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고진영 실장은 검찰 조사에서 이사희를 이용한 인터넷 여론 조작을 지시한 배후가 이경민 부사장의 아내 차세령임을 밝혔다. 이경민에게 향한 비난의 초점을 와해시키기 위해, 민간인의 사생활을 불법 조사하고, 사실이 아닌 내용을 기재한 글을 올리도록 사주해 여론을 선동했다는 내용이었다.
차세령은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사희와, 세령. 고소인과 피의자로 만난 두 사람은 밋밋한 검은색 사무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사희는 멀찍이 앉아 있는 세령을 보았다. 정물화처럼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종이 탈을 쓴 것 같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사희가 입을 열었다.
“그쪽 변호사가 합의를 제의하시더라고요. 어차피 길게 끌어보았자, 기소유예로 마무리될 확률이 높다고요. 차세령 씨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그러자 줄곧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세령이 시선을 들어 사희를 본다. 세령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킨 눈으로 사희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곧 픽 웃었다. 코끝에서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씁쓸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난 상관없으니까.”
사희는 조금 질렸다는 듯 허, 하고 숨을 뱉는다.
“내게 사과하느니 차라리 전과를 다시겠다?”
“…….”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워요?”
세령은 짙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사희는 착잡한 한숨을 내쉬며 세령을 쏘아본다.
“그렇게 지킨 자존심이 차세령 씨에게 뭘 가져다 줬죠? 이 진흙탕 싸움에서 당신은 도대체 뭘 얻었나요?”
“…….”
“차세령 씨는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를 해고하고,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없게 만들고, 내 부끄러운 속살을 까발렸어요. 그런 짓까지 했으면 적어도 뭐 하나쯤은 얻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인지, 내 눈에 차세령 씨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것 같아 보여서 말이에요.”
세령의 뾰족한 턱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사희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악연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때부터였더라고요. 내가 그 집에 갔던 날.”
세령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문다.
“차세령 씨가 내게 그랬잖아요. 어쨌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잘못이라고.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진짜 잘못은 그런 모습을 만든, 당신들에게 있죠.”
“…….”
“내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와 그런 말은 필요 없거든. 난 남에게 미안할 짓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사희는 천천히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사희는 후련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여전히 그녀를 외면하고 앉아 있는 세령을 보았다.
“고소는 취하해드릴게요. 관대하게.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이, 많은 것을 잃은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돌아서 문고리를 잡으려던 사희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본다.
“재민이 때문이에요”
“……!”
외면하고 있던 세령이 고개를 팩하니 고개를 돌리더니 사희를 무섭게 쏘아본다. 사희는 노려보는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언니가 부탁하더라고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당신에게 한 번쯤은 반성의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이제 아시겠어요? 당신이 괴롭힌 사람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세령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기를 쓰고 버티고 있던 오기가 무너진 듯, 세령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재민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세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사희는 그곳을 떠났다.
구름이 해를 가렸는지 창밖이 어둑어둑해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햇살이 사라지니 접견실 안은 금시에 쌀랑해졌다. 시린 그늘이 드리운 접견실 안에는 숨죽인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떠다녔다.
***
“불법약물 투여와 일명 갑질 논란으로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혜석유통 이경민 부사장이 모든 보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어, 혜석유통은 전문경영인을 도입해 이사회 중심 경영을 하겠다는 지침을 내놓았습니다. 이로써 전 혜석유통 윤재화 전무와 김명재 상임고문이 공동대표이사직에 오르며 지난날의 과오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습니다.”
이경민 부사장의 보직해임으로 분위기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가 등기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상 언제든 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만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무늬만 사과인 행태를 꼬집는 비난 칼럼이 하루가 멀게 쏟아지고, 시장평가기관에서는 사회적 공분을 산 혜석유통을 ESG 우수기업 지수에서 제외하겠다는 결정을 내놓았다.
혜석그룹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어느 날, 이종학 회장이 또 한 번 쇼크를 일으켰다. 쉬쉬했던 그동안의 방침을 깨고, 혜석 측에서는 이종학 회장의 위독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눈을 뿌릴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병동 주차장에는 소식을 받고 찾아온 사람들이 타고 온 고급 세단이 즐비했다.
동하는 눈처럼 새하얀 복도를 걸어, VIP 병동으로 들어섰다. 방문객의 신상을 확인하는 시큐리티들 앞에서 동하는 걸음을 멈췄다. 동하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시큐리티의 앞을 조금 더 높은 직급으로 보이는 시큐리티가 가로막는다.
“이 분은 가족이십니다.”
그러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큐리티들이 동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들어가십시오.”
동하는 픽 코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같은 자리에서 입장을 제지당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가족이라고 말하자, 명단에 올라있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었지. 쓴웃음이 번진다.
그사이 모든 것이 너무도 많이 변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기에 가족일 수 없었던 사람이, 가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 것일까. 내 가슴은 그때보다 메마르고, 그때보다 차가워졌는데 어떻게.
이 세계는 사랑보다는 냉정이 가족이 되는 요소라도 되는 것인가. 덜 익은 감을 크게 베어 문 양, 입 안이 영 껄끄럽다.
병실 앞에는 어두운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직 병실 안에 진입할 정도까지의 위치는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리라.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이 자리에 찾아와 문밖을 지키는 것은, 오늘이 지나면 문 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는, 기회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이에나 떼처럼 몰려든 이들이 목을 매달고 우러르는 존재가 그 가운데 서 있다. 윤재화는 방문객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자리는 모순의 바다였다. 사람들은 이종학 회장의 위중함을 땅 꺼질 듯 슬퍼하다가도, 말미에는 윤재화의 대표이사 취임을 축하했다. 혜석에 닥친 위기를 걱정하다가도, 이 혼란스러운 상황의 선두에 선 리더가 윤재화라 다행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인간들이 내뿜는 이중적인 감정에서 참을 수 없는 구린내가 풍긴다. 동하는 목을 단단히 조이고 있는 넥타이를 조금 풀고 느리게 입으로 숨을 쉬었다.
“왔구나.”
주위의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발견한 윤재화가 눈주름이 잡히도록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워낙에 사람 좋은 웃음을 잘 짓는 그였지만, 오늘 그의 미소에는 억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윤재화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 우리 구영이. 기억하니?”
윤재화는 무표정하게 선 동하 앞으로 똘똘해 보이는 청년을 세웠다. 윤재화의 장남, 윤구영.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외숙과 똑 닮은 외모 때문에 동하는 그가 윤재화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얼핏 영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구영은 동하를 보자 꾸벅 인사를 하더니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붙임성 좋은 성격도 닮았는지, 못해도 십몇 년은 만나지 않은 사이임에도 마치 어제도 만난 사이인 양 사근사근하게 군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래.”
동하는 구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구영의 손 크기는 동하의 큰 손에 한참 못 미쳤지만 손아귀 힘이 좋았다. 자신감 있는 태도였다.
“구영이, 곧 학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다. 녀석이 의욕은 좋은데,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 돌아오면 네가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주거라.”
윤재화는 두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둔해주곤 다시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짧게 눈인사를 한 동하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구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더니 변죽 좋게 너스레를 떤다.
“형님은 예나 지금이나 참 미남이시네요. 정재계 장성한 딸 가진 사모님들 사이에서 사윗감으로 인기가 정말 좋으시겠어요.”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웠던가. 동하는 살짝 눈을 찌푸린다. 그렇다고 살차게 구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해 아주 조금 웃어 보였다.
“그럼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동하가 그를 피해 걸음을 옮기는데, 구영이 다시 말을 붙인다.
“물론 워낙 태생 근본까지 다 따지는 세계라 마지막까지 환영받는 건 힘드시겠지만.”
우뚝, 걸음을 멈춘 동하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 든다.
구영은 표정이 바뀐 동하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인다. 일부러 눈치 없는 척, 연기하며 동하의 약점을 찌르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구영의 가느다란 눈 속 다갈색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욕망의 빛이다. 눈앞의 상대에게 더 이상은 굽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오만의 빛이기도 했다.
무엇이 그에게 그 힘을 주었는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하는 옅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조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