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동하가 자신의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던 날. 그를 향해, 경민이 ‘더러운 피’라고 소리쳤을 때, 그때도 동하는 지금처럼 슬픈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단 한 마디 항변도, 변명도 없이, 끝없이 쏟아지는 모욕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이 지고 태어난 원죄에 대한 죗값이라는 듯.
“나는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아팠던 만큼, 너 역시 아팠다는 것을 아니까.”
상처 입은 짐승처럼 동하의 목소리가 끓는다.
“하지만 이경민, 이제 끝이야.”
강하게 악문 동하의 턱이 무섭게 꿈틀거린다. 어쩌면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순간부터 너, 버린다.”
일순, 부릅뜬 경민의 눈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허망해졌다. 속이 빈 허수아비처럼 비틀거리던 경민이, 동아줄을 붙들 듯 동하의 멱살을 잡는다.
“네가 뭔데 그딴 소리를 해. 네가 뭔데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하냐고! 이 새끼야.”
그러나 경민은 더러운 것을 뿌리치듯, 털어내는 동하의 손길에 의해 뒤로 주춤 떠밀렸다. 동하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경민을 노려보다가, 일말의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문을 걸어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서릿발이 언 것처럼 차갑다.
“이, 이동하!”
멍청하게 물러나 있던 경민이 그 뒷모습에 대고 소리친다. 하지만 동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동하! 야! 야, 이 개새끼야! 이동하!!!”
이미 떠난 이를 향해 외치는 부질없는 고함은 점차 희미해지더니 곧 옅은 떨림과 함께 잦아들었다.
“이…동하. 이 개새끼가……, 네가 감히 나를……. 네가 어떻게 나를…….”
경민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콧물과 섞인 끈적끈적한 타액이 턱밑에 모이더니 긴 실처럼 늘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민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울분에 당황했다.
다급히 얼굴을 훔쳐내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고 다시 솟았다. 경민은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짓이겨 깨물 입술 새로 으흑흑, 서글픈 울음이 터져 나온다. 언젠가 동하가 더 이상 자신의 방으로 가주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 밤에 느꼈던 막막함과 두려움, 그리고 배신감과 서운함 같은 것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뭐야, 씨발……. 뭐야! 대체 이게…… 씨발.”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당황스러운 두려움과 절박한 불안의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건 아마도 이제 자신의 곁에 정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서글픈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떠났다. 아니, 잃었다. 경민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우정도, 그리고 미움과 원망으로 외면했으나,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연민을 잃지 않았던 형제도, 모두.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상실감과 외로움이 해일처럼 덮쳐와 그를 삼킨다.
고단하다. 지독한 피로감과 무기력함이 그를 삼킨다. 다리를 잃은 사람처럼 휘청대던 경민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경민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
“이동하가 찾아왔습니다. 모두 알고 온 것 같습니다.”
전화 너머 고진영 실장의 목소리가 은밀하다.
윤재화는 즉시 수화기 음량 버튼을 눌러 소리를 최소화한다. 그의 시선이 먼 발치, 이종학 회장의 침대 곁에 선 누님에게로 향했다가, 이윽고 이종학에게로 향했다.
이 회장의 얼굴은 이미 산 자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파리했다. 산소호흡기에 간헐적으로 차올랐다가 사라지는 희미한 입김만이 그의 생존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종학을 내려다보는 윤여화의 표정이 심란하다. 그가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란다던 그날과는 다르게, 죽음을 앞둔 남편의 얼굴을 보는 그녀의 얼굴은 조금 착잡해 보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그녀의 내면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윤재화는 느낄 수 있다. 그녀가 이종학 회장의 숨을 거둬가지 못하는 것에는 단지 경민의 불안정한 미래만이 원인이 아님을.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마음 한편에는, 그가 어떻게든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남편을 의지하고 있었음을.
“이제 어떻게 할까요?”
고진영이 침묵을 깨고 다시 물었다.
“다음 플랜을 진행하지.”
윤재화는 낮은 목소리로 숨죽여 말했다. 명령을 받아들인 고진영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
윤여화가 윤재화를 돌아본다. 때꾼해진 그녀의 눈꺼풀에 옅은 슬픔과 회한 같은 것이 묻어있다. 윤재화는 전화기를 품에 넣으며 누님을 향해 옅게 미소 짓는다. 그러자 윤여화도 안심한 듯 조금 웃었다.
***
전화기를 잡은 세령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전화는 고진영 실장으로부터 걸려왔다. 그는 이동하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경민을 찾아온 동하의 태도가 전 같지 않았고, 이 일을 묵과할 여지 역시 전혀 없었다고.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 일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의미 없는 사과를 건네곤 전화를 끊었다.
세령은 급하게 윤재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더디게 흘러간다. 거의 끊기기 직전에서야 겨우 신호가 떨어졌다.
“외숙님.”
세령은 다급히 그를 부르곤,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였다.
“들어서 알고 있네.”
윤재화는 세령이 이미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세령은 초조하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그대로 있게나. 이 일을 확대해보았자 그쪽에서도 이득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네. 고작 제 여자의 억울함을 달래주겠다고, 일을 크게 벌이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놈도 욕심이 없는 녀석이 아닐 테니까.”
“…….”
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이동하라면 그것을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한 여자가, 이사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옹색한 자존심이다.
“자네가 정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고진영 실장을 정리해 급한 불을 끄지. 후에 과잉 충성심으로 벌인 단독행동이었다고 설명하면 될 테니.”
세령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윤재화가 다른 제안을 꺼낸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잠시 의심이 들었으나, 지금에 와선 그것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머릿속이 어둡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어느 쪽이 살길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도, 멈출 수도 없다고, 세령은 생각했다.
도덕을 져버린 선택에는 끊을 수 없는 관성이 있다. 배덕은 거듭될수록 쉬워지고, 쉬워질수록 죄책감은 지워진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령은 바싹 마른 입술을 살짝 핥는다. 혀끝에 닿는 입술의 촉감이 거칠었다.
***
“과거, 제 아버지의 부도덕했던 행동을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피해자분들이 겪은 고통이 제 사과로 덜어질 거라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 사죄가 상처받은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희는 깊게 허리를 숙였다. 고개가 테이블에 닿을 것처럼 깊게 구부러들자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사희는 변명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했다.
“부친의 성추문 의혹에 대해서도 인정을 하시는 겁니까?”
과열되어가는 기자회견의 어느 즈음에 도달했을 때, 마침내 민감한 질문이 터졌다. 사희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잡기 위해 다다다다,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섭도록 집요하게 울려대는 셔터 소리를 들으며 사희는 천천히 침을 삼킨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좌중을 한번 느리게 훑었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애절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곧 한 곳에서 멈춘다.
그곳에 동하가 있었다. 동하는 사희와 눈이 마주치자 굳어있던 얼굴을 풀어 조금 웃어 보였다. 그의 따듯한 미소에 빳빳하게 긴장되었던 몸이 봄바람에 눈이 녹듯 서서히 풀린다.
사희는 가슴이 들리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윽고 천천히 뱉어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의혹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고요.”
와르르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처럼 셔터 소리가 또 한 번 장내를 휩쓸고 간다. “그게 누굽니까?”,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피해자를 만나보셨다는 뜻입니까?”, 어지러운 질문이 이어진다.
사희는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꾹 마주 잡았다. 그리곤 바짝 마른 입 안에 겨우 침을 모아 목구멍을 적시곤 고개를 들었다.
“그 의혹의 피해자는 제 언니였습니다.”
사희의 기자회견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 역시 가정폭력의 희생양이었다는 것과, 그녀의 언니가 피해자들로 인해 가혹한 2차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분위기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갚은 이들의 행동은 정당했는지, 그렇다면 그들이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찬반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다 말미에는 이사희 자매에 대한 동정론으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을 뜨겁게 과열시킨 것은 과격한 네티즌들로 인해 신상이 까발려지면서, 궁지에 몰린 폭로자의 발언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뒤로 숨기고, 편파적인 폭로를 한 것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말은 ‘자기도 시켜서 했을 뿐’이라는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러자 여론은 즉시 그 배후를 캐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배후에 대한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가운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