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오전 일정을 마친 사희와 정아가 점심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디선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 둘이 다가왔다.
“이사희 씨 맞죠? 와, 언니. 진짜 예뻐요.”
“팬이에요.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스스로를 팬이라 밝힌 학생들과 엉겁결에 사진을 찍고 나서야 겨우 풀려난 사희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근래 들어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공중파 방송 몇 개에 연달아 출연한 뒤, 그녀에 대한 반응은 한층 달아올랐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 대뜸 빵을 주고 가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택시기사님은 요금을 깎아주기까지 했다. 하루아침에 인기인이 되었지만, 사희는 여전히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하다.
“사희 쌤 얼굴이 저 애들보다 더 빨개졌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적응이 안 돼요.”
“국가대표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인기 많지? 완전히 제2의 전성기네.”
정아는 여전히 붉은 기가 가실 줄을 모르는 사희의 얼굴을 보며 키득거렸다.
방송국에서 연예인 누구를 만나봤느냐, 실제로 보면 더 잘생겼느냐, 잘생겼으면 우리 본부장보다 잘생겼더냐, 따위의 수다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는데, 그들 앞으로 차 한 대가 섰다. 그 안에서 몇 번 얼굴을 본 남자가 내린다. 이경민 부사장의 비서였다.
“부사장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사희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을 미뤘다. 지난번 그녀가 이경민 부사장을 독대했을 때, 몹시 화가 나 찾아왔던 동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 갔다.
옆에서 지켜보는 정아의 표정에 궁금함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서는 이렇다 저렇게생략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판단한 사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저를 부르지 말라는 확실한 거절이 필요하다면, 누굴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도착한 곳은 조경사업이 손색없이 훌륭하게 진행된, 식물들로 가득한 학교 같은 곳이었다. 입구에는 명우재단이라고 적힌 비석이 놓여있었다.
고 실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는 이경민 부사장과 함께 생각지 못한 인물이 있었다.
“재민아.”
사희를 보자 재민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쪽으로 뛰어온다거나, 살가운 인사말을 건넨다거나 하지는 않았어도 그녀를 보는 눈에 가득 찬 반가움만은 진심이었다.
“재민이가 강사님을 보고 싶어 해서요.”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경민이 빙긋 웃으며, 재민을 향해 가까이 가볼 것을 권한다.
경민에게 있었던 목적은 일단 뒤로 하고, 사희는 재민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자 한참을 쭈뼛거리던 아이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마침내 그녀의 손에 아이의 작은 손이 닿는다.
“잘 지냈어?”
재민과 눈높이를 맞춘 사희가 다정하게 묻자 재민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다.
“유튜브에서 강사님 영상을 찾아보고 있더라고. 나는 걔가 그렇게 인터넷을 잘 다루는 줄 몰랐어요. 천재인 줄 알았다니까.”
신나게 자랑을 늘어놓는 경민을 돌아보며 사희는 조금 웃었다.
“많이 친해지셨나 보네요.”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강사님이 알려준 대로 했어요.”
사희의 말에 경민은 머쓱한지 괜히 이마를 긁는다. 악의가 없어 보이는 그를 보면서 사희는 어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어렵지만 어쨌든, 꼭 한번은 해야 할 말이었다.
***
명우재단 사옥을 둘러싼 나무들은 맹렬했던 녹색의 기운을 조금씩 잃고 가을이 올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세령은 이곳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때를 떠올려본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찾아왔던 이곳에서, 세령은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두 명의 남자를 만났다. 아니, 어쩌면 두 남자의 인생이 저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세령의 선택은 그녀를 결국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오게 했다. 이제는 돈을 비극으로 여기는 가련한 소녀가 아닌, 그 돈으로 인생을 산 여인이 되어서.
사회사업부서장이 제일 먼저 그녀를 반겼다. 세월이 지나 제법 나이가 들었지만, 세령은 그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녀가 누군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한때는 이 재단에서 주는 위로장학금을 받았던 불우한 소녀가 이제는 재단을 주무를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 감개무량한 눈치였지만, 반평생 재단 밥을 먹은 사람의 눈치란 괜한 것이 아니다. 절대로 세령의 존재에 대해서 함구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남자는, 철저하게 눈을 조아리며 그녀에게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세령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눈만 조금 움직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계단을 오르는 세령의 뒤를 수행원과 직원들이 따른다. 세령은 그들의 거창한 의전을 한 치의 어색함도 없이 받으며 당당히 앞서 걸었다.
“부사장님도 와 계십니다.”
앞서 걷던 세령의 걸음이 멈춘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의아해하는 그녀의 눈을 본 사업부장의 눈이 잠시 멈칫했다.
“아, 두 분께서 약속이 되신 게 아니었군요. 저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드님께서도 함께 내방하셨기에…….”
“지금 어디에 계시죠?”
“내빈실에 계십니다. 그쪽으로 모실까요?”
사업부장이 살갑게 말을 잇는데, 그의 곁에 서 있던 부하직원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그의 옷자락을 살짝 끌었다. 그리곤 재빨리 그의 귓가에 무어라 짧게 속삭였다. 동시에 사업부장이 무얼 보고 크게 놀란 것처럼 당황했다.
“아, 우선은 저희 사무실에 가셔서 차부터 한잔하시는 것이…….”
다급히 말을 돌리는 사업부장의 얼굴을 빤하게 바라보며 세령이 느릿하게 눈을 한번 깜박였다.
“부사장님께 일행이 있나요?”
“아, 그게…….”
“그럼 됐어요. 우리는 사무실로 가죠.”
세령은 태연한 듯 다시 앞서 걸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직원들의 기색을 눈치챘지만 세령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무실에 도착해, 따듯하게 김이 오른 차 한 잔을 받았을 때. 세령은 느긋하게 입술을 당겨 웃으며 말했다.
“가서 고진영 실장 불러와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
“나랑 일합시다. 내가 일전에도 말했던 그 사업, 강사님이 맡아요. 바로 여기 이 재단에서 일하는 겁니다.”
잠시 재민을 내보낸 경민이 불쑥 말을 꺼냈다.
사희는 고개를 들어 경민을 보았다. 그리곤 비로소 준비했던 말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노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알아. 그런데 뭐 상관있나? 여기에서는 노바에서 수영강사나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우받을 거예요. 뭐, 원하는 자리가 따로 있으면 말해도 돼. 그 자리 앉게 해줄게요. 강사님은 큰물에서 일하는 게 더 어울려.”
경민은 마치 어린애에게 사탕을 사주겠다 말하는 것처럼, 어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하곤 사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대하는 그의 눈빛에는 거절이 돌아올 것이라는 추호의 의심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노바에 남으려는 것은 본부장님과의 신뢰 때문입니다.”
경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본부장? 이동하를 말하는 건가?”
“네.”
“무슨 신뢰?”
“본부장님께서 제 능력을 알아보시고 맡겨주신 신뢰입니다. 저 역시 신뢰로 보답하고 싶어요.”
사희의 대답에, 경민은 같지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그 능력, 나도 높이 샀기 때문에 이렇게 제안했는데? 그건 안 느껴졌나?”
“부사장님의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제 능력을 넘는 과분한 제안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희는 그즈음에서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얕게 쪼개 뱉었다.
“그리고 앞으론 이렇게 저를 호출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 역시 앞으로는 응하지 않을 거고요.”
사희의 말투는 한없이 단호했다. 단단한 사희의 눈빛을 보는 경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응하지 않을 거라고?”
“네.”
“어째서?”
“부사장님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제 직무가 아니니까요.”
“직무? 이사희 강사는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오늘 이 자리도…… 당신에게는 그저 일이었어?”
“일이 아니었다면, 제가 부사장님을 이렇게 따로 만날 일은 없었겠죠.”
경민은 마치 무언가에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다. 그녀에게서 이토록 사무적인 대답을 들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 딱히 꼬집어 말할만한 깊은 무언가가 없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경민은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적어도 ‘우정’ 쯤은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저 일일 뿐이었다니. 그를 향한 따듯한 위로와 관심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행동들이 그저 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큰 충격이었다.
관계에 대한 엇갈린 정의가 경민의 마음을 거칠게 후벼 판다. 못내 무안하고, 또 참을 수 없을 만큼 섭섭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경민은 이 잘못된 상황의 책임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이동하가 시키던가? 내가 무슨 제안을 하던 무조건 거절하라고?”
“아뇨. 본부장님은 그러신 적 없습니다. 두 분의 관계와 상관없이, 저는 제 의사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동하를 향한 그의 거친 공격을 단호하게 막아서는 사희를 보는데, 경민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툭,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경민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입술을 비뚤게 비틀었다.
“니들 둘,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