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88화 (89/109)

#88

[전화로 이야기하면 넌 계속 괜찮다는 대답만 할 것 같아 메시지로 보내. 괜찮지 않을 거 알아. 놀랐을 테고. 끓어오른 주변의 반응들이 당혹스러울 거야. 아마 한동안은 시달릴 테지.

미안해. 내가 덜어줄 수 없는 부담이라 미안하고, 어쩌면 당신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겪어야 할 잡음의 예고 같아서 미안하고, 이런 때, 당장 네게 달려가 함께 할 수 없는 나여서 미안해.

그래도 사희야. 굴하지 않고 나와 함께 걷겠다고 말해줘. 네가 있어야 나는 이 어지러운 장난들에 속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어.]

메시지를 읽어가던 사희의 눈에 반짝 물기가 어렸다가 유성처럼 빠르게 사라진다.

마치 가슴 속에 커다란 스펀지 하나가 생긴 것 같다. 그녀를 괴롭혔던 어지러운 감정들이 그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니 언제 우중충했나 싶게, 마음이 보송보송해졌다.

사희는 마치 그의 얼굴을 대하듯, 소중하게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말도, 미사여구도 필요 없었다. 그저 지금 그녀 맘속에 피어오른 진심 하나면 충분했다.

사희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동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하늘 언저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햇살이 따갑던 날의 노을은 유독 더 붉다.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동하의 얼굴에도 붉은빛이 드리웠다.

오래도록 홍염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재킷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사희의 답장이 도착해있었다.

[오늘은 설탕이 많이 필요해. 미안하면 함께 디저트를 먹어줘요. 벌이예요.]

메시지를 읽는 동하의 눈가에 부드러운 웃음 주름이 번진다. 글자에서 사희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동하는 그 글자 위에 가만히 입을 맞춘다. 이렇게 달콤한 형벌이라면 영원히 받아도 좋을 것이다.

***

뚱뚱한 마카롱을 한입 가득 베어 문 사희는 흐음,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작정한 듯 골라온 디저트가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동하는 보기만 해도 인슐린이 치솟는 것 같은 과자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먹어 봐요.”

사희가 마카롱 하나를 들어 동하 앞으로 내민다.

“설마 이걸 다 먹어야 하는 건 아니지?”

“뭐 이 정도 가지고.”

“나랑 열애설이 난 게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받을 일인가? 서운한데.”

동하는 마카롱 끝을 조금 베어 먹으며 물었다.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요. 하루 종일 내가 얼마나 사람들 눈길에 시달렸는데.”

“누가 당신 괴롭혀?”

동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은 내색을 한다.

“안 괴롭혀요. 그냥 좀 불편하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앉아서 순순히 괴롭힘당하고 있을 사람인가?”

“확실히 그런 타입은 아니지. 내가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잖아.”

동하는 팔짱을 낀 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사희 앞으로 조금 더 다가앉았다.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사희는 제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빙긋빙긋, 웃음을 터트리는 동하를 보며 무안한 듯 입술을 쑥 내민다.

“왜 자꾸 웃어요?”

“즐거운 생각 중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데?”

“오늘 밤에 이사희 잡아먹으면 되게 달겠다는 생각.”

사희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든다. 홍안이 되어 제 가슴팍을 때리는 사희를 귀엽다는 듯 보며 동하는 그녀의 손을 깨무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이 실없는 장난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근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촬영하고 있다가 황급히 휴대전화를 감추는 것이 보였다.

불쾌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동하가 사진을 찍은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제가 이사희 씨 팬이라서요.”

어정쩡한 변명을 뱉은 사람이 우물쭈물 말을 흐리며 동하의 눈을 피한다.

“지우세요.”

“몇 장 안 찍었어요.”

“뭘 잘못하셨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확실하게 알려드려야겠군요.”

동하가 휴대전화를 꺼내 신고 전화 번호를 누르는 것을 보자 그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찍은 사진을 지우더니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웠어요. 지웠어. 아, 거 되게 빡빡하게 구네.”

그리곤 행여 잡힐세라 꽁지 빠진 새처럼 도망쳤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동하의 곁으로 사희가 다가왔다.

“가요.”

그의 팔을 잡은 사희가 빠르게 속삭인다.

“아직 다 안 먹었잖아.”

“괜찮아, 집에 가서 먹으면 돼. 얼른 가요.”

사희는 주변의 시선을 빠르게 살피며 동하를 재촉했다. 불편해진 안색을 보니 더는 고집을 피우면 안 될 것 같아 동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가을밤 풍경에 취한 것인지, 사희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이윽고 사희의 집에 다다랐다.

“오늘 같이 있을까?”

그대로 집에 들여보내는 것이 아쉬워서 동하는 사희의 손을 그러쥐며 다정하게 물었다.

사희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가 혼자 있어서…….”

동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사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심란한데 내가 당신을 더 힘들게 만들었네.”

동하의 말에 사희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본다. 그의 얼굴이 착잡해 보였다.

“왜 그런 말을 해. 당신은 나 힘들게 한 적 없어.”

사희는 몸을 기울여 동하의 품에 기댔다. 남자의 단단한 허리를 두 팔로 꽉 안은 사희는 애교 가득한 얼굴로 동하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리곤 도톰한 입술을 모아 새 부리처럼 뾰족하게 만들었다.

“나 얼마나 달콤한지 지금 확인해볼래요?”

굳어 있던 동하의 입술에 웃음이 번진다. 사희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여 느리게 문지르던 동하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삼킨다. 초콜릿보다 달콤하고, 홍차보다 향기로운 혀를 느리고 매끄럽게 더듬자, 사희의 입술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동하의 입술이 사희의 쇄골을 핥고 가슴 언저리를 아프지 않게 깨문다.

“달아.”

동하의 입에서 한숨 같은 감탄사가 흘렀다. 사희는 뜨거워진 몸을 조금 비틀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요염하게 젖은 눈빛으로 동하를 보던 사희가 이윽고 남자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였다.

“한 시간만 같이 있을까.”

귓가에 번지는 달콤한 음성에 동하의 몸은 금시에 달아오른다. 사희의 날씬한 허리를 문지르며 동하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시간은 너무 짧아.”

둘은 나쁜 장난을 하는 아이들처럼 키득거리며 서로의 입술을 더듬고, 보드라운 살갗을 희롱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스트레스도 씻은 듯 사라졌다. 이렇게 서로의 체온과 숨을 나누어 가질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가벼운 농담처럼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

출근하는 사희의 등 뒤에서 누군가 와락, 어깨를 잡는다. 정아였다.

“잘 잤어? 힘들어 할까 봐 걱정했는데. 별로 그런 내색은 없어 보이네?”

정아는 사희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빙그레 웃는다. 사희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어제 만 칼로리 섭취했거든요.”

“현명하네.”

정아와 사희는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직원들은 오종종 모여앉아 떠드느라 그녀들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해고당했던 수영강사가 프로젝트 담당자로 재입사라니, 웃기잖아. 그게 빽 없이 가능한 일이냐고.”

“그래, 걔 그렇게 건방진 것도, 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혹시 본부장이 걔 그 자리에 앉히려고 이 프로젝트도 추진했던 거 아니에요? 다들 반대했는데 본부장이 억지로 밀어붙인 거라면서요.”

“그뿐만 아니야. 걔 방송 출연하는 것도 본부장 입김이었다던데?”

너도나도 입을 모아 떠드는 소리가 사무실 안에 왁자지껄하게 퍼졌다.

사희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는다. 그녀의 안색이 식는 것을 본 정아가 재빨리 직원들 곁으로 달려갔다.

“본부장님께 이사희 강사를 추천한 건 나예요. 없는 말 지어내지 말아요.”

소리를 빽 지르는 정아의 서슬에 놀란 직원들이 우물쭈물 할 말을 잃었다가, 발치에 서 있는 사희를 보자 다시 뱁새눈을 뜬다. 사희는 노골적으로 저를 힐끔거리는 직원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지금 그 말들, 책임질 수 있어요?”

주눅이 들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되레 강한 시선으로 쏘아보니, 시비를 건 직원들이 되레 더 당황했다.

“……왜 나한테 그래요? 기, 기사에서 그러던데 뭐…….”

“책임질 수 있냐고 물었어요.”

사희가 쐐기를 박듯 되묻자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날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그건 당신들 자유겠지만, 당신들이 하는 부정확한 상상들이 내 귀에까지 들리게는 하지 마세요. 부탁 아니고, 경고예요.”

차갑게 쏘아붙인 사희는 사람들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서 작게 숙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속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태연한 표정으로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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