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이경민 부사장의 비서실장 고진영의 폭로였다. 근래 혜석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했다는 그는, 수년간 자행된 이경민 부사장의 갑질. 욕설과 폭력, 정신적 학대, 도덕성을 잃은 명령의 강요 등등. 갖가지 정황을 세세하게 폭로했다.
그가 털어놓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혜석 측에서 철저하게 부인해왔던 이경민의 불법약물 의혹까지도 소상하게 밝혀지자, 일은 덮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내사 종결로 방향을 잡아가던 수사도 다시 재점화 될 수밖에 없었다.
부사장의 구속이 불가피해진 분위기에 이르자, 혜석그룹 내부도 발칵 뒤집혔다.
즉시 긴급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책임론과 무마론, 임원들은 그룹의 미래를 위한다는 각자의 의견들을 내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책임론을 들고 나서는 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입니다. 회장님께서도 누워 계신데, 부사장님까지 직위를 내려놓으면 회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화뇌동할 게 아니라 잠자코 기다려봅시다.”
“요즘 같은 시국에 재벌 갑질이 덮어진다고 덮어질 문제입니까? 세상이 바뀌었어요. 내로라하는 그룹의 총수 일가들도 이런 일 벌어지면 하루아침에 보직을 내놓고 물러납니다.”
“그 부분은 부사장님께서 직접 사과 모션을 취하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될 겁니다. 봉사활동이나 기부 같은 걸로 분위기를 좀 바꿔보는 방법도 있을 테고…….”
“불법약물 문제는요? 그게 사과로 해결되겠습니까. 그리고 다 떠나서 지금 혜석 주가가 어떤지 아십니까? 그러잖아도 내수시장 불안정으로 영업이익이 급감한 상태에서, 이런 일까지 터졌으니 엄청난 파장이 일 겁니다. 훗날 다시 복귀하더라도 일단은 책임지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여론이 안정될 겁니다.”
갑론을박으로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점점 심각하게 달아올랐다.
잠시 후, 묵묵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재화가 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그러자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잠시 소강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총수 일가의 최측근인 그의 입장이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 알았어요.”
남자는 느린 말투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내도록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동하를 주시한다.
“이동하 이사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자 회의실 안에 있던 눈이 일제히 동하를 향해 쏠린다.
동하는 눈을 가늘게 흐리며, 저를 주시하고 있는 윤재화의 눈을 마주한다. 모두가 열을 올리며 씨근거리는 가운데,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윤재화의 얼굴이 마치 탈을 쓴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주)혜석 지주회사 체계 정착화의 마에스트로, 윤재화 전무.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혜석.’
동하는 이종학 회장이 보내온 편지 속에 들어있던 칼럼을 떠올린다. 혜석의 차기 주자로 주목하던 인물, 윤재화. 그러나 그는 혜석을 위해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한없이 몸을 낮췄다. 이경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심지어 이종학 회장의 또 다른 아들인 자신조차도 거침없이 꺾어버렸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이경민의 장래에 대해 자신에게 묻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동하의 대답이 어떨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바라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동안 그가 보여 온 무시무시한 행동력이 이경민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인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부유하던 동하는 손가락으로 다닥, 테이블을 두 번 정도 두드리다가 이윽고 의자에 기대있던 몸을 바로 일으켰다.
“일련의 사건이 혜석그룹의 이미지를 해치고,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있으니, 문제를 야기한 사람의 책임은 불가피합니다.”
동하의 말이 끝나자 탄식과 동조의 추임새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윤재화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동하를 보다가 이내 눈썹을 살짝 치뜨며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부터 이경민 부사장 보직 사퇴에 대해 이사들의 의견을 재검토하겠습니다.”
***
집무실로 돌아온 동하는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과 맞닥뜨렸다. 초조한 듯 앉아있던 여자는 동하를 보자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령의 얼굴을 본 동하의 얼굴이 차갑게 식는다. 초조해 보이는 세령의 얼굴에서, 그녀가 무엇 때문에 저를 찾아왔는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공간에 차가운 냉기가 돈다. 찻잔을 내려놓은 수찬이 자리를 떠나기 무섭게 세령이 왈칵 기다려왔던 말을 토해냈다.
“재민 아빠의 보직 사퇴가 결정되었다고 들었어. 과반수가 찬성을 했다고.”
“마땅한 결과야.”
군더더기를 보태지 않고 짧게 대답하는 동하의 목소리가 차갑다.
“네 생각도 그런 거야?”
“아닐 이유가 없잖아.”
“이경민을 외면한다고 해서, 네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그 자리, 네 것 못 돼. 재민 아빠 아니면, 그 자리는 어차피 외숙이 대신할 거야. 그럼 언젠가는 그 자리, 다시 그 사람에게 돌아갈 거고. 시간이 좀 늦춰지는 것뿐, 바뀌는 건 없다고.”
“그렇다면 기다리면 되겠네.”
“……!”
“왜, 못 기다리겠어?”
쏘아 묻는 무감한 말투에 옅은 조소가 묻어있다.
“차세령. 좀 솔직해져 봐. 기다리는 게 싫은 거야? 아니면 기다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일갈을 입은 세령의 얼굴이 파랗게 굳는다.
“너희는 형제잖아…….”
여자는 그것이 마지막 무기라도 되는 양, 중얼거렸다.
동하는 어이없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형제?”
“그래. 네가 이경민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너, 그랬었잖아. 이경민 운명도 가련하다고. 너와 다를 거 없다고…….”
회한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내리뜬 채로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던 동하가 이윽고 쓰게 웃었다. 그리곤 곧 숱진 눈썹을 활처럼 휘어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이경민을 이해하는 거, 이제 그만하려고. 내 밸 없는 이해가, 결국 내 사람을 해치게 한다는 걸 알았거든. 더는 그런 실수 하지 않을 거야.”
동하의 목소리는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세령은 살갗에 미세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령은 입술을 말아 물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잠시 후,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이사희 일, 그 사람이 그런 거 아니야. 내가 그랬어.”
가늘게 좁힌 동하의 눈이 세령을 날카롭게 쏘아본다.
“그러니까 죗값을 치르게 하려는 거라면, 재민 아빠 말고 나를 벌해. 내가 받을게.”
파리하게 식은 얼굴로 어렵게 말을 토해낸 세령이 동하와 시선을 마주한다.
동하는 말 없이 세령을 본다. 여자의 눈자위는 피로와 스트레스로 칙칙하게 꺼져있었다. 물기가 마른 식물처럼 초라하고 앙상했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든다. 자신을 뿌리째 캐내, 다른 땅에 저를 옮겨 심었을 때, 세령은 그 땅에서 자신이 시름시름 말라 죽을 거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예상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살기 위한 선택이라는 변명은 더 이상 그녀를 비호하지 못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지 모를 것이다. 그걸 안다면 벌을 받겠다는 말을 이토록 스스럼없이 입에 올리지 못했을 테니까.
죗값을 시장에서 몇 푼만 지불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처럼 말하는 세령을 보며, 동하는 그녀에게 가졌던 인간으로서의 감정마저도 모두 소멸되는 것을 느꼈다.
“네가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너는 이제 사과도 거래처럼 하는구나.”
“…….”
세령은 동하의 무감한 눈을 보았다. 애잔한 듯 보는 그의 눈에서 동정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를 구할 대상이 잘못됐어. 네가 빌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
“네게 사희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다만, 이것만은 알아둬. 네가 원하는 것이 네 남편의 무탈함이라면,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계속해서 더러운 길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이경민을 끌고 나오는 것뿐이야.”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대꾸한 동하는 더 이상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령이 다급히 그를 따라 일어났지만 동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책상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쌓여있는 결재 서류들을 펼쳐 사인을 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무심하게 만년필을 휘갈기던 동하가 살짝 고개를 들어, 말뚝 박힌 듯 서 있는 세령을 쏘아본다.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날이 선 비수가 되어 세령의 가슴에 박힌다. 아름다워서 더욱 잔인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