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82화 (83/109)

#82

“모두가요. 선배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어요. 태어난 순간부터.”

“…….”

“한 번도 생모의 얼굴을 본 적도 없습니다. 선배는 이경민 부사장의 친형제가 아닙니다.”

두통이 이는지 이마를 찌푸린 동하는 이내 구겨진 휴지처럼 잔뜩 몸을 웅크렸다. 건장한 몸을 팽팽하게 죄는 셔츠가 불편해 보인다. 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웅크린 몸을 바로 눕히고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내는데, 동하의 미간이 강하게 찌푸려 든다.

“으음.”

잠시 후 동하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리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멍한 눈빛으로 오래도록 사희를 바라보았다. 동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소중한 것을 다루듯 사희의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실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절박하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사희.”

“응, 정신이 좀 들어요?”

사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동하는 비로소 안심이 된 듯 깊은숨을 내쉰다. 그리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에게서 조금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안 보려고 했는데……, 당신.”

입술을 한번 질끈 깨문 동하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눈을 떴다. 잠깐새 물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얼굴이 해쓱했다.

“내가 당신한테 연락했나? 혹시 귀찮게 굴었어? 뭐 실수한 건 없고?”

“…….”

“미안해요. 앞으론 이렇게 취해서 연락하는 일 절대 없을 거야.”

사과하는 동하의 음성이 쓸쓸했다. 사희는 그런 동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옆자리에 나란히 몸을 뉘어 한 뼘의 거리를 두고 그를 보았다.

“왜 날 안 보려고 했는데?”

“…….”

“벌써 질렸어?”

사희의 당돌한 질문에 동하는 이마에 손등을 얹고 기가 막힌다는 듯 픽 웃었다. 남자는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손가락 엄지와 중지로 꾹 누르곤, 이내 사희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다.

“그런 게 아니라. 당신한테 실수할까 봐.”

“실수 좀 하면 어때.”

“실수하기 싫어.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 당신한테는.”

“쪽팔리기 싫어서?”

“그래, 쪽팔리기 싫어서.”

사희는 손을 뻗어 남자의 짙은 눈썹과, 붉어진 눈자위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길고 짙은 속눈썹 끝을 간질이듯 가만히 문지르자, 동하는 잠들 듯 사르르 눈을 감는다.

“당신이 버려진 게 나한테 쪽팔릴 일이에요?”

동하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떠, 사희를 본다. 동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사희는 굳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당신이 그랬잖아. 누구나 어두운 부분이 있다고.”

“…….”

“내가 이 말은 했던가? 우리 엄마도 언니랑 나 버렸다고. 우리 엄마는 아빠를 못 견디고 도망갔어요. 우리 아빠…… 나쁜 사람이었거든.”

담담히 말한 사희가 감싸 쥔 남자의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붙이자 서로의 코끝이 닿았다.

“봐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하고 있는데, 나 하나도 안 쪽팔려 하잖아. 나는요. 당신한테 이제 이런 거 하나도 안 쪽팔려. 왜냐면 당신이니까.”

사희는 바르르 떨리는 동하의 입술을 머금는다. 오래도록 서로에게 서로의 숨을 나누어주고, 나누어 마신 뒤, 두 사람은 끈끈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당신은 이것만 기억하면 돼요. 나는 이동하, 절대로 안 버려.”

사희의 목소리는 차돌처럼 단단했다.

동하의 눈자위가 더욱 붉어진다. 최선을 다해 눈물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희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든다. 그리고 곧, 눈물 한 방울이 눈초리를 타고 또르르 떨어졌다. 동하가 손가락으로 사희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달랜다.

“왜 울어. 울지 마.”

“대신 울어주는 거야. 울고 싶어도 못 우는 것 같아서, 당신.”

“…….”

“이동하 씨 쪽팔리지 않게 내가 대신 울어줄게요. 그러니까 울고 싶을 때에도 계속 나 보고 싶어 해야 돼. 알았지?”

동하는 입술을 한번 꾹 다물었다가 이내 씩 웃는다. 물기 어린 검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사희는 두 팔을 뻗어 동하를 끌어안는다. 커다란 남자가 사희의 품 안으로 허물어지듯 안겨들었다.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동하는 뒤통수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는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마음이 따듯하게 차오른다. 늘 결핍에 허덕이던 심장도 더는 몸부림치지 않고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비로소 평화였다.

***

“그 새끼, 끌어내려요. 당장 잘라버려.”

경민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 실장으로부터 이미 노바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 받은 윤재화는 경민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분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일단 감정을 좀 가라앉히세요. 회장님께서 직접 단행한 인사입니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아버지, 다시 못 일어나요. 중환자실에 누워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양반이 뭘 알겠어?”

“이동하 이사의 경영능력을 높이 사는 주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동하 이사가 만들고 있는 기업 이미지에 대한 대중 반응도 좋고요.”

“지금 내 앞에서 그 새끼 두둔하는 겁니까?”

경민이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으로 윤재화를 쏘아본다.

“지금은 그런 식으로 힘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쥐고 있는 힘이 많을수록 쓸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내가 다치지 않고 범을 잡으려면 칼자루 들고 정면에서 덤벼들면 안 됩니다.”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의뭉스럽게 굴지 마시고 쉽게 좀 말해요.”

경민의 악다구니에도 윤재화의 태도는 태연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지금의 수를 생각했던 것처럼, 태연히 바둑돌을 움직이고 있었다.

“찾아보겠습니다. 범을 굴에 빠트릴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지.”

***

지상파 방송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홍보팀장의 말마따나 그녀의 사연은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거기에 이목을 끄는 외모까지 더해지니 신선한 캐릭터를 고대하던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한 것이다.

사희는 자신의 이름이 하루 종일 검색어 순위에 올라있는 것도 모자라, 고리짝 시절 그녀의 대회 영상까지 발굴해 낸 뉴스 기사를 보며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바뀌었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짐작하는 중이었다.

“사희 쌤, 옛날에는 볼이 통통했네? 귀엽다.”

정아는 화질도 선명하지 않은 영상을 보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지방방송에서 찍었던 짧은 다큐멘터리에는 10대의 사희가 어색한 얼굴로 각오를 말하고 있었다.

“열심히 해서 금메달을 따고 싶고, 나중에 올림픽도 나가서 꼭 금메달을 따겠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과수원에서 사과 따는 일처럼 쉽게 말하는 어린 시절의 철없는 패기가 부끄러워 사희는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대체 사람들은 이런 걸 어떻게 찾는 거예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네티즌들이 맘만 먹으면 못 찾는 게 없더라. 사희 쌤, 착하게 살았지? 빚지고 도망친 적 없지? 그런 거 밝혀지면 바로 생매장되는 세상이야, 조심해.”

정아의 농담에 피실 웃으며, 사희는 영상을 마저 돌려 보았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좀 부끄럽긴 해도 그때는 꿈이 있어서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실패의 역사라고만 생각했던 과거가, 이제 와 다시 돌아보니 참으로 열정적인 날들이었다. 저 때만큼 맹목적으로 한 가지 목표에 자신을 던졌던 때가 또 있었던가.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던 시절이 보람 있는 족적이 되어 다가오는 것이 새삼 즐겁다.

한참 영상을 보며 킬킬거리고 있는데 사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야?”

한참 심각한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내려놓은 그녀를 향해 정아가 물었다.

“방송국 작가래요. 출연할 수 있냐고…….”

사희가 꺼내놓은 프로그램 제목을 들은 정아가 손뼉을 마주치며 팔짝 뛴다.

“그거 요새 되게 잘 나가는 거잖아. 나도 매주 챙겨보는 건데. 그래서 나간다고 했어?”

“일단은 알겠다고 했어요.”

사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는다.

“대박. 이사희 완전히 스타 됐네. 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여기 사인 좀 해봐. 얼른.”

정아가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들더니 자신의 티셔츠 자락을 내밀며 재촉한다.

“좀 기다리세요. 집에 가서 연습 좀 하고 해줄게요.”

두 사람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참 킬킬거리고 있는데, 큰 그림자가 그들 뒤를 바짝 따라왔다.

“뭐가 그렇게 즐겁습니까?”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두 여자가 고개를 돌려보니, 이동하 본부장과 최수찬 실장이 서 있었다. 본부장을 발견하자, 사희와 정아는 후다닥 한쪽으로 자리를 피하곤 예의를 갖춰 묵례했다. 두 사람이 지나치게 정중한 예절을 갖추는 것을 본 동하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웃는다.

“나도 좀 같이 웃을까요?”

사희는 시침을 뚝 떼고, 그야말로 본부장 같은 말투로 묻는 동하의 엉큼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라서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본부장님, 이사희 강사 대박 났어요. 인터넷이 아주 난리예요.”

동하가 격의 없이 말을 걸자 긴장이 풀렸는지, 정아는 상대가 자기가 평소 어려워하던 본부장이라는 것도 잊고, 마치 자기 일인 양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잖아도 기사 봤습니다.”

“혹시 이 영상도 보셨어요?”

정아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유튜브 화면을 동하 앞으로 들이민다.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어린 사희의 목소리가 다시금 재생되었다. 부끄러워진 사희는 얼른 휴대전화를 빼앗아 뒤춤으로 감춘다.

“그, 그만 보세요.”

“음. 이걸 보니 기사에서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네요.”

동하가 모를 소리를 홀로 중얼거린다.

“왜요, 본부장님? 기사에서 뭐라고 해요?”

정아가 토끼처럼 눈을 뜨고 묻는다.

“돌아온 얼짱 수영선수, 라고 하던데요.”

앞의 말을 할 때, 동하는 일부러 사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곤 입술을 당겨 빙긋 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동시에 사희의 얼굴이 홍옥처럼 붉게 달아오른다.

정아는 “어머, 어머.”, 호들갑을 떨면서 사희의 팔짱을 끼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닥거린다.

“저 짜식 은근히 귀엽네. 나 남친 갖다 버리고 확 쟤랑 사귈까?”

사희는 붉어진 뺨에 손등을 올리며 괜한 헛기침을 한다.

“뭐 만나는 사람 있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저런 남자는 대체 어떤 여자를 만날까?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다.”

콧바람을 씩씩 내뿜으며 툴툴거리는 정아의 말에 사희는 픽,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곤 정아 앞으로 제 얼굴을 쑥 들이밀며 발랄하게 속삭였다.

“그냥 내 얼굴이나 봐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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