헛소문에 맞서 싸우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희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왜 기레기, 아니. 못된 기자 놈한테 굴복하시려는 건가요!”

“소문이라는 건 제가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놈이라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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