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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밤-108화 (에필로그3) (109/109)

#에필로그3

“재민 아빠.”

세령의 목소리에 경민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잠깐 어안이 벙벙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저를 바라보는 세령을 보자 이내 헛기침과 함께 마른세수를 한다.

“아니, 그게……. 재민이가 좀…… 무섭다고 해서.”

“방에 가서 자요.”

두서없이 변명하는 경민에게 세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민은 뒷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런데…… 너도 안 잤어? 아니면…… 일찍 깬 건가?”

먼저 방을 나서는 세령을 따라 나오던 경민이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건다. 평소라면 못들은 척 갈 길을 갔겠지만, 이번만큼은 세령도 그러지 못했다.

“좀 일찍 깼어요. 먼저 내려가 볼게요.”

“좀 일찍이 아닌데?”

“…….”

“설마 이 시간에 아침을 해?”

“미리 준비하려고요.”

경민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령을 보다가 강하게 눈살을 찌푸린다.

“누가 너보고 밥 차리래? 그딴 건, 사람 시키면 되잖아. 왜 네가 하냐고. 하지 마!”

“…….”

“하지 말라고!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어졌어도 그래도 나 아직 멀쩡해. 내가 너 이렇게 살게 하려고 죽자 살자 내 옆에 데려다 놓은 거 아니거든!”

“내려갈게요.”

“하지 말라고 했지!”

성마르게 소리친 경민이 세령의 팔을 세게 잡아 돌려세운다. 그렇게 시선을 마주한 세령과 경민이 서로를 무섭게 노려본다. 그렇지만 평소라면 무슨 독할 말을 했어도 열 번은 더 했을 세령도, 온갖 말로 화를 북돋우며 빈정거렸을 경민도 왜인지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선을 넘어서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세령의 팔을 잡았던 경민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린다. 모로 시선을 외면한 경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미안하다.”

“……!‘

세령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세령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때 경민이 세령의 등 뒤에서 다급히 말했다.

“세령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 그건 하지 말자, 우리.”

“……!”

“솔직히 네가 예뻐 죽겠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워죽겠는 것도 아니거든. 아직은 너, 도저히 못 놓겠거든.”

경민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세령은 입술을 질끈 깨문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으면 나가게 해줄게. 나가서 살자. 대신 같이 살자. 나랑 너랑 재민이랑. 재민이한테 우리 더는 나쁜 부모 되지 말자. 내가 잘할게. 네가 나 좀 한 번만 더 봐주면 안 될까?”

“…….”

“세령아. 헤어지는 거 말고, 다른 건 다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그것만 빼고 다 말해. 뭐든 해줄게. 너 사달라는 거, 원하는 거 다 사줄게. 응?”

아이처럼 떼쓰는 경민의 말을 들으며 세령은 픽,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말했잖아. 네가 원하는 거 돈으로는 못 산다고.”

느릿느릿 말하는 세령의 목소리가 텅 빈 것처럼 허무하다.

“그럼 어떡해? 내가 가진 건 돈밖에 없는데…….”

말끝이 흐려지고, 등 뒤에서 경민이 울음을 참는 듯, 끅끅 소리를 냈다.

하, 천천히 깊은 한숨을 내쉰 세령이 경민을 향해 돌아선다. 경민은 벌 받는 아이처럼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린 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단단히 도드라진 그의 턱이 미세하게 바르르 떨린다.

“재민 아빠. 나 버려. 나는 당신의 그 간절한 마음 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 아니야.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여잔지.”

세령의 목소리 떨린다.

“몰라. 나는 몰라. 네가 뭐라고 말해도 난 그냥 너야. 무조건 너야.”

경민은 아이처럼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세령의 말을 흘렸다. 세령은 울음을 참는 듯 울먹울먹해진 눈으로 경민을 바라보다가 기막힌 듯 픽 웃었다.

“이경민, 넌 대체 전생에 얼마나 나쁜 놈이었기에 나 같은 여자랑 엮였니?”

“그래. 맞아. 난 전생에도 이생에서도 개양아치에 나쁜 새끼니까 너 안 놔. 그러니까 도망칠 생각 하지 마. 내가 돈도 주고, 맘도 주고……, 암튼 너 달라는 거 다 주면 되잖아!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뭐든 좀 달라고 하라고! 제발. 세령아, 제발.”

경민이 세령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낮게 흐느낀다. 꼿꼿하게 지켜오던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그의 모습이 아이처럼 무구해, 세령은 그에게서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 깊고 뭉근한 정이었다.

경민은 젖어 드는 세령의 눈을 바라본다. 안쓰러운 듯, 저를 바라보는 세령의 눈빛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미움도 거부감도 없었다. 남자는 조금 힘을 주어 세령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처음 여자를 품에 안은 것처럼 몸이 떨리고, 심장이 뛴다. 그녀는 저항 없이 경민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경민은 파자마 앞섶이 뜨겁게 젖어 드는 느낌을 받았다. 세령이 그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어깨를 떨면서 서럽게. 경민은 두 팔에 힘을 주어 더욱 강하게 세령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이처럼 섧게 흐느끼는 그녀의 귓가에 기도처럼 하염없이 속삭였다.

“미안해. 미안해, 세령아. 내가 잘못했어.”

***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이 저물고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넓게 퍼진 붉은 광선에 바다는 어느새 황금빛으로 물들고,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가 또 저만큼 멀어지는 파도에 쓸려 모래 위에는 쉴 새 없이 포물선이 생겼다가 또 지워졌다.

강희와 수아는 저 멀리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앉아 아까부터 열심히 성을 짓고 있고, 사희와 동하는 맨발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모래와, 살그머니 휘감기는 바닷물의 촉감을 느끼며 백사장을 걷고 있었다.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사이좋게 감아 안은 두 사람은, 해 저무는 평화로운 풍경에 취해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에는 조금의 어색함도 없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저기 좀 봐.”

뉘엿뉘엿 져가는 해가 해안선 위에 반절쯤 걸쳤을 때, 동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의 손끝이 저무는 해를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그런 말 들어봤어? 맑은 날, 해가 완전히 바다로 사라지기 직전에 반짝 녹색 광선이 보인다는 거.”

“아니, 처음 들어요.”

“하와이에선 그 반짝하고 녹색 빛이 일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대.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도 있고.”

“정말?”

호기심이 생기는지 사희가 목을 쑥 빼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는 이제 거의 저물어서 바닷속으로 숨기 직전이었다.

서서히, 서서히 바닷속으로 침몰해가던 해가 마침내 수평선을 넘어갈 때, 멀리서 반짝 녹색 빛이 선명하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이었다.

“어머! 봤어요? 지금 초록색 빛이 반짝하고 빛났어!”

깜짝 놀라며 손뼉을 마주친 사희가 동하를 향해 돌아섰다. 호들갑스럽게 동동거리는 사희를 사랑스러운 듯 보며 동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소원 빌었어요?”

“응.”

“정말? 난 못 빌었어. 너무 순식간이라.”

사희는 마냥 아쉽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트린다.

“다른 날 또 빌면 돼. 오늘은 일단 내 소원부터 이루고.”

“동하 씨 소원이 뭔데?”

“음, 내 소원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동하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더니 사희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함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어둑해지는 주위의 빛에도 전혀 아랑곳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마치 별 같다.

“어……, 도, 동하 씨…….”

깜짝 놀란 사희가 저도 모르게 말을 조금 더듬는다.

“이 말을 하려고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막상 반지를 사고 나니까 하루도 더 못 기다리겠어서 부랴부랴 날아왔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심장이 얼마나 급하게 뛰었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담담히 말하고 있었지만 동하는 숨이 찬 것처럼 중간중간 말을 쉬었다. 가슴이 벅차서였다. 그는 한 템포를 쉬어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며 사희를 보았다.

“사희야. 나랑, 결혼해 줄래?”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던 사희의 얼굴이 이내 환해진다.

“응!”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사희가 한달음에 동하에게 안겨든다. 동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세계로 거침없이 뛰어들겠다고 결심한 그녀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그는 생각했다.

너를 만나 내 삶이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고. 해가 지고 없는 순간에도,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한, 그의 세계는 언제나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므로 나는 죽는 날까지 나의 빛, 이사희를 사랑하고, 숭배하며 살겠노라고.

까르르 흩어지는 웃음소리를 들은 강희와 수아가 이쪽을 돌아보고는, 행복해하는 사희의 모습에 덩달아 행복해지는지 빙그레 웃는다.

해가 저물었어도 여전히 따듯한 기운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초여름 저녁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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