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도착했습니다.”
차를 세운 수찬이 골목 귀퉁이의 작은 편의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폭로 글을 올린 사람이 일을 하고 있다는 곳이었다.
사희는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바지에 거듭 문질러 닦는데, 따뜻한 손이 다가와 곱아든 사희의 손을 잡는다.
“같이 갈까?”
사희는 마른침을 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사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하는 여자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워 아프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어 꼭 잡았다.
“떨지 마. 기죽지도 말고. 넌 옳으니까.”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사희는 근처에 보이는 아무 물건이나 잡아 계산대 앞에 내려놓았다.
“비닐봉투 하시면 50원인데, 드려요?”
그녀가 내려놓은 물건의 바코드를 찍은 남자는 표정이 거의 없는 지친 얼굴로 물었다.
“아, 봉투 드리냐고요?”
사희가 대답이 없자, 남자는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되묻는다. 사희는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역시 사희의 얼굴을 보던 남자의 얼굴에 약간의 경련이 일어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는 사희의 얼굴을 분명하게 알아보고 있었다.
“뭐야.”
그가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뒤로 물러났다.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난 할 말 없어.”
“아뇨. 있으셔야 할 거예요.”
단호하게 대꾸한 사희가 물러날 기미가 없자, 그는 눈알을 빠르게 좌우로 굴리며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그러나 그 앞에 서는 장신의 남자를 보자 더는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아이씨, 낮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곤 거칠게 머리를 흩트렸다. 그러자 염색을 한 지 한참은 지나 보이는 머리카락이 옥수수수염처럼 날린다. 그에게서 묵은 체취와 섞인 찌든 담배 냄새가 났다.
남자는 콜라를 따서 발칵발칵 마시더니 곧 캔을 우그러트리며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뭔데. 왜 찾아온 건데.”
“계속 전화드렸는데 연락이 안 되어서요.”
“내가 뭐 그쪽들처럼 느슨한 팔자인 줄 알아? 보시다시피 나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신세야. 니 애비 때문에 완전히 인생 조졌다고!”
남자는 검지를 치켜들더니 사희의 얼굴을 찌르기라도 할 기세로 윽박을 질렀다.
곁에 앉은 동하의 눈썹이 무섭게 일그러진다.
“그 손 내려.”
건장한 상체를 일으키는 동하의 낮은 저음에 겁을 먹은 남자가 찔끔 뒤로 물러난다. 그리곤 구차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손가락을 구부려 내려놓았다.
“사과를 원하신다는 글을 적으셨더군요. 제게 계속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으셨다고요. 실례지만 어떻게 연락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뭐……. 그냥 누가 당신 전화번호라고 알려줘서 거기에 몇 번 전화 걸었어.”
남자는 똑바로 바라보는 사희의 시선을 피한 채, 우물쭈물 말을 뱉었다. 눈동자를 부산스럽게 굴리며 어물쩍 넘기는 태도만 보아도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욱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사희는 최선을 다해 이성을 차렸다.
“어쨌든 연결이 되지 않았다니 유감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찾아온 건 제 아버지가 피해자 분께 저지른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피해 보상을 원하시면 그것도 해드리겠습니다.”
사희는 투덜거리는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희가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사죄하며 고개를 깊게 숙이자, 남자는 그제야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돌렸다.
“피해 보상?”
“네. 그동안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상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검은 낯에 번쩍 광이 돌았다. 남자는 갑자기 적극적인 태도로 돌변해 사희 앞으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그리곤 화색에 찬 목소리로 얼마를 줄 것인지를 거만하게 따져 물었다. 즉시에 바뀐 남자의 얼굴을 빤하게 바라보던 사희는 씁쓸한 듯 조금 웃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쪽에서도 사과를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 무슨 사과?”
“이강희 아시죠? 우리 언니.”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었다.
“기억 안 나요? 당신 패거리들이 지독하게 괴롭혔잖아요.”
남자는 약간 어버버, 하며 횡설수설하더니 곧 자기는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곧 사희가 꺼내놓은 여러 사람의 진술서를 보자 남자는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직접 발품을 팔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받은, 당시의 정황이 고스란히 담긴 진술서였다. 그곳엔 강희가 당했던 온갖 괴롭힘, 언니를 괴롭혔던 괴소문에 대한 것들이 소상히 적혀있었다. 남자는 또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씹어뱉었다.
“억울해서 그랬어. 네 아버지 때문에 운동도 못 하게 되고, 우리는 폐인이 되었는데. 너는 멀쩡했잖아! 존나 억울하더라고.”
“그럼 날 괴롭혔어야지! 왜 언니야?”
사희의 눈이 무겁게 커진다. 잇새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건……, 넌 이미 다른 데로 뜨고 없었고……아, 그리고…… 솔직히 이강희가 만만했으니까. 처음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이강희가 너한테 말해서 네가 좀 타격을 받으면 그쯤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걔가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러다 보니까…….”
사희는 더 듣기 괴롭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창백해지는 사희의 손을 꽉 잡아준 동하가, 그녀를 대신해 묻는다.
“갑자기 이 일을 공론화시킨 이유는 뭡니까?”
“그건…….”
“누굽니까. 당신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이.”
동하의 눈이 무섭게 남자를 쏘아본다. 검은자와 흰자의 경계가 그려놓은 것처럼 분명한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냉정하고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그건 그냥 내가 단독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몰라서 묻는 게 아니야.”
“……?”
“내가 뭘 알고 있는지 궁금한가? 잘 들어. 당신의 선수 생명이 끊길 만큼 부상을 입게 된 게, 실은 당시 관행처럼 이뤄지던 선배들의 폭행 때문이었고, 이게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당시 체벌을 일삼았던 코치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것. 우선 내가 이걸 알고 있다는 것부터 말해주지.”
동하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옥수수수염처럼 푸실 거리는 머리카락 빛깔처럼 얼굴도 낯빛이 누렇게 뜨더니 곧 풀썩 어깨를 늘어트린다. 그리곤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사는 게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이 지고 있는 빚이 얼마이며, 한 달에 얼마씩을 벌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 수 있는지, 당신도 이런 상황이라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지만, 동하는 눈꺼풀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하의 눈빛에 기가 죽은 남자는 뭐가 분한지 혼자서 씩씩거리더니,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친다.
“씨발. 몰라. 절대 말 못 해. 나 아직 돈도 다 못 받았다고!”
“그래서 단독으로 또 글을 올렸던 건가? 그렇게 하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동하가 애잔한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며 묻는다. 정곡을 찔렸는지 남자는 입을 뚝 다물고 두꺼비 같은 눈을 끔벅거린다.
“당신이 단독행동을 했으니, 돈은 절대 못 받을 거야. 어쩌면 그쪽에서 당신에게 모든 걸 덮어씌울 수도 있지. 당신 과거가 워낙 화려하니 주목 좀 받겠군. 이참에 남에 의해 숨기고 싶은 과거가 까발려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충분히 느껴보시지.”
“뭐?”
얼빠진 듯 되묻는 남자를 두고, 동하는 사희의 어깨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초조하게 머리를 쥐어뜯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남자가 찾아왔었어! 그 글만 올려주면 돈을 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올린 것뿐이야!”
***
고진영 실장은 동하를 보자 약간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오셨습니까. 이사님.”
“이경민, 안에 있나?”
“그렇긴 한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다. 약속이 되신 겁니까?”
동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즉시 부사장 집무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노크를 생략한 채, 부술 듯 문을 열었다.
“뭐야?”
퍼팅 연습을 하고 있던 경민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동하를 보자 즉시 얼굴을 구겼다. 그가 또 한 번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떼려던 그때, 전광석화처럼 그 앞으로 다가간 동하가 남자의 턱을 강하게 잡았다. 당장이라도 턱을 부숴 가루로 만들 기세였다.
“내가 말했지. 또 한 번 내 영역에 기웃거리면 그때는 네 목을 부러트려 버릴 거라고.”
무섭게 쏘아붙이는 동하의 목소리가 찍어 누를 듯 무겁다.
“이 미친…… 새끼가 돌았나.”
경민이 동하의 손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치며 으르렁거린다.
“이경민!”
짐승처럼 포효하는 목소리가 경민의 귀청을 때린다.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고함이었다. 경민을 노려보는 동하의 눈에 핏발이 선다. 분노에 찬 눈빛에 경민은 기가 눌려 씩씩, 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경민을 쏘아보는 동하의 눈에 얼핏 물기가 어린다. 경민은 동하의 눈빛에 어린, 분노보다 더 짙은 슬픔에 크게 당황했다. 동하가 이렇게 슬픈 눈빛으로 저를 보는 것은, 아주 오래전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