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세령은 마주 앉은 경민에게서 낯선 기운을 느꼈다.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이 편했던 적이야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지만 오늘은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경민의 눈동자에 빛이 없었다. 몸은 그녀 앞에 앉아있지만, 알맹이는 완전히 다른 곳에 가버린 것처럼 허망한 눈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래도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언제까지 그러고 앉아있을 거야?”
침묵을 깨고, 경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담배를 문 입술을 웅얼거리며 귀찮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세령은 조금 움찔했다.
“어머님께서 당신 걱정…….”
“그런 이야기라면 됐어. 내가 직접 통화할게.”
세령의 말허리가 뚝 잘렸다. 세령은 치맛자락을 말아 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거 말곤 더 할 이야기 없는 거야?”
“…….”
“그럼 돌아가.”
경민이 미련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령이 다급히 말을 잇는다.
“진소영이 찾아왔었어.”
“누가 찾아와?”
경민이 살짝 뗐던 엉덩이를 다시 붙여 앉으며 구겨진 얼굴로 세령을 본다.
“날 찾아와서 당신 아이를 가졌다고 하던데.”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경민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더니 씹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 말을 믿어? 사실일 리가 없잖아.”
“어떻게 장담해?”
“야!”
경민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아니라면 아닌 거야. 내가 그렇게 아무 데나 애새끼 싸지르고 다니는 놈인 줄 알아?”
세령은 경민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정확한 의미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여자가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세령은 왜인지 마음속에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이 솟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그가, 재민이를 외면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당신이 뭘 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적어도 재민이에게 당신이 겪었던 아픔을 대물림하는 일은 없길 바라.”
“내가 겪었던 아픔?”
세령을 보는 경민의 눈이 눈에 보이게 좁아 들었다. 그는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훅 뱉으며 조금 웃는다.
“아픔이라. 네가 내게 그런 표현을 다 써주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경민이 입술을 삐죽이며 빈정거렸다. 세령은 그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고, 시선을 차분하게 내려떴다.
“당신하고 싸우려고 여기 온 것 아니야.”
“그럼 뭐 하러 왔어? 새삼스레 내가 보고 싶었을 리는 없고.”
세령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생각해보았다. 표면적 명목은 그를 설득해 집으로 데려오라는 윤 여사의 명령이었겠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세령은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에 없이 차가워진 그의 태도가 진심인지, 아니면 늘 그랬듯 엇나가는 투정인지를. 그리고 만약 그가 정말로 자신에게서 돌아선 것이 확실하다면, 그때는 그에게 확인시켜주어야 할 것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의 끈에 대해서. 홀로 올 수 있었음에도 굳이 재민을 데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렇게 구차한 행동을 하는지를.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그에게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자신이 갈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그렇게 서로를 물어뜯었음에도, 홀로 남겨지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이 아이러니한 마음을, 나는, 네게 말할 수 있을까.
명우재단의 일을 맡게 되었다고. 이 집안사람이 되어 책임을 다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당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혜석의 사람으로 인정받아 이곳에 속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세령은 어쩌면 그런 고백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새삼스럽게 그런 고백을 하기에는, 이제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세령은 입술 안쪽 연한 살을 괴로울 정도로 씹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재민이랑 같이 왔어.”
담배 필터를 씹으며 얼굴을 구기고 있던 경민의 표정이 멈칫한다.
“당신에게도 재민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데려왔는데, 당신 그럴 기분 아닌 것 같으니까 다시 데려갈게.”
“…….”
“일전엔 내가 말이 심했어. 사과할게.”
숨도 쉬지 않고 다급하게 말을 쏟아낸 세령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재민아.”
세령이 호텔룸 응접실 의자에 앉아있던 재민을 부른다. 얌전히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재민이 세령의 부름에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재민의 시선이, 뒤따라 나온 경민과 잠시 마주쳤다. 재민은 멀뚱한 시선으로 경민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재민이 두고 가.”
재민의 손을 잡고 나가려던 세령이 경민을 돌아본다. 경민은 그 시선이 조금 머쓱한 듯, 세령의 눈을 피해 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세령은 재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곤 재민에게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춤하던 재민은 이윽고 경민이 있는 쪽으로 조금 몸을 돌렸다.
재민을 사이에 두고 세령과 경민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 번도 증오와 원망이 아닌 시선으로는 서로를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럴 때는 어떤 눈빛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였다.
***
출발하면서 통화를 했었는데, 왜인지 아파트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을 때는 사희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제가 올라가 볼까요?”
수찬이 묻는다.
“아냐, 좀 기다리지 뭐.”
그렇게 마음먹은 동하는 아예 느긋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아파트는 곳곳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동하는 불 켜진 창문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다정하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일가족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에게도 그런 소박한 꿈을 꾸던 때가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둘러앉아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일과를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삶. 잠든 아이의 복숭앗빛 뺨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다정한 아버지. 그리고 한 침대에 누운 사랑스러운 아내의 몸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애무하는 사내. 절정을 함께 한 여인의 향긋한 체취를 맡으며 잠드는 그런 아름다운 시간을 말이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동하는 그런 소박한 일상을 함께 하고 싶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동하의 미간이 찌푸려 든다.
“아직도 안 받으세요?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수찬의 말에 기댔던 등을 일으킨다. 더는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동하는 차에서 내렸다.
“주소는 아세요? 4동 1008호입니다.”
수찬이 황급히 말을 덧붙입니다. 동하는 알고 있다는 듯, 손을 들어 까딱해 보였다. 동하는 그렇게 몇 걸음 더 걷다가, 갑자기 홱 몸을 돌려 수찬을 노려본다.
“그런데 너 그런 거 왜 기억하고 있어?”
“네?”
“네가 뭔데 내 여자 집 주소를 기억해? 기분 나쁘게.”
“네에?”
“당장 잊어라.”
으름장을 놓고 돌아서는 동하를 보며 수찬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아주, 푸욱 빠지셨네.”
남자가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천하의 이동하에게도 저런 면이 다 있나 싶다. 어찌 됐든 사랑에 빠진 바보의 뒷모습이 즐거워 보였기에, 수찬도 덩달아 즐거웠다.
***
겨우 9층까지 올라오는데 벌써 세 번이나 멈춘, 콩나물시루 같은 승강기 안.
동하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 빤한 시선에서 도대체 저런 남자가 왜 이곳에, 그리고 누구를 만나기 위해 왔는지를 캐묻고 싶다는 욕망이 느껴졌다.
쯧, 동하가 일부러 들리게 혀를 차자, 시선들이 움찔하며 정면으로 향한다. 하나 그것도 잠시, 시선은 순식간에 달콤한 꿀에 모여드는 꿀벌 떼처럼 다시 모였다.
시선 홍수 속에서 헤엄친 끝에 동하는 비로소 10층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끝까지 그의 행방을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동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운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간 동하는 마침내 그녀의 집 앞에 섰다. 음식점 스티커가 붙었다가 억지로 뜯어진 흔적이 남아있는 우중충한 회색 문이었다. 마침 열린 창문 안쪽에서 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무슨 샤워를 그렇게 오래 해? 나도 욕실 써야 되는데. 나 그냥 문 연다? 응? 그냥 들어간다?”
동하는 옅은 한숨을 쉰다. 어쨌든 사희에게 무슨 일이 생겨 전화를 받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지니 안도가 되었다. 동하가 부저를 누르려던 바로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