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동하의 눈이 삵처럼 날카롭게 가늘어진다.
“네. 처음 통화했을 때, 이사희 씨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는데, 몹시 당황하는 눈치더라고요. 어영부영 말을 돌리더니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한 뒤로는 줄곧 전화기가 꺼져있어요.”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다던 사람의 행보라고 보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또다시 올렸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군.”
“뭐가요?”
“처음 올린 글과, 지금 이 글. 문체가 완전히 달라. 정황설명부터, 맞춤법,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처음 글과는 다르게, 이건 앞뒤 문맥이 맞지 않고, 맞춤법도 엉망이야.”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거군요.”
가늘게 눈을 찌푸린 동하는 의심스럽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것도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수찬이 동하 앞으로 파일을 내민다. 그가 건넨 문서에는 여러 개의 사이트에서 캡처된 댓글이 인쇄되어 있었다. 피해자로부터 단순폭행뿐만이 아닌 성추행을 당한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유의 댓글들이었다.
교육계에서 쉬쉬하긴 했지만 사실상 그가 파면을 당한 것은 폭력보다 성추문이 컸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로 인해 사건의 분위기는 또 다른 양상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 고발자와 관련된 모든 것, 당사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모두.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주 사소한 것까지 상관없으니까 빠트리지 말고 상세히 알아봐. 분명 뭔가 있어.”
***
형부의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남편 때문에 억지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 자리가 몹시 불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해 봐.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당신이 한 말을 듣고 수아 엄마가 큰일 날 뻔했다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사과만 하면 고소는 안 한대.”
형부가 여자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사희가 고용한 변호사로부터 모욕죄에 대한 설명을 한차례 듣고 나서인지 그의 태도는 구차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수아 엄마가 먼저 인신공격을 해서 나도 받아친 것뿐이에요. 애가 듣고 있는데 그 앞에서 나를 정신병자 취급을 하니까……. 막말로 진짜 정신이 나간 게 누군데……”
사희가 커피 잔을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자 여자는 찔끔 놀라더니 입을 다문다. 사희는 커피 잔을 꽉 쥐었다가 서서히 풀어놓으며 한숨을 삼켰다.
“언니한테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면서요.”
“……그거야 뭐…….”
“무슨 이야기였어요?
“그거…… 나도 들은 소리예요. 옛날에 이강희에 대한 소문이 좀 있었거든. 나 별말 안 했어. 그냥 옛날에 너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는 거 다 알고 있다. 그 말만 했는데 자기가 혼자 자지러져서 그런 거지. 난 진짜 딱 그 말만 했어.”
“그러니까 그 말이 뭐냐고. 자꾸 사람 여러 말 하게 할 거야?”
사희가 큰 눈을 강하게 부라리자 여자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숫제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낸다.
“알아요? 당신 언니 학교 다닐 때, 왕따였던 거.”
사희의 표정이 차갑게 굳는다. 형부는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느냐는 듯, 여자의 옆구리를 세게 찌른다.
“없는 말도 아닌데 뭐. 이강희 왕따였어. 당신 아버지한테 맞아서 운동 그만둔 애들, 걔들이 복수하겠다고 이강희 괴롭혔거든. 그 애들이 워낙 불량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애들이라, 누구도 함부로 이강희 편을 들 수가 없었고.”
사희의 눈썹이 불쾌하게 일그러진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맞닥뜨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소문이 하나 돌았어요. 당신 아버지가 쫓겨난 이유가 단순 폭력이 아니라고. 실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고. 그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모두가 이강희를 피했어요. 처음엔 이강희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애들조차 모두.”
사희는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여자를 본다.
“무슨 소문이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무슨 소문이 있었는데요?”
여자는 다음 말을 꺼내는 게 조금 막막하다는 듯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컵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게……, 당신 아버지가 자기 딸을 건드렸다고.”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빨이 딱딱 마주칠 만큼 오한이 들었다. 얼마나 세게 턱을 다물었던지 어금니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그 말까지는 안 했어. 이강희가 나보고 더럽다기에, 나도 홧김에 말했던 거예요. 그냥 너한테 어떤 소문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말만…… 끼약!”
변명하는 여자의 얼굴에 아이스커피가 쏟아졌다. 여자는 얼굴을 감싸 쥐며 까마귀 같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처제, 이게 무슨 짓이야!”
형부는 여자의 얼굴을 적신 커피를 냅킨으로 훔쳐내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사희를 본다.
사희는 부서질 듯 세게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에 가서 기다려. 고소장 날아갈 거야. 함부로 입 놀린 대가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내가 똑똑히 알게 해줄게.”
***
“검찰이 혜석유통 이경민 부사장의 수면마취제 불법투약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가운데, 혜석 측은 이경민 부사장이 지병으로 병원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약물을 투약받은 적은 있으나 불법투약을 한 적은 없다, 고 혐의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이어 이번 사태를 이경민 부사장에게 일방적으로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여성의 오해와 의심을 근거로 한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고 설명하며 명예훼손 및 무고죄로의 고발을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뒤이어 병원 기록이 파기되어 없는 데다, 증언자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 수사가 난항이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TV 화면을 향해 있던 윤여화의 얼굴에 조금 안도의 기색이 돈다. 윤재화는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끄곤 윤여화를 향해 몸을 조금 돌려 앉았다.
“누님, 이제 좀 안심이 되십니까?”
“고생했다.”
윤여화는 며칠 새 바싹 마른 뺨을 꾹꾹 누르며 힘없이 대꾸했다.
“이번에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질부가 나섰지.”
윤재화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세령의 몸이 움찔했다. 눈두덩이 깊게 패도록 인상을 쓰고 있던 윤여화가 고개를 들어 세령을 힐긋 본다. 세령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칭찬 좀 해주세요. 질부가 경민이 위해서 애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롭니다. 지금 돌아가는 판, 다 우리 질부 생각이에요.”
윤재화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응접실에 우렁우렁 울렸다. 윤여화는 미심쩍다는 듯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모로 돌린다.
“그럼. 입은 은혜가 얼마인데 사람이면 그 정도는 해야지.”
서늘하게 중얼거리는 윤여화의 말이 세령의 귓가에 흘러든다. 세령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윤여화를 본다.
은혜. 그 단어만으로도 윤여화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큰 은혜를 받아 얻게 된 것이라고. 그러니 평생을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죽은 듯 납죽 엎드려 노예처럼 사는 것이 옳다고. 너는 단지 그뿐, 결코 우리의 가족이 될 수는 없다고.
픽, 식은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 조소를 느낀 것인지 윤여화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돌아본다.
“나가보겠습니다.”
세령은 고개를 숙여 묵례하고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쏘아보다가 윤여화는 다시 윤재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분위기는 좀 어때?”
“안정 찾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이에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적통 승계가 옳다고 믿고요. 게다가 동하 쪽이 워낙 시끄러워서 주주들도 그쪽으로 선뜻 맘 못 줘요. 이제 곧 경민이 무혐의로 수사 종결될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될 겁니다.”
그제야 윤여화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동생의 두툼한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재화야, 난 너만 믿는다.”
***
집으로 돌아온 사희는 굳게 닫힌 언니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언니를 일으켜 세웠다. 부스스 눈을 뜬 강희는 땀범벅이 된 사희의 얼굴을 보고 놀란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강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사희의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사희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언니!”
사희가 강희를 끌어안는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언니가 품으로 안겨들었다. 언젠가 맨몸으로 쫓겨난 사희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빈틈 없이 꼭 안아주던 언니처럼 사희는 그렇게 강희를 안았다. 언니의 미약한 심장 박동이 가슴팍에 희미하게 느껴졌다.
“왜 말 안 했어. 왜! 왜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했어. 왜…….”
울음이 섞인 사희의 목소리가 강희의 귓전에 부딪힌다. 잠시 멈칫하던 강희는 이내 무슨 일인지 짐작한다는 듯, 곧추세웠던 허리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언니의 대답이 없어도 사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모두 저를 위해서였다. 도망쳐버린 사희의 날개가 꺾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떠난 동생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서, 언니는 제 몫으로 남겨진 고통을 홀로 감수했던 것이다.
“상관없었어. 네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었으니까.”
“그럼 언니는? 언니 인생은! 언니가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행복해.”
사희는 강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오열했다.
“미안해, 언니.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언니.”
강희는 늘어트렸던 팔을 들어 바들바들 떨리는 사희의 등을 안았다. 그리고 아이를 보듬듯 다정하게 쓸어내린다.
“울지 마, 사희야. 나는 괜찮아.”
“언니, 나 봐. 내 눈 똑바로 봐.”
사희는 강희의 뺨을 감싸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송아지처럼 순한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있다.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누굴 위해서 언니 인생을 양보하지 마. 그게 나여도. 내가 정말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이제 날 위해서 아무것도 희생하지 마.”
“…….”
“약속해. 이제는 나랑 함께 행복하겠다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강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아이처럼 안겨드는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내 언니, 이강희. 물의 아이. 나는 울고 싶을 때면 그 물에 뛰어들었지. 언니는 내 눈물이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나를 가슴에 품고, 이 거친 세상을 묵묵히 흘러가는 강물 같았지. 울퉁불퉁한 돌멩이 같은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 끝내는 부드러운 모래로 만들어준 언니. 귀하고 귀한 내 사람.
행복하자, 언니. 우리 함께. 아프지도 말고, 슬프지도 말고. 아무것도 포기하지 말고. 오래도록 함께 흘러가자. 그래서 우리 언젠가 바다에 닿으면, 그때는 말하자.
살아서 좋았다고. 죽지 않고 살아서 참 다행인 삶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