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전화를 끊자마자 사희는 그의 집으로 달려왔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도 괜찮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하는 욕실에 있었다. 손이 델만큼 뜨거운 물이 찬 욕조에 기대 죽은 듯 잠들어 있다. 깨울까도 싶었지만 워낙 곤하게 잠이 든 것 같아 사희는 그냥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험한 꿈을 꾸는 것인지 동하는 종종 강하게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고, 옅은 신음을 내기도 했다. 이마에서 시작된 땀이 뺨과 콧날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그의 얼굴이 붉다. 열이 있는 것 같았다.
사희는 가만히 손을 뻗어 남자의 이마를 짚어본다. 추운 곳에 있다 들어와 차가워진 손 때문인지 그녀의 손길이 닿자 동하는 움찔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눈이 부신지 찌푸린 눈꺼풀을 느릿느릿하게 뜨던 남자가 사희를 멍하니 바라본다.
사희는 몸을 기울여 욕조 난간에 팔을 받치고 턱을 괸 채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동하가 짓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듯한 표정을 사희는 유독 좋아했다. 한순간도 틈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그럴 때만큼은 순진한 철부지 아이 같아서 몹시 귀여웠다.
그녀가 아이를 보듯 다정한 눈길로 꼼꼼하게 남자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바라보는데, 동하의 미간이 아프게 찌푸려 든다. 그리곤 슬픈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생각지 못한 말에 사희는 몸이 조금 굳었다. 열에 취한 남자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찾는 인물이, 그에게는 한 번도 온전하게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파온다.
사희는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기대오는 남자의 얼굴이 뜨겁다. 사희는 동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곤, 아이를 어르듯 그의 등을 토닥인다.
사희의 몸에 남은 한기가 피부에 닿자, 동하도 정신이 드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이 환영이었음을 깨닫곤, 조금은 허무해 하는 것도 같았다. 한참 그렇게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동하가 사희의 등허리에 손을 얹는다.
“고마워, 와줘서…….”
동하의 입에서 나온 뜨거운 숨이 사희의 목덜미에 닿는다. 가슴이 데는 것처럼 아프다.
“아프면 말을 하지.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혼자 아팠을 거 아냐.”
사희는 책망하듯 동하를 꾸짖으며 그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품 안에 안겨있는 이 커다랗고 건강한 남자가 오늘따라 가여운 아이처럼 느껴졌다.
동하는 욕실에서 나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 뭐라도 좀 먹여야 할 것 같아 냉장고를 뒤져보았지만 마실 거리 몇 가지를 제외하곤 커다란 냉장고는 거의 비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운동장처럼 큰 주방 어디에도 사람이 산 흔적이 없었다.
그가 이 큰 집에서 홀로 보냈을 많은 시간을 생각해본다. 새삼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인 그가, 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슴이 물 먹은 듯, 먹먹해졌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이었다. 동하는 목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에 눈을 떴다. 바깥 날씨가 추운지, 집 안은 자동으로 설정해 둔 온도에 맞춰 연신 난방이 되고 있었다. 덥고 메마른 공기가 콧속부터 목구멍을 말려 마른기침이 났다.
옅은 기침을 하며 방 밖으로 나왔다. 불 꺼진 실내는 어둑해서 지금이 몇 시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 리모컨을 들어 거센 기세로 돌아가고 있는 중앙난방장치부터 껐다. 그리곤 창을 답답하게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는다.
위잉, 하는 전자음과 함께 높다란 글라스월을 덮고 있던 커튼이 벗겨지자,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밖에는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최고층이라 눈비가 이토록 차분하게 내리는 모습을 보기가 힘든데, 오늘은 바람도 잠든 고요한 밤인 모양이다.
도로에 자동차의 행렬이 뜸한 것을 보니 꽤 늦은 시간인 듯하다. 홀린 것처럼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동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사희가 그곳에 잠들어 있었다.
‘아직 여기에 있었구나.’
그녀가 이 공간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황량하게 넓던 집이 꽉 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동하는 슬리퍼 끄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걸어 그녀의 곁에 앉는다. 잠든 사희의 모습이 그린 것처럼 아름다워,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도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귀한 예술작품을 보듯 오래도록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훈훈한 실내온도 때문에 복숭앗빛이 된 여자의 뺨을 손끝으로 가만히 어루만진다. 그 손길에 설핏, 잠에서 깨어난 사희가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핀다.
“괜찮아요?”
“응.”
“정말 괜찮아? 아까는 열이 높아서…….”
사희는 동하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잘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다. 그리곤 제 이마를 동하의 이마에 붙이고 또 한참을 갸우뚱했다.
“뭐 하는 거야?”
“수아가 열이 나면 언니도 이렇게 했던 것 같아서. 그런데 난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사희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이마를 긁는다. 동하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여자의 행동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곤 얼굴에서 멀어지는 사희의 손을 잡는다.
“한 번 더 해줄래?”
“뭘?”
“이마에 손 얹는 거. 그렇게 이마를 붙여주는 것도. 한 번만 더 해줘.”
“응?”
사희는 별스러운 요구라는 듯, 눈썹을 살짝 치떴다가 곧 그의 청대로 이마에 손을 얹고, 또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였다. 사희의 이마가 닿자, 동하는 기분이 좋아진 듯, 사르르 눈을 감는다.
“이게 좋아요?”
“응.”
“열이 나는지, 안 나는지도 구분 못하는 엉터리인데?”
“엉터리여도 괜찮아. 이사희는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스럽거든.”
동하는 사희의 코끝에 제 코를 살짝 문지르며 싱긋 웃었다. 그의 입가에 번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느끼며 사희도 함께 웃었다.
“이리 와 봐.”
동하는 사희를 일으켜 창가로 데려갔다. 눈발은 조금 전보다 더 굵어져, 하늘에서 소담하게 뭉친 솜뭉치가 둥둥 떨어지는 것 같다.
“언제 이렇게 눈이 왔지?”
사희는 유리창에 바짝 붙어 하얗게 변한 세상을 바라보며 감탄한다.
고요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동하는 사희를 등 뒤에서 안아,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
허리를 감은 강인한 팔이 주는 안정감, 나른하고 평온한 호흡, 따듯한 온기와 바디워시 향기가 섞인 그의 체향에 사희는 깊은 평화를 느꼈다. 사희는 남자의 얼굴에 제 뺨을 붙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꼭 크리스마스 같다.”
“그러게.”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나가요. 나가서 눈 구경해요.”
사희가 동하 쪽으로 몸을 돌리곤 대단한 계획이라도 발표하듯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외쳤다. 사희의 눈이 개구쟁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진심이야?”
“응. 지금 아니면 금방 눈이 더러워질 거야. 우리 얼른 나가서 깨끗한 눈 밟아요!”
빽하고 소리친 사희가 이리저리 부산스레 움직이며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챙기기 시작한다. 그리곤 썩 내키지 않아서 멀뚱하게 선 동하에게 억지로 옷을 껴입히곤, 등을 떠밀었다.
자정이 넘은 오피스텔 단지는 눈 때문인지 평소보다 한층 더 고요했다. 눈이 덮인 세상은 어제까지 보았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초설에 발을 디디니 뽀드득,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단지 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꼭꼭 눈을 다져 밟았다. 새하얀 눈 위에 나란히 걷는 발자국이 찍히고, 머잖아 그 발자국 위로 새로운 눈이 쌓여 흔적은 희미하게 사라진다. 마치 둘만이 아는 비밀의 세계로 가는 것 같다는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공기가 진짜 상쾌하다.”
사희가 목도리에 묻혀있던 얼굴을 내밀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뱉자 뽀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안개처럼 흩어진다.
“춥지는 않아?”
“추운데 좋아. 사실 나 추운 거 정말 싫어하거든. 그런데 오늘은 좋네요. 자기랑 있어서 그런가 봐.”
“자기?”
동하는 사희에게서 처음 듣는 호칭에 조금 놀라, 그녀를 돌아본다.
“응, 자기. 내 남자한테 자기라고 하는데 그게 뭐 이상해?”
“이사희 많이 변했네, 그런 말도 잘하고.”
동하가 붉어진 사희의 코끝을 톡 건드리며, 귀엽다는 듯 본다. 사희는 턱을 들어 우쭐한 표정을 짓더니 동하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이동하 내 거야. 아무한테도 안 줄 거야.”
동하는 꼼지락거리며 안겨드는 사희의 어깨를 힘주어 안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네 거야. 아무도 못 가지게 할 거야.”
사희가 남자의 허리를 안은 채 고개를 쳐들어 동하를 올려다본다.
“그럼 내 거니까 나 하고 싶은 거 해도 되는 거지?”
“그럼. 그런데 뭘 하려고?”
“이거.”
사희는 동하의 코트자락을 잡아 매달리듯 몸을 붙인 뒤, 까치발을 들었다. 사희의 입술이 동하의 입술에 닿는다. 바깥 공기에 차갑게 식었던 입술은 몇 번의 스침과 함께 따듯하게 달아오른다. 입술 위로 떨어진 눈꽃이 단숨에 녹을 만큼, 다정하고 따듯한 키스였다.
사희의 까치발이 위태하게 중심을 잃자, 이번엔 동하가 몸을 조금 굽혀 사희를 번쩍 안아 올렸다. 불쑥 올라, 이제는 동하를 내려다보게 된 사희가 다정하게 남자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별을 박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희는 남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러자 동하가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내가 더.”
“아니, 내가 더 사랑해.”
“어떤 말을 해도, 당신은 나 못 이겨. 늘 내가 더 널 사랑하니까.”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보다 더 사랑한다는 대답을 들려주는 동하가 좋았다. 사희는 몸을 기울여 동하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찍는다. 그리곤 그의 귓가에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 이제 추워. 우리 이제 들어갈까요? 자기가 따듯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동하는 그 말에 담긴 요염한 속뜻을 알아채곤, 의뭉스럽게 빙긋 웃는다.
“그 말 언제 하나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사희는 엉덩이 어디쯤에서, 그녀를 둔탁하게 찌르는 남자의 야릇한 도발을 오롯이 느끼며, 작게 키득거렸다. 사희를 안은 채 걸어가는 동하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머리 위로 끊임없이 눈이 쏟아지는데, 왜인지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