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주총을 하루 남긴 시점. 윤재화가 이경민과 회동했다. 전문가들은 그 자리에서 윤재화 측에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모든 보직에서 해임되면서 상속세를 부담할 여력이 사라진 이경민이, 총수 일가의 경영에 회의적인 입장인 이동하보다는, 보수적 경영을 추구하는 윤재화의 편을 들었을 것이라는 설이었다. 그러자 대세론은 즉시 윤재화 측으로 기울었다.
그 이슈가 한창 증권가를 달구는 중에도, 동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하루 종일 그를 곁에서 보필하는 수찬조차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즈음, 사희로부터 동하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희가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자신이 오랜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게 관심을 기울이고, 수아 양육권을 되찾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 동하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우린 워낙 이렇게 소박하게 먹고 살아서…….”
강희는 김이 오르는 조기조림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조금 수줍은 듯 말했다.
계란말이, 장조림, 봄나물과 김치, 된장찌개, 생선조림.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반찬인 듯하지만, 생선 중에서도 조기를, 나물 중에서도 두릅을 고른 마음. 김을 끼워 넣은 뚱뚱한 계란말이와, 차돌박이까지 넣어 끓인 찌개에서 강희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언니가 이거 차린다고 며칠 전부터 얼마나 신경을 썼다구. 동하 씨 그 모습 봤으면 감동해서 눈물 흘렸을걸요.”
사희는 계란말이 하나를 들어 입에 넣으며 괜한 생색을 낸다. 동하는 빙긋 웃으며 강희가 떠 준 된장찌개 한술을 떠먹었다. 입에 도는 감칠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요리 솜씨가 정말 좋으시네요.”
“아휴, 아니에요.”
강희는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기분이 좋아 조기조림도 한가득 덜어 동하 앞으로 밀어준다.
“곧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 난 들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겨야 하는 거죠?”
강희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동하는 입 안에 들은 것을 얌전히 꼭꼭 씹어 삼킨 후, 싱긋 웃어 보였다.
“네, 그럼 좋죠.”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언니, 동하 씨 체하겠다.”
사희가 얼른 강희를 말리자, 강희는 무슨 큰 실수를 한 것처럼 얼른 입을 가렸다.
“미안해요. 나는 걱정이 돼서…….”
“괜찮습니다. 언니께서 걱정해주시니까 좋은데요?”
담담하게 말을 돌려준 동하가 다시 한술을 뜨려는데, 수아가 빤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왜? 아저씨 얼굴에 뭐 묻었어?”
“남자는 언니라고 부르는 거 아니에요. 누나라고 해야 돼요.”
“응?”
“아저씨가 우리 엄마한테 언니라고 했잖아요. 아저씨는 여자가 아닌데.”
수아의 당돌한 답에 잠시 얼이 빠져있던 식탁에, 와르르 웃음이 터진다.
“수아야, 그렇다고 아저씨가 너희 엄마를 누나라고 부를 수는 없거든.”
사희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왜?”
“암튼 좀 그런 게 있어. 아무한테나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아저씨는 우리 엄마를 뭐라고 불러?”
수아가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다. 그 문제는 어른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여서 누가 먼저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 수아도 얼른 먹고.”
강희가 재빨리 어색해진 분위기를 정리한다.
다시 시작된 식사를 만족스럽게 마쳤을 때, 동하가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희를 보았다.
“이건 싱크대에 담가 두면 될까요, 처형?”
“아휴, 둬요. 내가 하면 되니까 그냥…….”
급하게 그를 따라 일어나며 만류하려던 강희는 동하가 저를 부른 호칭에 놀라 말을 멈췄다. 당황한 것은 볼이 통통해지도록 계란말이를 밀어 넣던 사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먹던 젓가락을 떨어트릴 정도로 놀랐다. 사희의 얼굴이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뭐예요. 갑자기…….”
“남자는 언니라고 부르면 안 된다잖아. 수아가.”
“그래도 그렇지.”
“진작 이렇게 부를 걸 그랬네. 입에 아주 착 붙어. 처형.”
동하는 능청스럽게 대꾸하곤 붉게 물든 사희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본다.
‘처형’이라는 호칭이 주는 진지함 때문인지, 강희의 얼굴에 반짝 감동이 감돌았다.
그때,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심각해진 표정의 수아가 동하의 허리를 쿡 찌른다.
“형이라고 부르면 어떡해요. 우리 엄마는 여잔데. 아저씨 진짜 이상해.”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수아를 사이에 두고 어른들 사이에 다시 큰 웃음이 터진다.
동하는 저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세 여자를 보면서, 아늑한 평화를 느꼈다. 비록 지금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집어삼킨 태풍 속에 서 있었지만, 그가 있은 이곳은 고요한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빈틈없는 행복이었다.
***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동하가 잠자리에 들기 위해 막 모니터 화면을 껐을 때. 어둠 속에서 그의 휴대전화가 반짝 빛났다.
[좀 보자. 그쪽으로 갈게.]
이경민의 메시지였다. 새벽 2시. 이 새벽에, 다짜고짜 보자는 연락이라니.
여전히 매너도, 조심성도 없는 참으로 이경민스러운 메시지였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동하는 열 글자도 되지 않는 메시지를 긴 소설을 읽듯 오래도록 보다가 픽, 코웃음을 친다.
두 사람은 동하의 단골 바에서 만났다. 손님이 빠진 바는 조용했다. 카운터에 앉아 낡은 공구를 들고 이것저것을 고치고 있던 주인 남자가 동하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하더니, 곧 저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술은 알아서 적당히. 1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그렇게 제 할 말을 하곤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바 자리에 경민이 홀로 앉아 있었다. 동하는 윈드재킷 지퍼를 내리며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서늘한 바깥바람을 안고 온 동하를 힐끗 돌아본 경민은 편안한 그의 차림을 보고 피식 웃는다.
“차림이 그게 뭐냐? 양아치같이.”
“양아치 만나러 나오는데 쓰리피스까지 차려 입고 나와야 할 필요가 있나.”
불쑥 시비를 거는 그의 말투에 악의나 앙금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돌려주는 동하의 말투도 한결 가벼웠다. 어쩐지 아주 오래전, 매일같이 으르렁거리며 다투면서도, 밤이면 꼭 붙어 잠들던 어린 날의 어떤 때로 돌아간 것 같다는 기분이 다 들 지경이었다.
“지금 나한테 개기냐?”
“어차피 이제 부사장도 뭣도 아닌데, 예의 차릴 필요 없지.”
“날 좆밥으로 본다 이거지?”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찬밥 정도론 봐.”
동하는 바 안쪽에 손을 뻗어 익숙하게 빈 잔을 짚더니, 경민이 시켜놓은 위스키를 따라서 훌쩍 털어 마신다. 경민도 제 몫의 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곤, 오만상을 찡그리며 꿀꺽 삼켰다.
“여긴 왜 이렇게 싸구려 술밖에 없냐. 하여튼 삼류 출신 아니랄까 봐, 꼭 다녀도 지 같은 데를…….”
“쓸데없이 시비 그만 걸고. 할 말이나 해. 피곤해. 너, 새벽 2시에 보고 싶은 얼굴 아니야.”
“넌 새벽 2시에 보고 싶은 얼굴이 따로 있냐? 아, 뭐. 그 대단하신 여자 친구 분?”
경민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킬킬거린다.
“그분은 새벽 2시가 아니라 24시간 중 어느 때라도 보고 싶지만, 넌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본론이야 이야기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동하를 물끄러미 보던 경민이 쓰읍, 입맛을 다시며 다시 술을 따른다.
“보고 싶은 얼굴 아니라면서, 어쨌든 나오긴 나왔네. 날 버린다기에, 다시는 코빼기도 못 볼 줄 알았더니.”
경민의 목소리에 어쩐지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동하는 어색한 기운을 지우려 말없이 술잔을 비운다.
“너는 왜 나 안 찾아와?”
한참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경민이 불쑥 묻는다. 동하는 눈썹을 살짝 휘어 뜨며 경민을 돌아본다.
“외숙은 몇 번이나 사람 보내고, 직접 찾아오고 난리였는데. 왜 넌 안 그래? 이 싸움 이기려면 나 찾아와서 제발 좀 도와달라고 빌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경민의 말에 동하는 입술을 터트리며 피식 웃는다.
“기다렸나 보다?”
“까고 있네. 내가 왜 널 기다려.”
“넌 꼭 그러더라. 아쉬운 건 너면서, 항상 내가 가주길 바라. 무슨 괴팍한 심보야, 그건? 너 나 상대로 밀당해?”
“미친 새끼.”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짐짓 강한 욕설을 뱉은 경민이 빠르게 눈을 깜박인다. 본심을 들켰을 때 나오는 이경민 특유의 버릇이다. 경민의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왼 듯 알고 있는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조금 기막힌 생각이 들어 동하는 쯧, 혀를 찼다.
잠시 후, 경민이 초조한 듯 혀를 핥으며 입을 연다.
“도와달라고 하면 생각해볼게.”
“필요 없어.”
“야!”
“윤재화는 뭐래? 너한테 뭘 해주겠다고 하던가? 아니면 뭘 못하게 해버리겠다고 하던가.”
동하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꿰뚫는 눈빛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경민은 마른침을 삼킨다. 항상 몇 수 앞을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동하의 눈이, 경민은 늘 부럽고 또 두려웠었다. 두 번쯤 눈을 끔벅이던 경민이 풀 죽은 듯 입을 연다.
“윤재화가 내 약점을 쥐고 있어. 그게 터지면 한동안 시끄러울 거야.”
“어떤?”
“그것까지 알 건 없고.”
“그럼 뭐 더 들을 거 없고.”
동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경민이 다급히 그의 말을 잡았다.
“앉아, 새끼야. 말 아직 안 끝났어.”
“여기 곧 문 닫아. 사장님 퇴근하셔야 돼. 빨리 이야기하던가, 아니면 집에 가던가.”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는 동하를 가만 보다가, 경민이 어렵게 입을 연다.
“성 상납…… 같은 건데. 내가 만났던 몇몇 모델, 배우들 다 그런 쪽으로 엮어서 터트리겠다고.”
“성 상납 같은 게 아니라, 성 상납이네. 이 더러운 새끼.”
“아니야. 그런 목적으로 만났던 거 아니었어. 자연스럽게……, 그냥 술자리에서 오며 가며. 암튼 내가 요구한 적 없다고. 그냥……,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거야.”
우물쭈물 변명하는 경민의 얼굴을 한심한 듯 쏘아보던 동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어디 가?”
“잘못을 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 이번 기회에 반성 제대로 해.”
“도와줘.”
경민이 다급히 동하의 팔을 잡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동하는 징그럽다는 듯 얼른 그의 손을 털어냈다.
“재민이한테……, 내 아들한테 그런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는 않아.”
경민은 민망한 듯 손가락을 오므리며 시무룩하게 답했다. 잘못해놓고 혼날까 봐 걱정하며 집에 안 가겠다고 울먹이던 어린 날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경민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보는 동하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 든다.
“그게 자식한테 부끄러운 짓인지는 알아?”
“…….”
“겨우 이러고 살려고 그렇게 내게서 아득바득 세령이를 빼앗은 거야?”
“빼앗은 거 아냐. 차세령 내가 먼저 좋아했어. 너보다 내가 먼저 걜 만났었다고.”
경민이 억울하다는 듯 발칵 성을 내며 덤벼들었다.
어차피 돌이키지 못할 지난 일을 더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동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너 못 도와. 그런 거래에 기댈 만큼 혜석에 욕심 없어. 다만.”
“……?”
“네가 조금이라도 이 회사, 이 회사에 소속된 직원들, 그 모두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무런 조건 달지 말고 그냥 도와.”
경민의 눈빛이 혼란스럽게 흔들린다.
“잘 생각해 봐. 시간 없으니까 되도록 빨리.”
공연히 입술을 깨물며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경민을 두고 동하는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걸어 나가던 동하는, 영 무언가 마음에 걸려 돌아본다. 경민은 풀 죽은 아이처럼 웅크린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집에 가. 늦었어. 아들 기다린다.”
재민의 이야기가 나오니 경민의 등이 움찔한다.
쯧쯧,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삭히고 동하는 다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