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정기주주총회가 열리는 본사 건물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사람들, 상기된 얼굴의 사람들, 끊임없이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 등등.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총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가운데 윤재화가 도착했다.
주총 시작에 앞서, 윤재화가 동하에게 짧은 미팅을 요청했다. 회의룸의 긴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사뭇 예의 바른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외숙도 고생하셨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각자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기로 하지.”
“그게 혹시 포기를 말하시는 거라면, 전 안 합니다. 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어서요. 그럴 거면 시작도 안 했죠.”
동하의 대답에 곧잘 유지하고 있던 윤재화의 상냥한 표정이 흔들린다.
“기어이 끝까지 가겠다는 게냐?”
“제가 끝까지 가지 않으면요. 절 어떻게든 짓밟아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게 밟으실 거 아닙니까. 찾을 수 있는 모든 약점을 찾아서 협박하고, 괴롭히시겠죠. 저뿐만 아니라 저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까지 다 대상으로 삼아서.”
동하는 강하게 턱을 씹으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서운 줄 알면 적당히 해 둬.”
“원래 무서움 타는 놈이 더 비명을 지르는 법입니다. 저 좀 무서워서요. 그래서 계속 소리치려고요.”
“이동하!”
“뭐 하나 알려드릴까요?”
동하가 살짝 턱을 치켜들곤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말하자, 윤재화의 얼굴에 물음표가 뜬다.
“남의 약점을 이용해 공격하는 사람이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가 뭔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본인은 절대로 그런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착각입니다.”
“……?!”
“고진영 실장. 새빛 식품 상무로 앉았던데요.”
윤재화의 얼굴에 반짝 당황이 스친다.
“내부 고발로 부사장을 한 방에 날려버린 직원이 혜석유통 하청업체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 업체는 마트 PB 상품 공급량을 200% 늘리게 됐고요.”
“그게 고진영 실장의 능력이겠지.”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경민이 만났다는 모델들과 배우들. 다 고진영 실장 통해서였다면서요? 그 친구 선배가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있다고.”
“그래? 그건 몰랐군.”
“그럼 모르는 걸 가지고 협박을 하신 겁니까? 아. 이경민. 이 멍청한 새끼는 그거에 속아서 벌벌 떨었고?”
동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탕 내리쳤다.
“고진영이 이사희 과거를 인터넷에 폭로하게 한 게 차세령 사주를 받아서 움직인 거라고 하던데, 혹시 차세령이 자기 남편이 괘씸해서 이 일도 그 친구 시켜 사주한 걸까요?”
윤재화는 대답 없이 조금 웃는다.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당겨 웃는 입술이 떨리는 것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근데 그 친구는 제 생모의 언니는 어떻게 알고 찾아갔을까요? 나도 모르던 정보를.”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대체.”
윤재화가 성이 난 듯 역정을 내며 눈을 부라린다. 그러나 펄펄 뛰는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동하는 한없이 태연자약했다.
“그냥……, 약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외숙.”
싸늘하게 웃는 동하의 시선이 윤재화의 얼굴에 날카롭게 박힌다.
“이전, 지금, 이후. 외숙이 하는 모든 일, 모든 계획에 어떤 약점도 없으셔야 할 겁니다. 저는 한번 물면 안 놔요. 이가 튼튼해서.”
동하는 윗니와 아랫니를 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돌아 나온 남자는 곧 얼굴에 남은 웃음기를 지웠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었다.
***
“사희 쌤! 사희 쌤!”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던 사희는 목이 터져라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정아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주총 끝났다고 뉴스 나오고 있어! 얼른 나와 봐!”
사희는 차마 어떤 분위기냐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샤워도 하지 못하고, 수영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 가운만 대충 두른 채로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 직원들이 한데 모여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동하 이사 측에서 ‘직원이 기업의 주인이 되는 경영’을 약속하면서, 그를 향한 직원들의 태도는 사뭇 온화해진 상태였다. 사희를 향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리 가까이 와요. 곧 결과 나올 거예요.”
팀장이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서 있는 사희를 부른다. 사희는 주춤주춤 걸어가 그들 사이에 섰다. 화면에서는 기자가 막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혜석유통 이동하 이사를 주축으로 한 주주연합이 캐스팅보트가 되었던 이경민 전 부사장과, 윤여화 명우재단장의 지분을 확보하면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우세가 점지되었던 윤재화 대표 측은 뜻밖의 결과에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향후 대응에 함구하고…….”
온몸에 일순간 전율이 일었다. 사희는 눈을 질끈 감는다. 세상이 완전히 멈춘 것처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곁에 선 직원들이 와, 함성을 터트리며 박수를 치며 사희를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사희는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사희는 기뻐하는 사람들을 두고 천천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샤워실로 가 약품 냄새가 남은 몸을 닦은 그녀는, 샤워기 밑에서 오래도록 물을 맞았다. 차가운 물을 맞으니 그나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탈의실에 들어온 사희가 천천히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몇몇 직원들이 그녀를 스쳐 가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이제야 동하의 승리가 조금은 실감되었다.
드르륵, 가방 안쪽에서 휴대전화가 울린다. 전화기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던 사희의 얼굴에 생긋 미소가 감돈다. 그러더니 곧 액정 화면으로 툭, 맑은 이슬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사희는 바보처럼 울면서 웃었다. 오늘까지 정말 힘들게 참아온 눈물이었다.
후드득후드득, 쉬지 않고 떨어진 눈물방울에 볼록렌즈처럼 번진 액정 화면에는 동하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강사님, 내가 만약 혜석의 주인이 된다 해도 나와 함께 편하게 맥주를 마셔줄 수 있겠습니까?]
사희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바보같이 환한 웃음을 띠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 읽으며 답장을 적는다.
“좋아요. 10시 58분, 거기에서 기다릴게요.”
***
어두컴컴한 풀장. 보조조명만 올려둔 수영장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공간에는 촉촉한 습기와, 물이 흐르는 작은 소리, 그리고 특유의 향기만이 가득하다.
2층, 관중석에 앉아, 풀장을 내려다보는 동하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가 묻어있다. 급격하게 달라질 상황들에 대한 약간의 걱정과 부담 같은 것들도 보였다. 살짝 미소가 번진 입술에 언뜻 승자의 미소도 엿보이는 듯했으나, 통쾌해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한 번의 승리가 영원한 행복이 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 앞으로도 수많은 위기와 흔들림이 있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동하는 오늘의 승리를 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걸어야 할 하나의 족적일 뿐.
내내 조금은 초조해 보이던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진 것은, 어둠 속에서 달처럼 새하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전광판 시계의 숫자가 막 10시 58분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여자. 바로 이곳에서 만나, 자신으로 하여금 끝내 이곳을 지키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인이 저 앞에 서 있다.
나의 사랑, 나의 구원. 나의 이사희.
“사희야.”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동하의 목소리에 두리번거리던 사희가 2층 자리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빙긋 웃는다.
동하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와 사희 앞에 섰다. 사희는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즐겁게 감상하며 생긋 웃는다.
“언제 왔어요?”
“여기 문 닫은 시간부터 쭉 당신 기다렸지.”
“풀장 문 닫으면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규정을 어기셨네요?”
“꼭 그렇게까지 규정을 지켜야 합니까? 너무 빡빡하시네요, 강사님.”
사희의 장난스러운 시비에 동하는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제가 을이라서요. 갑이 하라면, 을은 해야죠.”
“그럼 뭐 걱정 없겠네. 나는 갑이고, 오늘은 그 규정 없앨 거거든.”
피! 사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얄밉다는 표정을 한다. 여자의 행동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동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민다. 사희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한 품에 안겨 오는 여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동하는 오랫동안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들어 동하를 보며 사희가 말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말 해줘.”
“음, 그럼 축하해요?”
“그것도 말고 다른 거.”
“음……. 그럼…….”
한참 눈동자를 굴리며 골똘하게 생각하던 사희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야릇하게 웃더니 동하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다.
“지금 나랑 뒹굴고 싶어요?”
하하하, 청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하는 어깨에 매달려있던 긴장과 부담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하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사희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는다. 남자의 팔뚝이 사희의 가느다란 허리를 강하게 감아온다. 그는 사희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나른하게 중얼거린다.
“사랑해, 사희야.”
사희는 귓가를 휘감아 도는 남자의 달콤한 음성을 들으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나도, 나도 동하 씨, 사랑해.”
미소가 번진 사희의 입술에 동하의 입술이 닿았다. 부드러운 벨벳 같은 촉감은 곧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혀와 숨을 머금는다. 그리고 자신의 온기와 숨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아낌없이 서로의 숨을 나눠 마시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로 더 깊이 뛰어들었다. 오래도록 물을 그리워하던 한 마리 고래처럼,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혼신을 다해.
물속에서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린다. 어떤 말을 해도 직접적으로 고막에 와서 꽂히는 법이 없다. 동글동글해진 소리는 부드럽게 귓바퀴를 휘감았다가, 조용히 돌아나간다. 결코 찌르는 법이 없다. 그리고 물속에서는 어떤 힘도 자기가 가진 모든 권력을 상대에게 퍼부을 수 없다. 물속에 있을 때, 속도는 저항을 받아 더욱 느려지고, 그만큼 힘은 감소한다. 결코 가진 힘 그대로 상대를 다치게 하는 법이 없다.
서로라는 물속에 있을 때, 두 사람은 깊은 평화를 느꼈다. 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