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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161)

3화

“그 기억은…… 흡. 제겐, 너무 큰 상처라서요. 읏, 떠올리려니 현기증이…….”

“…….”

어지러운 시늉을 하자, 이안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런 나를 지켜보았다.

역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꿋꿋이 연기를 이어 갔다. 일생일대의 오디션을 보는 기분으로 이 연기에 임했다.

“그 이야기는 묻지 않아 주실 수 있을까요? 대신, 제가 정말 성녀로서 부름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불현듯 날카로운 두통이 머리를 찔렀다.

“으읏…….”

나는 이마를 붙잡고 신음했다.

이상한 영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임무다. 이것만 성공하면 우린 널 놓아줄 거야.’

몸을 온통 검은 망토로 가린 남자가 날 향해 씩 웃었다.

‘어려운 임무는 아니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덜덜덜.

내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공포로 온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자의 침실에 잠입해라. 너와 동침했다고 모두가 믿게 해. 대성당 최고의 스캔들을 터뜨려 보란 얘기다. 이해했지?’

망토 쓴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럴수록 떨림도 더 심해졌다.

남자가 내 턱을 들어 올리곤 속삭였다.

‘잘 들어, 76번. 너는, 반드시, 이 일에 성공해야 해.’

“……헉.”

나는 뭍으로 건져 올려진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망토 쓴 남자는 이제 아무 데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이안이었다.

“하아, 하아…….”

나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남자를 본 순간, 본능에 새겨진 듯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었다.

그런 감각은 난생처음이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꿈? 환상?

아니, 그렇다기엔 너무 생생했다.

‘원래 몸 주인의 기억?’

76번. 그 남자가 분명 나를 76번이라고 불렀다.

그건 원래 내 몸의 이름이었던 걸까?

‘숫자가 이름이라니, 그게 무슨…… 그건, 꼭.’

진짜 노예, 같잖아.

갑자기 떠오른 영상의 여파로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나는 이마를 꾹 붙잡곤 간신히 여기가 어딘지를 다시 떠올려 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두통이 일어서요.”

목소리 끝이 나도 모르게 떨려 왔다.

나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이안이 물었다.

“내가 그 기억에 대해 물었기 때문입니까?”

루시안이 이안에게로 고개를 숙이더니 조심스레 속닥거렸다.

“단장님. 아무래도 정말 괴로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을 하시는 건 아닌 눈치인데요.”

이안이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미간을 짧게 문질렀다.

단정하던 그의 눈매에 처음으로 피로가 비쳤다.

빈틈없어 보이던 그에게서 인간성 비슷한 면모를 처음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이안이라는 사람의 일대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안 에스테반. 신실한 성기사단장으로 전 대륙에 이름 높은 남자.

하지만 그의 실체는 십수 년이나 성기사단장이라는 가면 아래 칼을 갈아 온 복수귀였다.

이안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는 전장에서 이인족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안의 친형인, 현 황제의 손에 살해당했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안은 오랜 기간 숨죽이며 복수를 꿈꿨다.

마침내 추기경이 되어 성기사단 병권을 손에 넣은 그는, 친형인 황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면서 기나긴 복수에 성공한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친형을 섬기며 살아가야 한 세월은 괴롭고, 고통스러웠겠지.

그 숨기지 못한 피로가 지금 잠시나마 이안의 눈가에 스쳐 지나간 듯했다.

“미안하지만. 성녀님.”

한번 제 얼굴을 쓸어내린 이안이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직시했다.

“출신조차 확실치 않은 사람을 믿을 순 없습니다. 내 입장은 이해해 줄 거라 믿습니다. ……루시안.”

“예, 단장님.”

“성녀 검증 절차는 준비되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검증을 담당하시는 케넨 주교님께서 현재 급히 성지에 출장을 가신 관계로, 일주일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라.”

이안이 심술궂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성녀를 일주일이나 가둬 둔다면 문제가 되겠지?”

“……일주일 뒤 성녀 검증 절차에서 아이린 님이 정말 성녀가 맞음이 판명 난다면, 예. 그렇겠지요.”

이 사람이 진짜.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아직 이안은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나도 고작 몇 분짜리 연기로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이리라고, 쉽게 생각하진 않았다.

‘일단은 신뢰를 얻어 놔야만 하는데.’

날 가둬 놓는다는 저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닐 터였다.

이안은 일주일이나 나를 방치해 두지 않을 것이다. 목표에 이르기 위해선 잔혹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였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이대로라면…… 끌려간다. 성기사단 전용 특수 고문실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픈 건 싫다. 죽어도 싫다. 그러니 반드시! 지금 이안이 날 조금이나마 믿게 만들어야 했다.

‘역시 여기선, 강수를 던지는 수밖에.’

나는 살짝 심호흡을 한 뒤, 고개 들어 똑바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 님.”

이안의 보검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성녀여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안에 대한 정보 조사를 정말 철저히 했다면 알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이것만큼은 아닐 것이다.

다시 눈을 부릅뜨며 나는 이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전, 경의 아버지께서 어디에 묻혀 계신지 알고 있어요.”

“…….”

“…….”

방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안도, 루시안도. 그리고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천천히 커진 이안의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곧 느리게 그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이.”

“…….”

“당신이, 어떻게. 그걸.”

이안 에스테반의 아버지이자 현 황제 라시드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가 잠들어 있는 곳은, 대대로 황족과 소드 마스터만이 묻히는 ‘전사들의 안식처’가 아니다.

선대 황제는 이안 에스테반의 저택 바로 아래에 묻혀 있었다.

친형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유해를, 십 년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아무도 모르게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넘겨짚어 본 거라면.”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은 참아 주지 않을 겁니다.”

여태까진 참아 주는 거였다니.

놀라움을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넘겨짚을 수 없는 정보다. 이 정보를 입 밖으로 꺼낸 이상 이안은 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안의 최측근, 즉 루시안과 집사장을 제외하고선 아무도 모르는 정보였으니까.

“경께서 아버님의 유해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 이상은 모르지만. 엘룬 신께서 그 이상은 알려 주지 않으셨거든요.”

이 이상 아는 척했다간 다른 의미로 목숨이 위험했다.

이안이 나를 응시했다.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없이.

슬슬 등골에 식은땀이 맺힐 즈음, 마침내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알고 있다면…… 그래. 확실히 레이디께선 성녀가 맞는 모양이군. 루시안, 네가 배신한 게 아니라면 말이야.”

“단장님……!”

“농담이야.”

그렇게 말한 이안이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달빛 같은 은색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사르르 흩어졌다.

다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움과 평정을 되찾은 채였다.

“엘룬 신께서는 성녀에게 그런 정보까지 속삭여 주시는 겁니까?”

“저도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머릿속에 흘러들어 와서 놀랐어요.”

“…….”

“아마, 엘룬 님께선 이안 님이 절 신뢰해 주기를 바라시는 게 아닐까요.”

나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빤히 나를 마주 보던 이안이 곧 입꼬리를 올렸다.

“권능이 이 정도로 강한 성녀라.”

“…….”

“이거, 이젠 내 쪽에서 한배에 타 달라고 애걸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건가?”

아뇨, 그러진 말아 주시죠.

생각만 해도 무서워서 울 것 같으니까.

어색한 미소를 떨리는 입꼬리에 걸친 순간이었다.

“다, 단장님. 단장님!”

다급한 목소리가 방 밖에서 들렸다.

이안이 언짢은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지?”

“이, 이걸 봐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문이…… 신문이!”

“신문? 무슨…… 일단 들어와.”

“예!”

한 남자가 거의 구르듯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남자가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곤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 저분께서…….”

“무슨 일이야. 본론부터 말해라.”

“다, 단장님. 그것이! 일단 이걸 봐 주십시오!”

남자가 이안에게 웬 종이 더미를 건넸다.

‘왜 저러지?’

슬며시 목을 빼고 이안이 건네받은 종이 더미를 들여다보았다.

그건 신문이었다.

나는 눈을 빛냈다.

‘<제국의 아침>! 이 신문 알아. 여주인공이 즐겨 보던…… 음?’

어…… 라?

내 눈이 서서히 커졌다.

왜, 신문 1면에, 내 사진이 떡하니 박혀 있는 걸까?

그것도 위에는 눈 돌아가는 미남을 이불처럼 덮은 채.

“이, 이, 이 사진.”

나는 더듬거리며 신문에 삿대질했다.

“이거, 저랑 이안 님이잖아요?!”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에게서 신문을 뺏어 들었다.

가까이서 보자 더 확실했다.

사진 속엔 침대 위에 흐트러져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벗은 상체로 내리누르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거 초상권 침해 아닌가요?!”

새하얗게 질린 내가 비명처럼 외쳤다.

이안의 부하가 눈을 끔뻑였다.

“네? 그게 뭔가요?”

“……일단 그 신문, 다시 주시죠.”

이안이 말했다. 악마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로.

‘화났다. 이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저, 저기. 이 신문 설마, 이미 발행된 건가요?”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은 마음에 답이 아주 당연한 질문을 했다.

부하는 역시 당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예, 예. 이미 제도 전역에 나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급보라면서 특별히 발행했다고…….”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사진 위에는 큼지막한 제목까지 박혀 있었다.

「뭇 영애들의 첫사랑 이안 에스테반, 묘령의 여인과 불장난을 치르다?!」

정말 미쳐 버리겠네.

그 밑은 더 가관이었다.

「오늘 아침, 존경받는 성기사단장 이안 에스테반 경이 침실에서 여인과 함께한 모습이 목격되었다. 정사의 흔적이 역력한 여인의 모습은―」

“이 더러운 기레기!”

“네? 길액……?”

신문 귀퉁이가 꽈지직 내 손안에서 구겨졌다.

분명 내가 눈을 뜨자마자 이안에게 위협당해 비명 지른 그 순간, 뛰쳐 들어온 사용인 중 한 명이 찍은 사진이다.

대체 어느 틈에 이따위 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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