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잘 지냈니? 그때 보고 처음이니 우리 벌써 한 16년만인가. 너는 텔레비전에서 본 것보다 인물이 훨씬 훤하다. 참 잘생겼네.”
동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오는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 오래전, 딱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얼굴이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여자는 16년 전 그때보다 훨씬 더 늙어있었다. 쉰 안팎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앙상하고 얼굴도 이상하리만큼 누렇게 떠 있다. 그래도 한때 미인이라는 소리깨나 들었겠다 싶을 법한 또렷한 이목구비만은 여전했다.
동하가 그 얼굴을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생모와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생모의 친언니. 그러니 동하에게는 이모가 되는 여자는 16년 전 그날과는 달리 조금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동하가 혜석의 친자가 아닌, 이종학과 소윤혜의 외도로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돈을 요구했던 왜가리 같은 목소리도 쉰 것처럼 졸아붙어 있다.
“꼴이 흉측하지? 폐암이야. 말기. 오래 못 산다. 동생 팔아먹은 죗값을 받는지 나도 꼭 같은 병에 걸렸지 뭐니.”
여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더니 실실 웃는다. 더는 삶의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아 보이는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렇다구 오해는 하지 말어. 너한테 나 살려달라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 나도 그 정도 염치는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살려드릴 맘, 없거든요.”
동하는 자꾸만 실없이 키득거리는 여자의 웃음을 차단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동하의 냉정한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가 웃음기를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전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게……, 누가 내게 연락을 해왔어. 병원비며 뭐며 다 해결해 줄 테니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근데 그게…… 아무래도 예전에 내가 받은 전화랑 너무 닮아서. 그때도 어떤 사람이 네가 윤혜가 낳은 아들이라는 걸 기자한테 말해주기만 하면 돈을 주겠다고 했었거든. 물론 그때 같이 살던 남자가 그렇게 한두 푼 받는 것보다는 협박하는 게 더 큰돈이 될 거라고 해서 그렇게 한 거지만…….”
죄책감인지, 수치심인지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동하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진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하자 뜨거운 피가 온몸 한 바퀴를 크게 돌았다.
“동하야, 나는 아무 말 않을 거야. 내일모레 죽을 사람이 무슨 돈 욕심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하겠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구. 내가 죽는 날까지 이 비밀은 묻고 갈 거야. 아는 사람 더 없어. 그때 그 남자도 벌 받아 죽었어. 빚쟁이들한테 두들겨 맞아서…….”
울먹울먹 말을 이어가던 여자는 가시처럼 마른 손을 코앞에 모으더니 연신 빌기 시작했다.
“널 볼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해야 내가 죽어서 윤혜 볼 낯이 있을 것 같았어. 내가, 너한테 정말 몹쓸 짓 했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내가 잘못했다.”
마르고 닳도록 손을 비비며 눈물을 짜내는 여자를 두고 동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괴로워야 그녀가 죄책감을 덜고 조금은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인 것이었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연신 부는 추운 날이었지만, 하늘은 막 세수를 마친 소녀의 얼굴처럼 맑은 초봄.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동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에 시선을 빼앗겼다. 언젠가 이 길을 지나며 본 적이 있는 목련 나무였다.
가지 끝에 강아지 꼬리처럼 매달린 꽃봉오리가 탐스럽다. 해가 많이 드는 쪽으로는 성급하게 껍질을 까고 머리를 내민 하얀 꽃잎도 보였다.
세상에 모든 목련 나무를 베어버리지 않는 한, 매해 지천으로 피어나는 저 아름다운 꽃을 피할 수 없으리라. 동하는 더 이상 그것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상천동으로 가자. 어머니를 뵈어야겠어.”
수찬이 룸미러를 통해 놀란 눈으로 동하를 바라보다가, 이내 핸들을 돌렸다.
***
윤여화는 시선을 모로 외면한 채로 앉아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앉은 채로, 윤여화는 저 먼 곳을 보고, 동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있다. 일평생 암묵적으로 유지해 온 그들의 관계가 그 단편적인 모습에서도 숨겨지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났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온 이유를 묻지도 않았고, 동하 역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상, 더 이상은 이곳을 찾을 이유가 사라져버린 자신이 다시 이곳의 문턱을 넘은 것에 대해 먼저 설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일생을 평행선 위에서 달려온 자신들이 어느 날 어느 순간, 딱 한 보를 움직여, 마침내 어느 한 점에서 만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참, 멈춘 것 같은 시간 속에 고요히 앉아 있던 동하가 천천히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저 좀 봐주세요.”
윤여화의 옆모습이 움찔한다.
“한 번만, 저 좀 봐주세요.”
“…….”
“어머니를 보면서 제가 마음속으로 가장 많이 했던 말입니다. 수도 없이 망설였던 말인데, 막상 입 밖으로 내놓으니까 참 별거 아니네요.”
동하는 허탈한 듯 조금 웃었다. 남자는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차분하게 고정되었던 머리카락이 그의 긴 손가락 사이로 차르르 흩어졌다. 동하의 얼굴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격식 속에 숨겨져 있던, 소년 같은 그의 본 얼굴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더는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았다. 더는 꾸미고 싶지 않았고,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고, 더는 숨기고 싶지 않다.
“언젠가 그러셨죠? 왜 나를 당신 아들로 키우셨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그러셨어요. 내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너를 데려다 키웠을 뿐이라고.”
“…….”
“제게 상처주려고 하셨잖아요. 제가 당신이 괴로웠던 만큼 괴로웠으면 해서 하신 말이었어요. 내가 친어머니라고 믿었던 당신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더 고통스러워지길 바라서. 그렇죠?”
때꾼하게 야윈 윤여화의 턱이 바르르 떨린다. 동하는 황혼처럼 사윈 시선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당신께서 절 어떤 마음으로 데려다 키우셨든, 어머니에 대한 제 마음은 하나뿐이었거든요.”
“…….”
“내게 어머니는, 당신 한 분뿐이었어요.”
동하는 눈과 코, 목구멍 어느 부분이 매캐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제가 했던 약속, 앞으로도 여전할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저를 두고 누가 당신을 겁박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꼭꼭 씹은 말을 마친 동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하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윤여화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창밖으로, 정원을 지나 천천히 걸어 나가는 동하의 뒷모습이 보인다. 창문을 가리던 목련 나무가 사라진 그 틈으로 그가 선명히 보였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 이제는 완전한 남자가 된 그에게서, 윤여화는 문득 앳된 소년의 모습을 본다.
동하가 혜석의 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밝히겠다는 협박이 있던 날. 그간 필사적으로 묻어두었던 검은 비밀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면 받게 될 손가락질과 눈길, 그리고 인해 바닥으로 떨어질 자신의 자존심과, 위태로워질 경민의 자리를 생각하자 윤여화는 거의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더는 지키고 싶은 것도, 에너지도 남지 않은 그녀는 이종학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때, 동하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게요. 이 집안 어떤 것도, 혜석의 어떤 것도 결코. 그러니까 헤어지지 마세요. 제발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그녀의 무릎 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겠다고. 살라고 하시는 대로 살겠다고. 그것도 용납이 되지 않으시면 죽은 듯 숨죽이겠다고. 그 어린아이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었다.
그날 이후 지금껏 동하는 그렇게 살았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았고, 어떤 것도 제 것으로 하지 않았다. 하물며 제 것을 빼앗겼을 때에도, 경민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이 땅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그로 인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을 그 모든 순간까지도. 그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윤여화는 미시감을 느꼈다. 생소하다. 내 불행의 씨앗이라고 믿었던 저 아이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뒤흔들 것이라 생각하고 끝없이 의심했던 저 아이가, 내가 모질게 외면하고, 짓밟고, 미워했던 저 애가……. 그녀가 믿었던 그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서.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대체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했던가.’
어째서 인간의 실체 없는 불안의 말로는 이토록 어리석고, 허무한지.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허망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럽다. 겨우 이렇게 되려고 그 오랜 세월을 아득바득 우겨왔단 말인가.
눈앞이 흐려진다. 윤여화는 재빨리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나 꺼칠해진 얼굴 위로 이내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자꾸만 흘렀다. 일평생을 참아온 모든 것이 그 안에 녹아있는 것인지, 눈물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쓰고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