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1
비행기가 활주로에 부드럽게 랜딩 했다. 동하는 오렌지빛 조명을 밝힌 어두운 활주로를 바라보며 좌석에 기댔던 몸을 조금 일으켰다. 열흘간의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온오프라인 쇼핑몰 부문 총괄사장으로 승진한 뒤, 적극적으로 해외브랜드를 유치하면서 이렇게 해외 출장이 잦아졌다.
시차 때문에 일정의 절반 가까이는 거의 뜬눈으로 보낸 터라 물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왜인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기내방송이 나오자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동하는 피곤한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마중 나온 수찬이 게이트를 나오는 동하를 발견하자 번쩍 손을 들고 달려왔다. 한국에 남아 그 대신 처리해줄 일이 많아서, 이번 일정에는 수찬과 동행하지 않았다. 보딩 시간을 알려줄 때, 분명 픽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당부를 해두었는데 역시나 그런 말을 들을 수찬이 아니었다.
“나오지 말라니까. 시간도 늦었는데.”
동하는 시간을 확인하며 살포시 미간을 찌푸린다.
“그렇게 절 걱정 하시는 분이 다짜고짜 귀국 일자를 변경하셨습니까? 애초 일정대로 도착하시면 좀 좋으냐고요.”
“거긴 더 못 있겠더라고. 역시 내 나라가 최고야.”
“내 나라가 최고인 게 아니라, 내 여자가 최고인 거겠죠.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새를 못 참고……. 하여튼 안 어울리게 노골적으로 사랑꾼이시라니까.”
수찬이 슬쩍 말을 돌리는 동하를 빤히 보며 슬금슬금 놀리기 시작한다. 정곡을 찔려 할 말이 없어진 동하는 머쓱한지 대꾸하는 대신 캐리어를 끌고 재빨리 앞서 걷는다.
“주세요, 제가 끌고 갈게요.”
“됐어. 나는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너는 빨리 집으로 가.”
“싫어요. 안 가요. 제가 모셔다드릴 거예요. 선배 분명히 한숨도 안 자고 바로 남해까지 운전하고 가실 거 뻔한데, 그러다 큰일 납니다. 한 살이라도 젊은 내가 희생해야지.”
동하의 일정을, 생각을, 성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수찬은, 그가 이대로 차를 몰고 사희가 있는 남해로 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남해는 사희의 언니, 강희의 새 보금자리다. 동하가 출장을 떠난 사이, 사희는 휴가를 내고 언니와 수아가 살고 있는 남해로 휴가를 떠났다. 사희는 동하가 내일 저녁에 한국에 도착한다고 알고 있으니 아직 그곳에 있었다.
일정을 당겨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무리한다고 한 소리를 들을 것이 빤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소리가 아니라 만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하루빨리 그녀를 보고픈 마음만은 막을 수가 없다.
늘 한 몸처럼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만지고 있어도 갈증이 나서 애가 타는 마음. 그녀와 멀어지면 저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것 같다는 허전한 심정. 그녀를 향한 그의 애달픈 감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서 이제는 아무리 감추려 노력해도, 이렇듯 주변 사람에게 쉽게 들키고 말았다.
“도착하면 깨워드릴게요. 눈 좀 붙이세요.”
차에 오른 수찬이 룸미러로 동하를 보며 말했다. 알겠다고 대답하지만 동하는 자신이 쉽게 잠들 수 없을 거라는 걸 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유난히 더 가슴이 설렌다.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양 상기된 표정의 동하를 보며 수찬은 들키지 않게 조금 웃었다.
400km를 달려 차는 해변가 근처의 작은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1층에는 수아식당이라고 적은 앙증맞은 간판이 붙어있다. 가정식을 파는 깔끔한 식당이었다.
지난해, 강희는 서울 집을 정리하고 남해로 내려갔다. 같이 사는 여자와 불화를 겪는 전남편이 수아를 핑계로 자꾸 찾아와 울고 불며 저를 다시 받아달라고 하는 것을 뿌리칠 목적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희는 변하고 싶어 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뒤, 조금 나아졌다곤 해도, 나쁜 추억이 남아있는 고향에서의 삶은 계속해서 그녀를 위축되게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강희는 자신이 떠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기어이 그렇게 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한 첫 번째 선택이자 모험이었다.
남해로 내려와 작은 식당을 연 강희는 사희의 우려와 달리 스스로 일해 번 돈으로, 자신과 딸의 삶을 살뜰히 꾸려나갔다. 땀과 목표, 그리고 모험과 용기가 있는 삶은 강희를 변하게 했다.
그녀 안에 오래도록 꺼두었던 전구에 불이 밝더니, 그 빛은 점점 더 환하게 밝아졌다. 처음엔 조금이라도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고 성화였던 사희도, 부쩍 건강해지는 언니를 보자 더는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동하는 차에서 내려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간판 불은 꺼져있었지만 안쪽은 여전히 불이 밝아있다. 귤색 조명 빛이 푸르스름한 밤공기 속으로 환하게 흩어진다.
동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에 매달려있던 종이 딸랑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주방 안쪽에 있던 강희가 나와 보더니, 동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어머! 어떻게…….”
“이렇게 늦게까지 영업하세요?”
“아니. 영업은 아니고. 내일 단체예약이 있어서 미리 준비 좀 해두려고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출장 갔다고 들었는데.”
“일정을 조금 당겼어요. 빨리 오고 싶어서요.”
놀란 표정이던 강희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더니 곧 따듯하게 미소 짓는다. 상기된 동하의 표정만 보아도 그의 속마음을 다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좀 도울게요.”
동하가 한구석에 쌓여있는 양파와 감자 더미를 보며 팔을 걷어붙이자 강희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만류한다.
“아휴, 무슨 소리.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좀 쉬어요. 사희는 일찍 잠들었어요. 오늘 하루 종일 나 돕는다고 고생했거든.”
동하의 시선이 강희가 가리킨 가게 안쪽으로 향한다. 그저 사희가 있는 쪽을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남자의 시선이 흐뭇하게 둥글어졌다.
“여기 가방이요, 선배.”
때마침 문이 열리고 캐리어를 가지고 들어온 수찬과 동하의 눈이 마주친다.
“잘됐다. 최수찬, 너 여기 앉아서 저 양파 좀 까.”
“네? 양파요?”
“응, 감자도 좀 깎고.”
“제가요? 제가 왜요?”
“네가 나보다 한 살이라도 더 젊잖아.”
동하는 억울해하는 수찬에게 강한 눈빛을 쏘아주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강희에게 괜찮다는 듯 눈을 찡긋한다.
“괜찮아요. 편하게 부려 먹으시고 나중에 밥이나 한 끼 주세요. 저 녀석은 그거면 돼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동하의 등을 보며 투덜투덜 입술을 삐죽이긴 했지만, 수찬은 이내 양파꾸러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옷 버려요. 그냥 두세요.”
강희가 두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말린다.
“괜찮습니다. 옷이야 빨면 되죠.”
“아유, 그래도 피곤할 텐데.”
“안 피곤해요. 여기 오려고 낮잠 많이 자뒀어요. 아, 그런데 이건 꼭 알아두세요. 선배 때문에 도와드리는 게 아니라 제가 진심으로 사장님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하는 거라는 거. 제가 미인이 고생하는 건 눈 뜨고 못 보거든요. 대신 밥은 두 그릇 주셔야 합니다.”
찡긋, 애교스럽게 윙크를 날린 수찬이 콧노래를 부르며 양파를 까기 시작한다. 강희는 난처한 듯 조금 서성이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서늘한 밤공기가 밀려들어온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던 사희는 한기를 느끼고 몸을 조금 웅크리며 자세를 고쳐 눕는다. 느슨한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새하얀 팔과 목덜미가 아름답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침대 시트 위로 해초처럼 물결쳤다.
동하는 천천히 여자의 몸 위로 몸을 겹쳤다. 무겁지 않게 팔꿈치로 제 몸을 지탱하여 든든한 집처럼 그녀의 몸을 덮은 남자에게서 물기 섞인 샴푸 향기가 났다. 살갗이 맞닿자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고 곧 포근하게 체온이 달아오른다.
사희는 그 온기와 향기를 느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깼지만 여전히 꿈속에 있는 것처럼 기분 좋은 몽롱함이 가득했다. 사희는 누군가 그녀의 등 뒤에서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부드럽게 더듬는 것을 느꼈다. 따듯한 입술의 촉감이었다.
꿈인가. 사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이라도 알 수 있다. 이토록 다정하게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이제는 보지 않아도, 냄새로, 감촉으로, 소리로, 알 수 있다. 익숙한 다정함이었다.
“동하 씨?”
사희가 나지막이 묻는다. 남자는 응, 느슨한 목소리로 대답하곤 천천히 그녀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옷 속으로 들어온 커다란 손은 금세 여자의 브래지어 안쪽을 파고들더니 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른다. 그의 악력이 더해질 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인다.
“정말 자기 맞아……?”
“응.”
귓바퀴를 핥고, 귓불을 무는 입술 새로 더워진 숨이 흘러나와 그녀의 귀를 채운다. 덩달아 사희의 몸도 훅하니 달아오른다. 한참이나 사희의 몸을 쓰다듬던 손길이 서서히 물처럼 흘러내려와 쇼츠 안쪽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들기 시작한 그녀의 은밀한 곳을 살금살금 애무했다.
“아…….”
사희는 고양이처럼 비비적거리며 몸을 비튼다.
이토록 원색적이고 야한 꿈이라니. 고작 열흘을 못 봤다고, 이제는 꿈에서까지 그를, 그의 몸을, 그와의 뜨거운 시간을 꿈꾸는 것 같아서 사희는 어쩐지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꿈이기도 했기에, 사희는 여전히 눈 감은 채로 그의 손길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