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예상대로 혜석이 정리를 시도한 상장사의 지분을 차곡차곡 확보한 사모펀드는 즉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영권확보를 위해 외부이사를 파견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의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자 내부에서도 적잖은 반향이 일어났다. 해당 사모펀드가 지분을 사들였던 기업들이 하나같이 가지치기 끝에 외국계 회사에 매각되는 흐름을 탔던 만큼 손쉽게 사그라질 혼선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변화를 감지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내부 이사들이었다.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는 반응이었다. 지나친 믿음과 나태 때문이었다.
이번 변화에서 입지가 흔들린 이들은, 하나같이 스스로를 반석 위에 꽂은 깃발이라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선대 회장의 신임을 받던 사람들이었고, 장자승계에 힘을 보탰던 인물들이니만큼, 스스로를 실세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것도 당연했다.
무엇보다 이씨 부자의 최측근이었던 윤재화와의 관계가 제법 돈독했기에, 그들은 인수합병과 매각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도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경영위축이 온 기업이 현금 확보를 위한 과정에서 겪는 몸살 정도라 여겼을 뿐.
그들이 무언가 일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즈음은, 이미 자신들의 턱밑까지 외부이사들의 영향력이 침범해왔음을 느꼈을 때였다. 이 혼란스러운 움직임 속에서 이경민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는 처지가 되다 보니, 구심점을 잃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벼리를 향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윤재화에 반해, 자신들의 목숨 줄을 부지해줄 거라 믿는 인물은 필연적으로 한 사람으로 좁혀졌다.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오픈 이후 줄곧 고착상태에 머물렀던 대형 쇼핑몰 노바의 영업이익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고, 여러 가지 송사에 휘말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진 혜석의 부정적 이미지 속에서도, 그래도 ‘NOVA는 다르다.’는 평가를 이끌어 낸 인물이었다.
그의 경영 스타일을 두고 전성기 시절의 이종학을 보는 것 같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희미해진 혜석 그룹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동하가 구심점에 서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일명 윤재화 사단의 움직임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상장사 정리 과정에서 일부 계열사가 가진 잠정적 미래 가치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따라 재무구조 평가의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임시 이사회에서 이동하는 정리되는 사업 중 일부. 그중에서도 특히 ‘온라인 쇼핑몰’ 사업 부문의 수호 카드를 던졌다. 이에 따라 혜석의 내외부에서는 매각파와 수호파로 크게 세력이 갈리기 시작했다. 이는 이경민의 송사로 시시하게 갈무리 된 승계구도에 또 다른 긴장을 불어넣었다.
***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흐름이 연일 내외부의 주목을 받고 있던 즈음, 동하는 윤 전무의 집무실을 찾았다.
“일단 앉지.”
웃는 얼굴로 동하를 반긴 윤재화는 소파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기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잖아도 널 한번 볼 생각이었다.”
“보내드린 기획서와 재무개선 약정내용은 확인하셨습니까?”
“어이구, 궁둥이 붙이자마자 일 이야기냐? 네가 이렇게나 성격이 급한 줄은 몰랐는데.”
윤재화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리려는 기색이었으나, 동하는 그의 넉살에 휘말리지 않았다.
“전국적 규모의 마트 설립으로 거점지역마다 대형 물류 창고 인프라가 마련된 만큼, 자체적 유통망을 개선시키기만 한다면 온라인쇼핑은 전도유망한 사업입니다.”
동하가 단호하게 농담을 자르고 본론을 이야기하자 윤재화는 삐죽 눈썹을 치떴다.
“그 자체적 유통망 개선에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할 텐데, 구축 시간 대비 투자가치가 밝다고 보기 힘들어. 이미 경쟁사가 상당 부분의 시장을 확보한 이상, 이제 와 막차에 오르는 모험을 하느니, 유리한 조건에서 정리해 현금자산을 확보해두는 것이 요즘 같은 불경기에 더 유리하지. 네가 한 생각, 이쪽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고려는 하셨다면 충분히 아셨을 겁니다.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라는 걸.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시죠. 걱정스러울 만큼 성급하게.”
동하의 지적에 윤재화는 즉시 얼굴을 굳혔다. 그의 만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동하는 위축되지 않았다.
“기존의 단조로운 온라인쇼핑 구조를 따른다면야 막차에 오르는 거겠지만, 새로운 형태의 쇼핑 패턴을 설계한다면 이 사업, 블루칩이 될 수 있습니다. 향후 이 회사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어요. 비대면 서비스업의 미래가치 역시 따로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죠. 기획서를 충분히 검토하셨다면요.”
동하의 눈빛이 윤재화를 꿰뚫을 듯 날카롭게 벼렸다. 지지 않고 쏘아보던 윤재화는 곧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그리곤 아이를 달래듯 동하의 허벅지를 툭툭 친다.
“기특한 녀석.”
얼핏 조카를 칭찬하는 듯, 다정해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그의 다리를 꾹, 짚는 마디에 강한 힘과 또 그만큼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동하는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에 뱀이 휘감고 지나간 것처럼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네가 똑똑한 녀석이라는 것 안다. 어릴 때부터 그랬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워낙 영특해 웬만한 어른들도 말 한마디로 입 다물게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아. 그럼에도 넌 늘 겸손했지. 네가 옳다는 것을 알아도 결코 함부로 입을 여는 법이 없었어.”
말길이 다른 쪽으로 흐른다. 둥근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를 지은 윤재화가 다정하게 동하의 무릎을 한 번 더 쓸었다.
“네가 왜 그랬을까?”
“…….”
“그때는 네가 분수를 알았기 때문 아니겠니?”
여전히 웃고 있지만, 윤재화의 눈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살포시 미간을 찌푸린 동하는 곧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는다.
“제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많이 컸지. 무모해졌고.”
“저는 어릴 때, 그게 참 궁금했습니다. 외숙이 저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물론 좋아할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자기 친누님의 자존심을 짓밟은 불행의 씨앗인데.”
“뭐, 그래.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구나.”
윤재화는 동의한다는 듯 조금 웃었다.
“그렇지만 저를 볼 때마다 외숙은 항상 웃어주셨기 때문에 그래도 날 싫어하지는 않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좀 있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머잖아 그게 헛된 망상이었다는 걸 알게 됐죠.”
“……?”
“형의 잘못을 내게 덮어씌우셨잖아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거, 너도 잘 알잖니.”
윤재화는 몸을 소파에 기대며 너그러운 투로 대답했다. 웃으려 애쓰는 듯했지만 입꼬리만 바르르 떨릴 뿐, 남자의 미소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동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날도 절 보며 웃으셨죠. 지금처럼 이렇게.”
동하는 흔들림 없는 차가운 눈으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
“제 앞에서 분수를 말씀하신다면, 저도 제 나름의 대꾸를 해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외숙, 욕심을 내는 것에도 분수가 있는 법입니다.”
차가운 경고를 듣는 윤재화의 눈 밑이 조금 떨렸다. 그러나 남자는 곧 표정을 풀고 빙긋 웃는다.
“무슨 뜻이지? 내가 무슨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거야?”
자못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윤재화를 보며 동하가 픽, 코웃음을 쳤다.
“헤진 보자기에 황금알을 싸서 버리시려고 하잖아요. 교묘하게 눈가림해서.”
“……!”
“그 계획이, 부디 외숙의 욕심이 아니길 바랍니다.”
쏘아보는 동하의 눈빛이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워 윤재화의 얼굴을 꿰뚫을 듯하다.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구나.”
윤재화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억지로 조금 웃는다.
“웃지 마세요. 이제 웃는 얼굴에 속는 나이 아닙니다.”
말허리를 자르는 동하의 목소리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윤재화는 하려던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씁쓸한 듯 조금 웃었다. 남자의 관자놀이에 불거진 핏줄이 눈에 보이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동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견이 끝내 조율되지 않는다면 끝까지 가야겠지요. 체력 관리 잘하세요, 보약도 좀 지어 드시고요.”
동하가 나가자 윤재화는 얼굴에 남았던 일말의 미소마저 지웠다. 한참이나 마른 입술을 곱씹던 남자는 무언가 결심한 듯 전화기를 들었다.
***
서로의 입장 차이는 한 치도 좁혀지지 않고 점점 더 팽팽해졌다. 지분 확보에 더 유리한 고지에 서는 것이 중요해진 이상, 암암리에 주요 지주들과의 미팅을 진행하며 경쟁에 돌입하는 흐름은 당연했다. 누가 누구의 편에 섰다, 어느 쪽이 어떤 발전방향을 내놓았다 하는 등의 소식과 함께 주가는 무섭게 요동쳤다.
이 상황 속에서 지금껏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혜석 가(家)의 향후 입장이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껏 굳건하게 한 몸처럼 움직였던 윤재화, 윤여화 남매가 이경민 부사장 보직해임 건으로 좁힐 수 없는 갈등을 겪고 있을 거라는 추측과 함께 이경민, 이동하 형제의 불화설 역시 연일 호사가들의 입에 올랐다.
양측 모두가 상당한 핸디캡을 가진 상태에서 과연 누가 설득에 성공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작은 소문 하나에도 손바닥 뒤집듯 여론이 바뀌는 혼선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기주총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동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