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86화 (87/109)

#86

“…….”

“이동하가 눈 뒤집혀서 널 찾으러 왔을 때, 심상치 않은 관계인 건 눈치챘는데……. 뭐야, 둘이 연애라도 하시나?”

사희는 대답 대신 이죽거리는 경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경민은 주눅 든 기세 없는 그녀의 눈빛에 더욱 흥분했다.

“두 분의 관계라고 했어? 우리의 관계가 뭔데? 이동하가 너한테 우리가 무슨 관계라고 이야기했는데?”

“본부장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내 앞에서 그 새끼 편들지 마. 네가 뭘 알아! 그 새끼가 뭐라고 했든, 진실은 안 바뀌어. 그 새끼는 우리 집안에 기어들어 온 기생충이야, 창녀가 낳은 자식이라고.”

악에 받쳐 쏟아내는 더러운 말에 사희의 얼굴이 굳는다.

저를 보는 그녀의 시선에 경멸이 섞이는 것을 목격하자, 경민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너까지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왜 너마저 이동하야. 왜 그 새끼야, 왜! 어째서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온전히 내 것일 수 없는 거야. 왜 나는 늘 이렇게 발버둥 쳐야 하는 거야! 왜!

독기가 바짝 오른 뱀처럼 경민은 이성을 잃었다. 이제 눈앞의 상대가 무엇이든, 그것이 진실한 우정을 기대했던 사람이었든, 혹은 곁에 두고 다정하게 지내고 싶은 여인이었든 그런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이동하도 너를 가질 수 없다. 나는 기꺼이 너를 짓밟고, 찢어발기고, 더럽힐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닌 이동하를 선택한 네가 치러야 할 대가가 될 것이며, 내 것을 앗아간 이동하가 치를 대가가 될 테니까.

“이동하가 혹시 그 이야기도 하던가? 그 새끼가 내가 널 부르는 거에 왜 그렇게 벌벌 떠는지, 그 이유는 말 안 해?”

“……?”

“이동하가 죽고 못 살던 여자가 내 아이를 낳았다고. 차세령과 이동하 그 둘이 한때는 뜨겁게 사랑했던 사이라고. 아니, 어쩌면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차세령을 되찾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을 게 분명하거든. 이동하가 그 말은 안 하던가?”

하얗게 질리는 사희의 얼굴을 보며 경민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킬킬거린다.

“신뢰? 네가 그 새끼에게 갖고 있는 신뢰만큼, 과연 이동하가 네게 진실할까?”

사희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곤 더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눈으로 경민을 쏘아보았다. 부들거리는 경민을 한참 노려보던 사희는 허탈하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그 비어있는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허망하고, 서글펐다. 그러나 그 웃음에 섞인 슬픔은 경민이 생각했던 그런 유의 것이 아니었다. 사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애잔한 눈빛으로 경민을 본다.

“그런 말이 절 흔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얼이 빠진 것처럼 멍청해지는 경민을 보면서 사희는 또박또박 말했다.

“내 남자의 철 지난 옛사랑 따위, 관심 없어요. 내게는 이동하의 지금이 있거든요.”

***

세령은 식어가는 찻잔을 바라보며 밀랍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고진영 실장으로부터 경민이 재민을 대동해 만난 사람이 이사희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뛰던 심장은, 그가 이사희에게 명우재단에서의 일을 제안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에 이르러서는 거의 폭발할 것처럼 날뛰었다.

그간 세령은 남편의 여자들을 철저히 무심하게 외면해왔다. 경민이 세령에게 가장 이를 가는 것 역시도 자신이 어떤 여자를 만나든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그녀의 무관심이었다. 세령은 이경민을 알고 있었다. 그가 절대 자신을 놓지 못한다는 것을. 다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발광하고, 몸부림치고, 밖을 떠돌아도, 그의 마음은 늘 자신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그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녀 역시 철저한 무관심이라는 형벌로 그를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이제 그녀는 어떠한 것도 확실할 수가 없었다. 이사희에 대한 이경민의 감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그가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꿈꾸는지도, 그리고 그가 자신의 무모한 희망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까지 벌일 수 있을지도,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동안 그가 만났던 여자들은, 일부러 세령에게 보이기 위해 지어낸 유치한 말썽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사희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령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경민이 지금 저를 완전히 잊고 있다는 것을. 그가 맴도는 존재가 더 이상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이동하가 완전히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의 충격이 세령을 뒤흔든다. 참담하다. 두 남자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자신이, 이제 두 남자의 인생에서 완전히 떠밀리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씁쓸함이라는 사소한 형용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한 감정이었다.

마음과 몸이 흔들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을 수도 없다. 가슴이 옥죄는 것처럼 답답해지더니, 이내 숨을 쉬는 것이 거북해졌다. 어두운 물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던 그날의 섬뜩한 기운과 닮은 것이 세령의 몸을 꽁꽁 묶는다. 그리곤 하염없이 아래로, 아래로 그녀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날처럼 지금도 발밑이 보이지 않는다. 온통 어둠뿐이었다.

***

간밤 이종학 회장은 두 차례의 쇼크 상태를 맞았다. 심정지 직전의 위급상태였으나 다행히 새벽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언제 또다시 그의 심장이 멈출지 모르는 상태였다. 혜석그룹의 운명은 이윽고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임시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표면적 목적으로는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있는 혜석그룹의 사업을 일원화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으나, 실상은 이종학 회장을 이을 차기 경영 플랜 논의가 주가 될 것이었다.

“오늘 안건은 분산되어있던 복합쇼핑몰, 마트 분야 사업을 일원화하는 것입니다. 쇼핑몰, 마트사업 및 편의점 사업을 혜석유통이 일괄 양수하여, 단독경영을 통해 사업주도 및 의사결정을 효율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원화가 확정이 되면, 다음 수순은 책임자의 인사, 각 분야의 인사와 함께, 혜석유통 경영과, 마트 사업 분야의 대표를 겸임해왔던 이경민의 승진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사안의 중심에 선 이경민은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이사회 출석률은 매우 저조한 편이었으나, 이 자리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동하는 비어있는 그의 자리를 보며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파행을 묵인하는 분위기가 이경민의 절대적인 권력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존재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호했다. 만약 후자라면 그 꼭두각시 줄을 가지고 노는 이는 저기 맞은편 가운데 자리에 앉아 사실상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윤재화가 될 것이다.

무료하게 진행되던 이사회의 흐름이 바뀐 것은, 윤재화 전무이사의 비서가 등장해 급보를 알린 뒤부터였다.

사건이 발생했다. 이경민 부사장이 프로포폴 불법투약 혐의로 국민권익위원회에 고발당했다. 해당 소식은 순식간에 포털 실검을 장악했다.

이사회는 갑작스럽게 터진 충격적인 소식으로 어떤 것도 결정짓지 못한 채 흐지부지 종료되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즉시, 동하는 수찬으로부터 해당 내용을 보고 받았다.

“이경민 부사장과 내연 관계에 있던 여성의 제보라고 합니다.”

수찬의 설명을 듣는 동하의 눈빛이 언짢게 흐려진다.

“신고내용이 구체적이고, 증거도 있어서 수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동하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무언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일이 매우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발생하고 있다는 의심만은 지울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일은 그룹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발생한 일 중, 가장 골치 아픈 사안이 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

같은 시각, 윤재화도 이경민의 파행 소식에 긴급하게 회동한 이사들과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왜인지 윤재화의 표정만은 침착했다. 이경민 부사장의 최측근이었으니 가장 당황해야 맞는데,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 일을 예견한 사람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검찰 수사에 돌입하면 사실 여부를 떠나 회사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이 있을 겁니다. 벌써부터 주가가 출렁대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이경민 부사장 체제로의 승계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주주들 반응도 좋지 않습니다. 벌써부터 이동하 이사 쪽으로 눈길을 보내는 분위기도 포착되고…….”

“전무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이동하는 안 됩니다. 그 친구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들만 해도 보세요. 혜석이 언제부터 사회적 기업 흉내를 냈습니까? 회사가 무슨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그러다 회사 망합니다. 이동하는 안 돼요.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요. 우리 모두의 사활이 달린 문제입니다.”

불안하게 입을 대는 이사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앉아 있던 윤재화가 줄곧 닫혀있던 입술을 뗐다.

“당연히 그렇게는 안 되게 해야지요.”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없어도 만들어야죠. 내가 그런 일 하라고 앉아 있는 사람 아닙니까.”

초조해하는 사람들을 느리게 훑으며 윤재화는 껄껄 웃었다. 윤재화의 태연한 웃음에 불안해하던 이사들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조금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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