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91화 (92/109)

#91

촬영장소는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사희는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끈질긴지를 생각해본다.

삶에 대한 치열한 욕구. 생물의 본능적인 욕망.

그렇다면 그 근원적인 욕망을 버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한 사람의 가슴 속에는 이 끈질긴 생존 욕구보다 더 강렬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언니는 죽고 싶어 했다. 그것도 몇 차례나.

“이강희 씨의 내면에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해치는 기억이 존재하고 있어요. 그 기억과 마주하고 과거의 자신과 화해했을 때, 비로소 그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이강희 씨는 그 기억과 마주 서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어요. 그 기억을 상기시킬만한 어떤 양상이 나타났을 때, 몹시 큰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죠.”

언니의 담당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희는 그것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심각하게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언니가 타고나기를 워낙 무르고 착한 사람이기에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약한 사람이라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고, 그래서 끝내는 처지를 바꾸지 못한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면.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불우한 가정환경이라면 자신도 함께 겪었다. 그러나 자신은 언니와 다르게 맹렬하게 삶을 일궜다. 어영부영 살지도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언니처럼 사람을 함부로 믿어,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는 짓도 않았고 그렇게 믿었던 사람에게서 내팽개쳐지지도 않았다.

나는 매 순간 악착같이 매달렸고, 의심했고, 날을 세웠고, 이성적이었고, 냉정했다. 그러나 언니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므로 언니와 나는 다르다. 언니는 어리석고, 나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 한편에는 늘 그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한 번도 언니를 괴롭게 하는 근원에 대해 눈을 돌려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어수선하던 촬영장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희는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조금 멈칫했다.

촬영장의 사람들이 모두 저를 보고 있었다.

***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이자 방송인 이사희의 아버지를 고발합니다.’

어린 선수들에게 무참한 폭력을 가했던 수영코치 이영섭을 고발합니다. 그는 기록이 모자라거나, 몇 분 지각을 하거나, 심지어는 몸이 아파 훈련을 빠졌을 때조차도 심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본인 역시 이 코치에게 폭행을 당해 허리를 다치면서 선수 생명이 끊겼습니다.

그에게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은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의 딸인 이사희는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억울하고 참담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를 응원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방송인이 되었고, 사회 약자를 돕는다는 포지션을 잡고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재벌 3세와의 열애를 인정하기까지 했더군요.

부상으로 일생의 꿈이었던 수영선수가 되는 길을 포기한 저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빠듯한 형편으로 살아가는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가해자의 자식은 승승장구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게 너무나 억울합니다.

이런 마음을 먹는 제가 나쁜 사람일까요? 저는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고통을 받는 걸까요? 너무 혼란스러워 최근 들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진정한 사과 하나뿐입니다. 사과를 받고 싶어 이사희 측에 몇 차례나 연락을 시도했으나, 이 코치가 사망을 한 지금은 본인은 책임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참담한 마음을 참지 못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

촬영은 즉시 중지되었다. 긴급회의에 돌입한 PD들을 기다리는 사이 스태프들은 오종종 모여앉아 기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 마리를 자르면 두 마리가 되고, 세 마리가 되는 플라나리아처럼 기사는 끊임없이 증식되었다. 또 다른 피해자, 목격자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하나둘씩 증언이 이어지니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자신은 어떤 연락도 받은 것이 없다고, 사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런 거짓말로 상황을 더 나쁘게 몰아가는지 모르겠다고, 억울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빠가 한 일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 그의 폭력성이 얼마나 악마 같았는지도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어김없이 자행되던 일이었으니까.

다 알고 있었지만 다 잊고 살았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아빠는 죽었으니까.

폭력 사건이 물의를 빚어 파면된 후, 그는 어느 새벽 술 취해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때 사희는 생각했다. 그 사람의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갈려 죽었으니 그것으로 그는 죗값을 치른 거라고. 그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제 자신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러니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거라고.

그러나 내가 잊고 산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이 일이 터지지 않았으면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버렸겠지. 어쩌면 그쪽에서 연락을 해왔는데, 정말 자신이 피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온다.

“이사희 씨.”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는 그녀 앞으로 메인 PD가 섰다. 늘 상냥했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사희는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오늘 촬영은 취소됐습니다.”

“취소요?”

“내부 회의를 거쳐, 자세한 결과는 전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별다른 설명 없이 짧은 말을 마치곤 도망치듯 돌아섰다.

멍하니 앉아 있던 사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그쪽에서 연락을 받은 게 없어요! 정말이에요.”

와락, 외치는 사희의 목소리에 촬영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집중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은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PD는 재빨리 대답하곤 다시 몸을 돌렸다.

“나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사희가 다시 소리쳤다.

“나도 행복하지 않았다고요. 정말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행복하게 산 적 없었다고요.”

촬영장에 고요한 적요가 흐른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숙덕거리는 사람들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너무 작은 소리여서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는데, 사희는 왠지 그것이 자신을 향한 비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했다. 비통하고, 참담하고 무엇보다 무서웠다. 너무 두려워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었다.

언니도, 언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처음에는 다리가 떨리더니, 곧 손이, 그러다 나중엔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진다. 차오른 눈물에 번져 사람들이 기이한 형태로 흩어진다.

그때, 누군가 주위를 둥글게 에워싼 사람을 헤치고 그녀를 향해 뛰어왔다. 그리곤 속이 빈 허수아비처럼 선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안겨든 품에서 은은한 나무향기가 난다. 익숙한 체취. 동하의 향기였다.

***

호수가 보이는 별장. 피어오른 물안개가 집을 감싸,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그곳은 조금 전까지의 소란은 꿈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사희는 침대에 모로 누워 다른 차원의 세계 같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먼발치를 응시하고 있던 사희가 눈을 깜빡이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베갯잇을 적신다. 베개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동하는 새 베개로 사희의 머리를 고쳐 뉘인 뒤, 그녀의 어깨에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좀 쉬어.”

“동하 씨,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요.”

사희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동하는 재킷을 벗고 사희의 곁에 몸을 기울여 누웠다. 그리곤 옹크리고 누운 여자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사희는 동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깊은숨을 쉬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속으로 삼키고 있었는지 숨결이 불처럼 뜨거웠다.

사희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사희의 눈두덩은 붉게 부풀어있었다. 우연인지, 이곳에 처음 왔던 날에도 그녀는 이렇게 팬케이크처럼 부풀어 오른 눈두덩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도 지금도 결국 그녀를 울게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자신의 위험한 세계로 그녀를 이끌지 않았더라면, 사희가 울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내가 당신을 힘들게 했어.”

동하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금니를 꽉 물어 참고 있었지만 남자의 눈에는 어느새 붉은 핏발이 섰다. 촉촉하게 젖어 드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보던 사희는 이내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당신 때문이 아니야.”

“사희야.”

“동하 씨. 잘 들어요. 이건 내 문제예요. 당신을 만나면서 불거졌을지는 몰라도, 당신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마. 그래야 나도 약해지지 않아.”

사희는 떨리는 손으로 동하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입술을 강하게 짓씹으며 동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반드시 그러겠다는 듯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사희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가야겠어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언니가 혼자 있어. 혼자 두면 안 돼요.”

사희는 숨이 찬 사람처럼 한숨을 뱉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언니가 나약하다고 생각했어요. 똑같은 상황인데도 나는 견뎌내는걸, 언니는 견뎌내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한 번도 언니의 상처를 깊게 헤아려보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틀렸어. 나는 사실 견뎌내지 못했어. 난 도망쳤거든. 모든 걸 다 언니에게 미뤄두고.”

사희는 동하의 손을 꽉 움켜쥔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가락 마디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되었을 정도였다.

“언니는 나한테 한 번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도 묻지 않았어. 알게 될까 봐 겁났어. 외면했어.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몰라. 내가 도망친 사이 언니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아마 지금 내가 겪은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큰 상처였겠지. 그게 언니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거야. 이제라도 알아야겠어. 내가 외면했던 게 뭔지.”

사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다부진 눈빛으로 동하를 돌아본다.

“동하 씨가 나 좀 도와줘요. 나, 그 사람을 만날래요. 사과를 바란다면 사과를 하고, 무릎을 꿇으라면 무릎도 꿇을 거야. 그렇게 해서라도 과거의 굴레를 끊어낼 수 있다면, 난 할 거예요.”

사희의 눈이 빛난다. 지금껏 불안정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복수로,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기를 선택했다는 듯 뜨겁고,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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