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언니는 잠이 들었다. 잠든 강희 곁에 우두커니 앉아 사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언니가 한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무엇이 그렇게 강희가 이성을 잃고 분노하게 했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다만 언니의 마음 안에 무언가 꺼내지 못할 아픔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덤불처럼 엉겨 붙은 언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강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형부였다. 거는 전화도 피하기 일쑤인 사람이 웬일일까. 사희는 강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 처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사희라는 사실에 놀랐는지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한다. 언니가 아프게 된 데에는 그의 탓도 다분한 터, 사희는 통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할 말 없으면 끊어요. 그리고 앞으로 쓸데없이 언니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저기……, 강희는 괜찮아?”
“무슨 소리예요? 언니가 왜.”
형부에게서 나온 언니의 이름에 사희는 본능적으로 가시를 세웠다.
“그게……. 좀 걱정이 돼서…… 처제, 내가 강희를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외도를 하고 떠난 남편이 갑자기 전부인의 안부를 물으려고 전화를 걸었다는 건 이상한 일,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바짝 마른 잎사귀가 바람에 떨리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늦은 시간 아파트 단지는 조용했다. 중앙현관 밖으로 나가니, 형부가 서 있었다. 남자는 사희를 발견하자 얼른 담배를 비벼 끄고 사희 앞으로 다가섰다.
“강희는?”
“언니 자요.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 말해요.”
“그게……. 그러니까…….”
“우물쭈물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 당신이랑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희가 참지 못하고 바락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는 담배 냄새가 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강희가 집에 다녀갔어. 수아 만나겠다고. 그런데 그날 강희랑 집사람이 말다툼을 좀 했대.”
사희의 눈시울이 가늘게 좁아진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희한테 말실수를 좀 한 모양이야. 나도 오늘에서야 알았어. 출장에서 오늘 돌아왔거든. 수아가, 그날 엄마가 울면서 갔다고 이야기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달에 한번 수아를 만나는 날이라고 언니가 좋아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갔던 것도. 그날 무언가 언니를 극단으로 몰아갔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희는 쭈뼛거리고 선 남자의 멱살을 잡아챘다.
“니들 우리 언니한테 무슨 짓 했어!”
“그게……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강희한테…….”
남자는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털더니 마른침을 꾹 삼켰다.
“아버지 이야기를 했대.”
멱살을 잡은 사희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무력해지는 존재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쿵쾅쿵쾅,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
그날은 강희가 한 달에 한 번 있는, 수아를 만나는 날이었다. 보통은 전남편이 약속장소에 수아를 데리고 나오거나, 사희가 데려오는데 오늘은 두 사람 모두가 시간이 맞지 않아 직접 나섰다. 전남편의 여자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껄끄러움이 있긴 했지만, 수아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견디기로 했다. 그리고 한 번쯤은 그 여자에게 자신이 잘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다.
강희는 거울 앞에서 모습을 한 번 더 단장했다.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사희가 사 준 새 옷도 입었다. 좀 야위긴 했지만 근래 거울 속에서 마주친 자신의 모습 중 오늘의 상태가 제일 좋았다.
집 근처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는데, 여자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연결이 되지 않아 결국 직접 집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함께 있는 수아를 보았다. 그런데 그 남자아이가 다짜고짜 수아의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닌가. 수아는 거부하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당하고 서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니?”
단숨에 달려간 강희는 아이에게서 수아를 떼어놓으며 바락 소리쳤다.
“우리 엄마가 문수아가 나한테 까불면 혼내줘도 된다고 했거든요?”
꼬마는 되레 당돌하게 말대꾸를 했다.
그때 안에서 여자가 나왔다. 전남편의 여자였다. 사내아이가 쪼르르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허벅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겁먹은 시늉을 한다. 그러자 여자가 뱁새눈을 뜨고 달려들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얽힌 껄끄러운 관계, 그 사이에 쌓여있는 각자의 증오와 분노가 한꺼번에 터졌다.
“애 핑계 대면서 전 남편한테 구질구질하게 연락하는 거 구차하지도 않아? 왜 남의 남편한테 자꾸 연락하는 건데?”
하나 이번만큼은 강희도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았다.
“적반하장이시네. 당신은 아들한테 힘없는 여자아이를 혼내주라고 가르칠 게 아니라, 아내와 자식이 있는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면 안 된다는 것부터 가르쳐.”
“너는 뭐 네 딸한테 얼마나 대단한 걸 알려주겠다고? 정신병자 주제에.”
“멀쩡한 가정을 깨놓는 것도 정신병의 일종이야. 적어도 난 그런 더러운 짓은 안 해.”
강희로부터 치부를 찔린 여자는 이성을 잃었다.
“네가 더러운 짓을 안 한다고? 네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들은 게 있는데?”
“……?”
“너, 소문 자자했더라? 네 아버지가 그렇게 쓰레기였다며?”
여자가 얇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이죽거린다.
강희의 얼굴이 하얗게 식는다. 마른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더니, 곧 눈에서 차갑게 식은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뚝 떨어졌다.
“아니야!”
“네 동생 요새 아주 유명하던데. 그 일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아니라고! 아니야!”
“너 때문에 네 동생 인생도 망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죽은 듯이 살아. 알았어?”
사납게 쏘아붙인 여자는 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면전에 문을 닫는 소리가 쾅, 하고 들려온다.
“엄마.”
수아가 핏기를 잃은 엄마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듯 올려다본다. 강희는 물에 젖은 종이인형처럼 주저앉았다. 수아는 말없이 눈물만 떨어트리는 엄마의 목을 끌어안는다.
“엄마, 또 아파? 아프지 마, 엄마. 아프지 마.”
두려움에 젖은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강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
늦은 밤 시작된 비가 그칠 줄을 모르고 내리고 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별채에는 스산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찻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윤재화와 차세령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차는 이미 식었고, 사위는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유감이야. 내가 질부를 볼 면목이 없어.”
“재민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증거 불충분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야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뒤 조용히 내사 종결 될 거야.”
“그렇군요.”
“문제는 회장님이 오늘내일하시는 지금, 경민이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거지.”
세령은 줄곧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윤재화를 보았다.
“만약 회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동하 쪽으로 힘을 실어줄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게 돼. 이미 그쪽으로 마음이 흔들린 주주들도 있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동하를 흔들어야지.”
세령은 맞잡고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깍지 끼웠다. 내내 무표정했던 얼굴에 잠깐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이동하를 흔들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것도 사실이지.”
“결국, 이길 수 없는 게임이겠군요.”
“벌써부터 포기하면 안 되지.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이번 위기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동하를 흔들어야 해.”
윤재화는 마치 게임에 배팅하는 사람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경민이에게 카드를 하나 쥐어주었는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어떤…….”
“이사희.”
세령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긴다. 그저 이사희의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쳤다. 시기, 혹은 박탈감.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는데,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것들을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 세령의 이성을 뒤흔들었다.
“자네, 경민이가 그 여자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거 알고 있나? 그 감정의 진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몹시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자기 코가 석 자인 지금에 와서도 그 여자는 지키려는 걸 보면.”
세령은 아래턱이 도드라지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굳어가는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윤재화는 마치 옛이야기를 하듯 개탄했다.
“형제의 운명이 참 얄궂지? 두 아이가 한때는 자네를 두고 갈리더니, 이제는 또 다른…….”
“재민 아빠가 뭘 망설이고 있나요?”
세령이 윤재화의 말허리를 차갑게 잘라냈다. 윤재화는 손목을 돌려 식어버린 녹차를 굴리다니 이윽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경민이가 저 모양이니 자네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지. 자네가 이 집 사람이라 참 다행이네.”
어르는 말투가 금단의 열매처럼 달콤했다.
그 열매에 손을 뻗었다. 그 열매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게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팅할 때, 갖게 되는 어리석은 믿음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드는 법. 오로지 얻는 것을 믿을 뿐, 잃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