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97화 (98/109)

#97

“아, 맞다. 상관없겠구나. 형님 열애 중이시잖아요? 그 수영선수인지 하는……. 아주 미인이시던데. 그런데 전 결혼할 여자는 미모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보는데요. 경민 형님도 그렇고, 형님도 그렇고 너무 여자 얼굴만 보시는 거 아닙니까?”

구영은 천진한 표정으로 시시덕거리며 계속 입을 놀렸다.

“두 분은 참 뭐랄까.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참 어렵게도 가세요. 그 형수 말고, 집에서 맺어주는 여자랑 결혼했으면 경민 형님이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으셨을 텐데. 좀 안타까워요.”

동하는 시린 듯 찌푸려 뜬 눈으로 천천히 구영을 돌아본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희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생각이 난다.

어릴 때부터 경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던 애송이. 그의 살가운 아는 체가 어색했던 것도, 그가 예전엔 자신에게 한 번도 그런 붙임성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노골적으로 이경민만을 따르던 녀석. 그 이유가 무엇인지, 동하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의 충성 따위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기에, 안중에 두지 않아 잠시 잊었을 뿐.

“너는 쉬운 길을 걸을 생각인가 보지?”

동하가 유들유들하게 고개를 젖히곤,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그럼요. 저는 절대 모험 안 합니다. 쉽고 안전한 길만 갈 거예요.”

동하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산뜻하게 올라가는 남자의 입꼬리가 매혹적이다.

구영의 표정이 조금 굳더니 이내 적대적인 시선으로 동하를 노려본다.

“왜 웃어요?”

“네가 웃겼잖아.”

동하는 적대적인 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큭, 웃었다.

멀리서 인사를 받고 있던 윤재화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슬쩍 돌아본다. 동하는 그를 향해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윤재화는 환하게 웃는 동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동하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표정으로 구영을 내려다본다.

“안전하고 싶다고. 그럼 넌 우선 표정 관리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회장님 병실 앞에서,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너희 부자가 꼭 이 집안 무너지길 고대하는 것처럼 느끼지 않겠어? 그럼 네 아버지 체면이 뭐가 되겠니.”

구영의 입가가 바르르 떨린다.

“어쨌든 내 애인 미모를 칭찬해준 건 고마워. 너도 부디 좋은 여자 만나기를 바란다. 아, 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으니까……, 넌 그냥 딱 너 닮은 여자 만나면 되겠구나.”

동하는 구영의 얼굴 앞으로 바짝 제 얼굴을 들이밀며 생긋 웃는다.

“왜 이렇게 굳었어? 좀 웃어. 이럴 때 웃는 거야. 아무 때나 실실거리는 게 아니라.”

동하의 반듯한 이목구비에 가소로운 상대에 대한 비웃음이 한껏 어려 있다.

동하는 커다란 손을 들어 구영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장성한 남자의 머리를 마치 개털을 쓰다듬듯 거칠게. 구영이 고개에 힘을 주어 손길을 피해보지만 동하의 손아귀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

북적북적한 밖과는 달리 병실 안은 조용했다. 오래도록 이종학 회장의 수족 역할을 해왔던 미래전략실의 조명진 실장이 문안으로 들어선 동하를 보자 즉시 가까이로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들던 조명진 실장의 시선이 동하의 등 뒤에서 닫히고 있는 문틈 밖으로 향한다. 문밖의 풍경을 본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동하는 그가 주시한 대상이 윤재화임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조 실장의 시선이 다시 동하를 향해 돌아왔을 때는 그의 눈빛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앞서 안으로 걸어 들어간 조명진 실장이 침대 맡에 앉아 있던 윤여화에게 귀엣말로 말을 전하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서리처럼 차가워, 동하는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윤여화는 곧 시선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투명인간을 대하듯 한마디 말도 없이 동하를 지나쳐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 안에는 이윽고 동하와 이종학 회장만이 남겨졌다. 동하는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야윌 대로 야윈 이종학은 마치 고대의 미라 같다. 수 개의 수액들이 연결된 투명한 관이 마른 팔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고, 강퍅한 가슴팍에는 심박을 체크하는 패치들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심전도 화면 속 이종학의 심박이 몹시 미약하다.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는 순간 연명이 힘들다는 선고까지 떨어졌으니, 사실상 이미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왜인지 동하는 그의 죽음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당장 땅에 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도, 이상하게 아버지가 지금도 앞으로도 훗날에도 영원히 살 사람같이 느껴진다.

동하는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본다. 이토록 오래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면 늘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불편해서였다. 아버지. 사실 그 호칭으로 그를 부르는 것이 낯설다. 동하는 지금껏 한 번도 아버지를 가깝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처럼 생각한 것도 아니다. 언제든 가까워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남과는 달리, 아버지와는 그런 가능성조차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무겁게 닫혀있던 입술을 떼고 동하가 마른 입술을 살짝 핥는다.

“어차피 듣지 못하실 테니, 이런 틈을 타서 무슨 말이든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잠깐 말을 멈췄다가, 동하는 곧 씁쓸한 듯 웃었다.

“그런데 참 할 말이 없네요.”

입 안의 연한 살을 한참 질겅거리다가 동하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아버지 앞에선 늘 할 말이 없었어요. 나를 볼 때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후회할지, 미워할지, 아니면 날 불쌍하게 여길지……. 어쩌면 아무 생각이 없으셨는지도 모르고.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쯤은 물어라도 볼 걸 그랬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께 말을 붙이는 게 왜 그렇게 죄스럽고 무서웠는지…….”

동하는 고개를 떨어트리곤 픽, 코끝으로 웃었다. 허탈한 바람 소리가 난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동하가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어 이종학을 본다.

“아버지, 저 이제는 죄인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잘 살고 싶어졌어요. 잘 살아야 할 이유도 생겼고요. 이제는 좀 행복하려고요. 당신이 떠나시기 전에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떠나는 당신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테니까. 이것이 내가 당신의 아들로서 드릴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입니다. 아버지.

묵묵히 말을 마친 동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멈칫, 몸을 굳혔던 동하는 그것이 이종학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얼굴 곁으로 몸을 기울였다.

후우후우, 실바람 같은 산소호흡기 소리에 섞인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풀 붙은 듯 닫혀있던 이종학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열린다. 떨리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박이던 남자는 제 얼굴 곁 가까이에 다가선 동하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부연 안개가 걷히듯, 혼탁했던 눈빛이 서서히 명료해지더니 곧 두 사람의 눈이 또렷하게 마주쳤다.

서리 맞은 가랑잎처럼 바싹 마른 아버지의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이는 것을 본 동하는 조금 더 몸을 기울여, 그의 입가에 귀를 붙였다. 남자의 귓가로 바닷바람 소리 같은 아버지의 음성이 흘러든다.

“미안하다…….”

멈칫, 온몸에 전기가 인 것 같은 강한 경련이 일더니 순간적으로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동하의 눈썹이 파도치듯 일그러진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굳은살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하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잘못했다. 너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했다……. 이…… 말이…… 너무…… 늦었구나.”

어렵게 말을 마친 이종학이 희미한 눈동자를 움직여 코앞까지 다가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33년 만에 처음으로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보았다. 아주 오래도록.

아버지의 눈길이 자신의 얼굴을 차근차근 더듬는 것이 느껴졌다. 동하는 미세하게 진동하는 입술을 강하게 앙다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구멍까지 넘어온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붉어지는 동하의 눈을 보면서, 이종학은 뻐끔뻐끔 붕어처럼 입을 벌린다. 가래 끓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에 묻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기어이 소리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짓누른 눈가를 타고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린다.

비록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으나 동하는 그가 하려 했던 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 그것은 ‘네가 늘 자랑스러웠다.’ 였다.

***

그날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이종학 회장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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