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언니!!!”
동하는 재빨리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고도 반응이 없자 이번엔 현관문을 두드렸다.
“이사희! 나야, 문 열어!”
동하가 크게 고함 지차 안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희가 달려 나와 문을 열었다.
“언니가…….”
혼비백산이 된 그녀는 다시 욕실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사희를 따라 욕실로 달려간 동하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사희의 품에 안겨있는 강희는 의식이 없었다.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황급하게 욕실 안으로 뛰어 들어간 동하는 번쩍 강희를 들어 올렸다. 편평한 바닥에 강희를 뉘이고, 재빨리 맥박을 확인한다. 다행히 맥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동하는 강희의 입술에 숨을 불어 넣었다. 몇 번의 인공호흡 끝에, 강희가 쿨럭하고 기침을 하더니 거센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검푸르게 죽어가던 얼굴에 핏기가 도는 것을 보자, 거의 멈춘 듯 긴장해 있던 동하의 심장이 비로소 빠르게 뛰었다.
***
응급실 침대 곁에 걸터앉은 사희의 시선은 줄곧 잠든 강희의 얼굴에 향해 있다.
“검사 결과도 이상 없고 나머지도 모두 정상 수치입니다. 입원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수액 빼는 대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피로한 인상의 의사가 외워놓은 것처럼 감정 없이 이야기하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조금 심각하게 눈시울을 좁혔다.
“이런 일로 환자가 내원을 하면 저희 쪽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거든요. 구급대원들 말로는 환자가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소견을 보인다고요. 혹시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거나…….”
초조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희의 입가가 바르르 떨린다.
“학대를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희 대신 동하가 대답했다.
“경찰도 아닌 의사가 이렇게 단정 지어 질문하는 건 월권 아닙니까? 확인이 필요한 일이라면 관계기관에 의뢰하십시오.”
동하의 완강한 태도에 주춤한 의사는 ‘요즘 워낙 이런 일이 많아서…….’ 얼버무리며 자리를 떴다.
해쓱해진 얼굴로 동하를 바라보던 사희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나 끝내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동하는 뻣뻣하게 서 있는 사희의 팔을 잡았다.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당신한테 죄 있다고 한 거 아니야. 의사 말대로 요즘 그런 일이 다분하니, 확인차 한 말이겠지.”
“왜…… 괜찮은 것 같았는데 왜 또……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었는데…….”
힘없이 중얼거리던 사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트렸다. 동하는 사희를 품에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사희의 울음소리에서 절망과 피로가 느껴졌다.
***
자정이 지나자 맞은편 아파트 창문의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한다. 듬성듬성 불이 켜진 건물 전체가 흑돌과 백돌이 놓인 거대한 바둑판처럼 느껴졌다. 오래도록 밖을 바라보고 있던 동하는 등 뒤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사희가 때꾼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언니는?”
“잠들었어요.”
“이제 당신도 좀 쉬어. 피곤해 보인다.”
사희는 잠깐 사이 쑥 빠진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떨어트린다.
동하가 소파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드는데, 사희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자고…… 갈래요?”
사희를 잠자코 바라보던 동하가 이윽고 희미하게 웃는다.
“그랬으면 좋겠어?”
“불편하면 말구…….”
“편하진 않지.”
“……아.”
금세 민망해하는 사희를 귀엽다는 듯 보며 동하는 재킷을 내려놓는다.
“오늘 밤엔 도리상 이사희를 가만히 안고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잠들 수 있겠어.”
동하의 농담에 시무룩했던 사희가 어이없다는 듯 조금 웃었다. 굳어있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이리 와요.”
동하가 사희를 향해 팔을 벌린다.
“어서, 안고 싶어.”
사희가 동하의 품으로 안겨든다. 셔츠에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가 가슴 속으로 밀려들었다. 코를 묻고, 영원히 그 안에서 숨 쉬고 싶은 향기였다.
“고마워요. 혼자 있으면…… 나쁜 상상을 할 것 같아서 부탁했어요.”
“잘했어.”
동하는 사희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스푼처럼 몸을 겹쳐 침대에 누웠다. 동하의 남다른 신장을 사희의 아담한 싱글침대가 수용하기 벅차 보였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누워있는 이 순간이 둘에게는 어느 때보다 편안한 시간이었다.
“언니가 나쁜 맘을 먹기 전에, 나한테 전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얼마쯤 지났을까, 잠든 줄 알았던 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살면 안 되겠느냐고……. 언니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한 건 처음이었어요. 아빠가 사고로 죽고 언니 혼자 남겨졌을 때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동하는 사희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진동을 느끼며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거절했어요. 아주 못되게. 난 언니가 나한테 기대는 게 싫었어요. 애써 일궈놓은 내 삶이 언니 때문에 엉망이 될까 봐. 언니가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될까 봐 그게 무서웠어.”
사희의 목소리 끝이 떨린다. 여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내가 그때, 언니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언니는 그런 선택을 안 했을까?”
동하는 팔을 뻗어 사희의 몸을 돌려 안았다.
“이사희가 못됐다고 누가 그래? 이렇게 착해 빠졌는데.”
아기 새의 울음처럼 희미한 흐느낌이 사희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다. 아무리 이를 꽉 다물어 봐도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죄책감과 후회는 숨겨지지 않았다.
“우리 언니 어떡하지?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돼요?”
“당신은 충분히 할 만큼 하고 있어. 조금씩, 조금씩 좋아질 거야. 지루한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지치지 말자. 나도 방법을 찾아볼게.”
사희는 고개를 들어 동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당신한테 빚지기 싫어요.”
“내게 빚지기 싫다는 그 마음이, 빚보다 더 나빠.”
“하지만…….”
“쉿.”
동하는 사희가 다른 말을 더 하지 못하게 품 안에 꽉 가두었다. 사희는 동하의 품으로 깊게 파고들며 작게 속삭였다. 아마도 고맙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경민은 부스스 잠에서 깼다. 소리는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침대를 살핀다. 재민이 보이지 않았다.
부자(父子)는 어젯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충동적으로 놓고 가라고 말했지만, 경민은 한 번도 아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 많은 아이와 있어도 더디게 가는 것이 시간인데, 말 없는 아이와의 시간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언제까지고 멍 때리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경민은 일단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몽땅 룸서비스 시키는 것으로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케이크와 초콜릿, 사탕, 캐러멜, 젤리 같은 것들이 줄지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입이 짧은 재민은 산처럼 쌓인 군것질거리 중, 고작 젤리 한 봉을 먹었을 뿐. 더 이상 탐을 내지 않았다.
“슬라임인가 뭔가. 그거 할래? 너 그거 좋아하잖아.”
그래서 다음은 슬라임이었다. 호텔 직원 몇 명까지 동반해 거대한 액체괴물을 만들었으나, 재민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속에서 욱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지만 경민은 최선을 다해 참았다. 사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00을 주고 싶어도 재민이가 1밖에 받을 수 없다면, 그것도 이해해주셔야 해요.’
속으로 참을 인을 백번 정도 새긴 경민은 요새 아이들이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아보기 위해 태블릿을 들었다. 이것저것을 검색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재민이 그를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아닌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뭐? 이거?”
경민이 태블릿을 들어 보이자 재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만한 연령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케이크도, 젤리도, 장난감도 아닌 유튜브라는 것을 경민은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재민이 능숙하게 그것을 다룰 줄 안다는 점이 경민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경민은 재민이 고작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검색을 하고, 재생을 눌렀을 뿐인데, 마치 천재 해커를 본 듯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너 혹시 천재야?”
그러자 재민이 웃었다. 새 부리 같은 입술을 달싹이면서 보일 듯 말 듯.
부자는 새벽까지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엄마와 있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탈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재민은 아빠에게 적지 않은 동지 의식을 느낀 듯했다.
방 밖으로 나와 보니 재민은 소파에 앉아 여전히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품을 한 경민이 재민의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뭐 봐? 아직도 볼 게 남았어?”
힐긋, 패드에 시선을 돌린 경민이 하품하던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뜬다. 재민이 보고 있는 영상 속에는 이사희가 있었다. 영상을 보는 아이의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했다.
“선생님 보고 싶어?”
재민이 영상에서 눈을 떼고 경민을 돌아본다.
“그럼…… 만나게 해줄까?”
그러자 재민의 동그란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진다. 그렇게 잠시 경민을 바라보던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민이 재민에게서 받은 첫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