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이종학 회장의 유산 상속이 정리가 되고, 혜석그룹의 세대교체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시점. 혜석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혜석이 내수시장의 위축에 따른 변화라는 입장을 내세워,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는 사업을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간 과도하게 몸집을 키운 것에 비해, 내실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혜석이기에 해당 결정은 충분한 명분이 있었으나, 정리 대상에 오른 사업들이 하나같이 이경민 부사장이 단독으로 추진해오던 분야라는 점은 여러 사람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경민 부사장이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하지 못하도록 아예 손발을 자르려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사회봉사활동을 선고받아 시간을 채워가고 있는 이경민이 집행유예가 끝난 시점이 오면 어떻게 복귀를 할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에게 날아든 뜻밖의 소식이었다.
이 소식에 가장 펄쩍 뛴 사람은 역시 윤여화였다. 이 회장의 사망 이후 오래도록 칩거했던 그녀가 오랜 침묵을 깨고 밖으로 나와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언제나 그랬듯 윤재화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왜 부사장이 하던 사업을 모두 정리하겠다는 말이 나오게 해?”
바짝 약이 올라 저를 호출한 윤여화를 보는 윤재화의 표정은 묵묵한 듯하기도 했고, 조금은 무심한 것 같기도 했다.
“속상하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부실 사업을 정리해 위기에 처한 기업을 살리는 것은 경영인들의 기본자세입니다. 누님.”
“내가 지금 너한테 그런 훈계 듣겠대?”
“누님.”
윤재화가 고성을 지르는 윤여화의 손을 잡으며 말려보았으나, 그녀는 앙칼지게 동생의 손을 뿌리쳤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때까지 넌 뭘 하고 있었니? 지금까지 너만 믿고 기다렸는데. 어떻게 내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결과를 돌려줘?”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민이가 무리하게 진행한 사업들이 계속해서 적자를 내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이게 최선입니다. 그 자리 없어진다고 경민이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상속받은 지분도 있고요.”
“그거랑은 달라. 어쨌든 혜석의 주인은 경민이야. 그 애가 흔들린 틈을 타 자리를 꿰차고 앉은 것들이, 함부로 그 애의 업적을 좌지우지하게 둘 수는 없어. 어떻게 감히……!”
묵묵히 윤여화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재화의 표정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조금씩 굳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눈에 보이게 차게 식는다. 한참, 무섭도록 딱딱해진 눈빛으로 윤여화를 노려보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연다. 오싹할 만큼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누님, 경민이가 혜석의 주인이라니요. 너무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뭐?”
씩씩거리고 있던 윤여화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윤재화를 돌아본다.
“경민이가 흔들어놓은 회사를 살려보려고 애쓰는 전문경영인들이 오늘도 얼마나 분투를 하고 있는데, 총수 일가라는 이유로 주인을 운운한다는 거, 너무 오만하십니다.”
“재화야!”
“이제 회장님도 떠나고 안 계신데. 혜석이 언제까지고 이씨 집안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누님, 현실을 직시하세요. 경민이는 이 회사 이끌 자질도, 능력도 없어요.”
눈썹 털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을 잇는 윤재화를 보는 윤여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너…….”
“누님. 누님이 경민이에 대해 모르시는 게 아직 많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윤여화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 든다.
“알아서 좋을 거 없으십니다. 세상에는 좀 모르고 지나가는 게 좋을 때가 있어요.”
윤재화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바르르 떨리는 누나의 손을 툭툭 두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재화!”
“너무 걱정 마세요. 경민이 언제까지고 저렇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여론이 좀 잠잠해지고, 좋은 기회가 오면 그때는 뭐, 작은 계열사 하나 맡겨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잠자코 좀 기다리세요.”
윤재화는 박차고 일어나려는 윤여화의 어깨를 꾹 누르며, 눈을 끔벅 감았다 떴다. 그리곤 그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윤여화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윤재화를 올려보았다.
“제가 뭘요. 난 누님이 원하시던 대로 해드렸는데?”
“……?”
“동하는 안 된다면서요. 그래서 막아드렸잖습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드렸는데, 왜 그렇게 원수 보듯 하시는 겁니까?”
“……너…… 처음부터…….”
“처음부터는 아니에요. 내 진실한 충성심을 누님이 권리처럼 이용했을 때부터 조금씩 회의감이 느껴진 거지. 난 이씨 집안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누님은 어땠어요? 내 아들까지 데려다 나처럼 머슴으로 만들려고 했잖아요? 내 아들이 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밑에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합니까? 내 아들이 당신 아들보다 못한 게 뭐라고.”
윤재화는 턱밑으로 볼록하게 근육이 치솟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천천히 힘을 푼다.
“누님. 누님은 이 씨가 아니라 윤 씨 아닙니까. 동하에게 빼앗기느니 나, 윤재화라도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얼마나 복이에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윤재화를 노려보는 윤여화의 눈에 핏발이 선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동생의 팔을 강하게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정신 똑바로 차려. 네 말대로 경민이가 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지분이 상당하잖니? 내가 가진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될 거야. 이거면 네가 우릴 함부로 할 수 없을 텐데.”
그러나 윤재화는 꿈쩍도 하지 않고, 되레 빙긋 웃었다. 그리곤 자신만만하게 이죽거렸다.
“누님은 아무리 싫어도 결국엔 제 손을 들어주게 되실 겁니다.”
그가 윤여화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말했잖아요. 누님이 경민이에 대해 아직 모르시는 게 많다고. 지금까지 터진 건, 애들 장난에 불과한데.”
싱글거리는 윤재화의 웃음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도 기어이 나를 상대하시겠다면 해보세요. 어차피 나도 경민이 곱게는 안 둘 거예요. 그럼 뭐, 결국엔 동하 좋은 일이지. 어쩌실래요? 하실래요?”
웃고 있었지만, 윤재화의 말은 그 어떤 협박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윤여화는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모든 것이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단단히 뭉쳐 도무지 풀어낼 수가 없을 것 같다. 앞으로는 불길이, 뒤로는 가시밭길이 펼쳐진 곳에 고립된 듯, 싸늘한 고독이 느껴졌다.
***
대규모 사업 정리에 대한 소식은 단연 동하에게도 닿았다.
“윤재화 쪽에서 뒤통수를 제대로 친 것 같아요. 이대로라면 이경민이 일선에 복귀하는 일은 굉장히 힘들어지겠는데요? 햐, 가족끼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대체 뭔 놈에 집구석이 이렇게 아수라장인지…….”
수찬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저를 빤하게 보는 동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 선배는 빼고요.”
“됐어. 이미 늦었다.”
“아, 정말입니다. 제가 설마 선배를 깠으려고요.”
“너 원래 주특기잖아. 아닌 척하면서 나 까는 거.”
“에이,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수찬이 손까지 들어 흔들며 극구 부인한다. 피식, 웃어 보인 동하는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다본다.
“이경민 입장에서 보면 뒤통수겠지만, 회사 입장에선 어느 정도 필요한 결정이야.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어.”
“그럼 선배는 동의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경민이 섭섭해하려나?”
“네?”
수찬이 토끼처럼 눈을 뜨고 번쩍 놀란다.
“농담한 거야.”
동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곤 습관처럼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달그락, 달그락 두드렸다.
그 역시 이경민이 핵심기획사업으로 밀어붙였던 여러 부문에서 상당한 영업 손실이 일어나고 있음을 진즉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대형 쇼핑몰 노바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이미 적자전환을 한 상태였다. 부실 사업에 정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에는 그 역시 노선을 같이할 의사가 있었다.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리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과, 그로 인해 그 사업에 몸담고 있던 상당수의 직원이 자리를 잃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윤재화 대표이사를 중심으로 생겨난 개혁파들은 이미 빅딜을 할 사모펀드와의 접촉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들이 접선하고 있는 사모펀드의 성격상, 지분투자 계약이 성사된다면 공격적인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지나치게 빠른 변화에 휩쓸릴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어쩌시게요?”
한참을 기다리던 수찬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캐물었다.
말아 쥔 주먹으로 입술을 툭툭 치던 동하가 영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살짝 비튼다.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아.”
“아, 그러니까. 선배는 도대체 어쩌시겠다고요. 이경민 편에 설 겁니까, 윤재화 편에 설 겁니까. 말 좀 해주세요. 네?”
“나?”
그렇게 되물은 동하는 살짝 눈썹을 치뜬다. 스읍, 잇새로 숨을 들이마신 그가 이윽고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누구 편도 아니야. 난 내 편이지.”
동하는 탁 소리가 나도록 파일을 접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동하의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