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소문은 허공에서 타는 불과도 같아서, 내버려 두면 일부러 끄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된다. 그 진리를 믿었기에 동하는 가십에 맞대응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불을 부지깽이로 휘저었다. 그러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사희에 대한 불쾌한 의혹들이 불거진 것이다. 채용비리, 특혜취업, 스폰서 등등. 입에 담기도 더러운 의혹들이 하나둘 기사화 되자, 열애설에 환호하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희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이사희 강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수찬에게 상황을 보고 받은 동하의 얼굴이 차갑게 식는다. 질끈 입술을 깨문 동하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들 모아.”
동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마치 지옥 불에라도 뛰어들 수 있을 것처럼,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총처럼 카메라를 들이민 기자들을 상대로, 동하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여유로운 시선으로 좌중을 훑으며 기자들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사희 씨와의 열애를 인정하십니까?”
“제가 그 사람에게 절절히 구애하는 사진이 분명하게 찍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부인하겠습니까?”
동하의 농담에 여기저기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굳어있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항간에 의혹을 사고 있는 취업 특혜에 관해서 해명해주시죠?”
“이사희 씨는 아시다시피 국가대표 출신 수영선수에, 특수교육 석사과정을 거친 재원입니다. 현직 강사로부터 그녀가 노바의 새 프로젝트에 적임자라는 추천을 받았습니다. 노멀한 과정이었고, 능력에 마땅한 대우를 받아 입사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현재 이사희 씨는 계약직으로, 되레 특혜와는 거리가 멀죠.”
동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사희 씨의 TV 프로그램 출연에 입김이 있었다는 의혹은요?”
“해당 프로그램과 노바의 프로젝트 성격이 들어맞는다고 판단해서 장소 협찬을 승인했고, 미팅 중 노바 프로젝트의 취지에 대해 말씀드리니 연출자분께서 먼저 이사희 씨의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분명하고 명쾌한 해명이었다. 동하는 쐐기를 박듯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성인 남녀의 열애를 호들갑스럽게 떠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응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침묵이 내 연인에 대한 더러운 추측과 폄하를 불러일으킨다면 더는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겁니다.”
단호한 목소리에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확고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
이동하의 기자회견은 파격적이었다. 당사자가 전면에 나서 열애를 인정함과 동시에 불거졌던 어두운 의혹을 한꺼번에 정리하자 나쁘게 흘러가던 여론도 한순간 뒤집혔다.
또한 한쪽의 분위기 반전은, 다른 한쪽의 어두운 면모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냈다. 이종학 회장의 건강이 회복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는 일각의 설과 함께 후계 구도가 주목되는 지금, 혜석그룹 형제간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극적인 뉴스가 끊임없이 이어진 것이다.
-한편, 오늘 오전 혜석그룹의 이경민 부사장은 프로포폴 불법 투약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성실하게 협조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혐의는 부인하고 있어 수사는 난항으로 이어질 전망입니다.
화면을 주시하고 있던 이경민의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잠시 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TV화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TV에 날아와 부딪혔던 리모컨은 박살이 난 채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외숙께서 말한 수습입니까? 똑바로 보세요. 당신이 지른 불이 누굴 태우고 있는지!”
이리처럼 으르렁거리는 경민을 보며 윤재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작입니다.”
“……?”
경민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진다.
“지금까지는 이동하를 끌어들이기 위한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이동하가 반응했으니, 진짜를 터트려야죠.”
윤재화가 손짓하자 먼발치에 서 있던 고 실장이 서류가 담긴 파일을 가져와 경민 앞에 내려놓았다. 서류를 열어 다급히 내용을 읽어보던 경민의 눈이 등잔불처럼 커진다. 무언가 그의 마음에 제동을 건 듯했다.
“……이, 이사희는 아무 관련 없잖아. 왜…….”
경민의 목소리가 조금 주춤했다.
“너부터 살아야지. 이대로 이동하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참이야?”
머뭇대는 경민의 얼굴을 보면서 윤재화는 차분하게 재킷 자락을 정리하곤 느리게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는 즐거운 일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마음이 정해지면 말씀해주십시오. 너무 늦지는 않으셔야 할 겁니다.”
***
집으로 가는 길에 사희는 장을 보았다. 일부러 등급 좋은 소고기를 샀고, 유기농 채소들과 과일을 사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동하의 기자회견으로 어지러웠던 추측들은 모두 일단락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뿐한 마음만은 아니었다.
요 며칠 이리저리 시달린 자신을 위해 보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을 맞닥뜨려야 할지 모르는데, 그러자면 에너지를 충분히 쌓아둘 필요가 있었다.
집으로 들어온 사희는 제일 먼저 언니의 방문부터 열었다. 강희는 잠들어 있었다. 방 안은 컴컴하고 눅눅했다. 답답하게 쳐진 커튼을 걷어내자 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침침했던 방이 조금 밝아졌다.
“언니 자?”
조금 기다려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그대로 돌아나가려다, 사희는 강희의 등 뒤에 몸을 붙여 누웠다. 강희는 몸은 세게 쥐면 부서질 것처럼 말라 있었다.
“밥은 먹었어?”
“…….”
“밥도 안 먹고 이렇게 계속 누워만 있으면 어떡해.”
사희는 강희의 등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홀로 묻고 홀로 대답했다.
“언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잘 지내겠다고 약속했잖아.”
사희는 울음이 차오르는 숨을 가까스로 달래며 강희를 안았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언니.”
“…….”
“여기서 적응하는 게 너무 힘들면……, 다시 병원에 갈래?”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강희가 사희의 팔을 잡았다.
“……사희야.”
“응.”
“미안해.”
갈대를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스산한 목소리였다.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미안하면 이러지 말아야지.”
사희는 강희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울먹였다. 그러나 강희는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목소리로 다시 사희를 불렀다.
“사희야.”
“응.”
“너……, 그 사람이랑 헤어지면 안 돼?”
강희가 뱉은 뜻밖의 말에 사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누구? 동하 씨 말하는 거야?”
“그래. 나는 네가 그 사람 안 만났으면 좋겠어.”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이던 사희가 몸을 조금 일으켜 강희를 내려다본다.
“언니 혹시 뉴스 봤어? 그래서 그래?”
강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다가 강희의 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언니, 나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사희야. 나는 네가 그 사람이랑 헤어졌으면 좋겠어.”
강희는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더니 몸을 잔뜩 웅크렸다. 언니가 실없이 이런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사희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고치처럼 누워있는 언니를 내려다보았다.
“왜?”
“…….”
“말을 해. 왜 내가 그 사람이랑 헤어져야 하는데?”
사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야속한 마음 때문이었다. 요 며칠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시달렸는지를 안다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이런 때 응원은 해주지 못할망정 동하와 헤어지라는 말이나 하는 언니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희는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언니의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말을 해 봐. 왜!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너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강희는 먼발치를 멍하니 바라본 채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사희는 뒷머리에 무언가 뚝 끊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그 사람이랑 계속 만나면 너 다쳐. 사희야, 언니 말 들어. 더 다치기 전에 그 사람이랑 헤어져!”
갑자기 눈빛이 바뀐 강희가 사희의 팔을 붙들며 애원했다. 잠깐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번득이는 눈빛에 질려 사희는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언니…….”
“대답해, 어서!”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강희가 사희의 팔을 갈퀴처럼 움켜잡는다. 그 완력에 눌려 사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한참 몸싸움을 한 끝에야 사희는 겨우 강희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사희는 강희를 피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미쳤어? 대체 왜 이래!”
“사희야!”
눈알이 쏟아질 것처럼 때꾼해진 강희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인다.
“나 그 사람이랑 절대로 안 헤어져. 나 동하 씨 사랑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람 절대로 안 버려.”
그때였다. 강희의 눈에 불같은 원망이 치솟더니, 곧 무서운 눈으로 사희를 쏘아본다.
“나는 버려놓고 그 새끼는 왜 못 버려!”
쇳소리가 나는 강희의 목소리에 놀란 사희의 몸이 굳는다. 언니가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것도, 그렇게 독하게 욕설을 뱉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언니…….”
“내가 전화했었지. 나랑 같이 살자고. 내가 그날 밤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만 혼자 남겨지고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런데 너 그때 나한테 뭐랬어? 싫다고. 지긋지긋하다고. 제발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너, 나한테 무섭게 소리쳤지!”
악을 지르는 강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너만 행복하면 됐는데……. 널 위해서 다 견뎌냈는데. 힘들어도 꾹꾹 참았는데. 너는…… 너는 나를 버렸잖아. 너도 나를 버렸잖아!”
단장을 끊는 듯, 처절한 절규를 뱉어낸 강희는 그대로 방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바닥을 긁는 손짓이 마치 자신의 손을 놓고 떠난 이들을 부르는 처절한 손짓 같다.
사희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까지는 막지 못했다.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짙은 물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