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좀 어떠신가?”
경민을 만나기에 앞서, 윤재화는 고진영 실장과 독대했다. 고 실장은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매우 나쁘다는 뜻이었다.
“뒤처리는 잘했겠지?”
윤재화는 종전보다 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물었다. 덩달아 고 실장도 바짝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해외로 나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잘 관리 해둬.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윤재화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부사장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일련의 상황을 보고 받은 경민은 몹시 언짢은 채였다. 그렇지 않아도 신변에 온통 머리 아픈 일투성이인 지금, 도미노처럼 자꾸 일이 터지니 경민의 인내는 한계에 달한 듯했다.
윤재화를 보자마자 경민은 득달같이 이를 드러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대체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해?”
그의 말투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마치 주변 사람들의 직무유기라는 듯 들렸다. 윤재화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경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관계에서 권리는 늘 이경민에게 있었고, 책임은 자신에 있었다. 이경민은 그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윤재화는 최선을 다해 분을 눌렀다.
“워낙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이라 대처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떡할 겁니까, 이제?”
“곧 검찰이 질의서를 송부할 겁니다. 법무팀이 준비한 답변으로 성실히 협조하세요.”
“지금 나보고 검찰 수사를 받으라고?”
경민이 도끼눈을 하고 윤재화를 노려보았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당장 없었던 일처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을 끌어 서서히 잊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불 끄는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저 불구경에만 눈이 벌겋지.”
경민은 윤재화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고 시간을 벌지요.”
윤재화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 놓으며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윤재화는 자신이 건넨 서류철을 펼쳐본 경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빠르게 분노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옆 산에 불을 놓겠습니다. 그럼 사람들도 이쪽보다 그쪽에 더 눈길을 보낼 겁니다.”
서류철을 잡은 경민의 손이 떨린다. 경민의 벌게진 눈이 시기와 미움으로 번들거리는 것을 똑똑히 바라보며 윤재화는 미세하게 웃었다.
***
쇼핑몰 입구에 들어선 순간, 사희는 일제히 저에게로 모이는 시선을 느꼈다. 그녀의 시야에 걸린 모든 사람이 저를 보고 있었다. 근래 그녀가 사람들에게 눈길을 받는 횟수가 늘기는 했지만, 오늘의 것은 어제와는 온도부터 달랐다.
사무실 안의 공기도 마찬가지였다. 사희는 짐짓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려 평소보다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사희의 인사를 받은 직원들의 표정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어색했다. 사희는 외계인이 된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며 쭈뼛쭈뼛 자리로 가 앉았다.
“사희 쌤. 잠깐만.”
책꽂이 틈으로 고개를 살짝 내민 정아가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사희와 사무실 직원들의 눈이 다시 마주친다. 힐끔힐끔 그녀를 돌아보던 사람들은, 사희와 시선이 맞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왜 저러는 거야, 진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오는데, 정아가 불쑥 사희의 손을 잡더니 그녀를 비상구 계단까지 끌고 나왔다. 그리곤 숨도 돌리지 않고 다짜고짜 질문 폭탄을 터트렸다.
“사희 쌤, 그게 사실이야? 정말로 그런 거야?”
“뭐가요?”
“이거 못 봤어?”
정아가 사희 앞으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스마트 폰의 액정화면을 심드렁하니 보던 사희의 눈이 번쩍 커진다.
액정화면에는 사희의 사진이 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당황하게 한 것은 그녀와 함께 또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다는 것이다. 한 남자가 다정하게 그녀를 만지고, 손잡고, 포옹하는 사진들.
얼굴에 블러 처리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동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 맞아?”
정아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사희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깨문다.
“이게 어디에 올라 온 거예요?”
“그건 모르겠고, 나도 카톡으로 받았어.”
지인으로부터 연예인들의 사생활 사진 모음집을 받았는데, 그 속에 이사희의 사진이 끼어있었더라는 설명이었다. 이미 사진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를 크게 한 바퀴 돈 상태였다.
“이 남자, 정말 이동하 본부장이 맞아?”
사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녀의 반응을 본 정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가, 사희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을 눈치채곤 얼른 입을 가렸다.
“표정이 왜 그래. 놀라서 그래?”
“…….”
사희는 지금 자신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겪을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외다리를 걷다가 다리 한 짝을 잘못 디뎌 바닥으로 훅, 꺼진 것처럼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는 어떤 마음일까. 사희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
[단독] 신예 스타, 이사희. 혜석그룹 차남과 핑크빛 무드.
수영 여신의 마음을 앗아간 재벌3세. 연예인급 외모를 가진 훈남으로 알려져…….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스토리가 현실에서도.
온갖 거창하고 느끼한 미사여구를 주렁주렁 매단 기사는 순식간에 인터넷을 도배했다.
재벌과 신예 방송인의 열애 소식은 어쨌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좋은 소재임이 틀림없었다. 심각하고 무거운 이슈보다, 가볍고 말랑말랑한 소식에 더욱 열광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바꿀 수 없는 진리였다. 하루 종일 실검순위를 장악한 가십에 며칠간 이슈가 되었던 다른 사회 뉴스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동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를 읽고 있었다. 수찬이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말을 붙인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둬.”
동하는 더는 관심을 줄 필요가 없다는 듯, 태블릿을 밀어놓고 앞에 놓인 결재 서류를 펼쳤다. 수찬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어린다.
“대응하지 않으시겠단 뜻이에요?”
“뭐라고 대응해? 사실이 아니라고, 오해라고, 그냥 친분이 있는 정도라고 변명하나?”
“……그래도 그냥 두면 더 시끄러워질 텐데요.”
“그 반대지. 반응하기를 바라고 터트린 기사인데, 반응해주면 더 난리겠지. 그리고.”
동하가 펜을 쥐고 있던 손을 멈추고, 손에 쥔 것을 가볍게 한 바퀴를 돌렸다.
“뭐,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잖아.”
남자는 숫제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당겨 웃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의연한 것이 의아해 수찬은 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냥 둬. 기사가 의도한 결과가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테니까. 이쪽에서 굳이 춤까지 춰 줄 필요는 없어.”
동하는 시크하게 대꾸하곤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동하의 말에 수찬이 토끼 눈을 뜬다.
“누가 의도적으로 터트린 기사라는 건가요?”
“그래. 기사들이 너무 성의 있잖아. 마치 어디서 조달받기라도 한 것처럼. 아직 이사희는 이 정도 파급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야. 재벌과의 열애설이 구미 당기는 이슈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기자들이 난리를 칠만큼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누가…… 엇! 설마…… 이경민 쪽에서?”
중얼거리던 수찬이 종전보다 더 커진 눈으로 동하를 본다. 동하는 코웃음 픽 치곤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수찬이 나가고 비로소 홀로 남겨지자 동하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옆자리에 얌전히 놓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휴대전화를 손끝으로 한참 만지작거리다 화면을 띄운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메시지 창을 연다. 사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희는 하루 종일 저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에 지쳐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위축이 되었다. 심심찮게 농담을 걸어오는 직원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반응은 냉랭했다. 시기 같기도 하고, 괜한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혹은 상대적 박탈감인지도 모르고.
정아만은 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여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주 조금 서운해하긴 했지만. 그 정도 투정쯤이야 애정이다.
주변을 의식한 탓인지 동하에게는 연락이 없다. 어쩌면 그도 자기처럼 당혹스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왠지 잠잠한 그에게 조금 서운했다. 아니, 착잡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보통의 연애를 하는 보통의 연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사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털어냈다.
알고도 시작한 인연이다. 평범한 연애보다 조금 매끄럽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더구나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매달려 감정을 소비하는 것은 어리석다.
사희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을 때,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동하의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