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이 건방진 새끼가!”
이성을 놓친 경민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달려든다. 화들짝 놀라 물러나는 사희를 본 동하가 빠르게 그 사이를 막아섰다.
“이사희 강사, 자리로 돌아가세요.”
“본부장님…….”
“어서요!”
화난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그 눈빛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 어서 이 자리를 떠나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이었다.
‘누구에게나 어두운 부분은 있어. 내게도 있고. 그래도 넌 이야기하잖아. 이렇게 용감하게. 난 그런 것도 못 해.’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빠르게 그녀의 머릿속에 지나갔다.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형제인 두 사람이 이토록 서로를 물어뜯는 비극적인 모습이, 그가 말했던 그 어두운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애처로운 눈빛에 사희는 가슴을 후벼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당신, 괜찮은 거야?’
사희는 애달픈 눈빛으로 잠시 동하를 바라보다가 곧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즉시 두 사람을 향해 묵례한 뒤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사희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동하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경민을 보았다.
“이동하, 너 이 개새끼.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입술을 뒤틀며 달려들던 경민은 곧 동하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경민의 목을 강하게 움켜쥔 동하가 순식간에 그를 벽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켁켁, 거리는 기침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쳐보았지만 경민은 동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민은 저를 향해 맹렬한 분노를 드러내며 이글거리는 동하의 눈을 보았다. 그가 이렇게 이성을 잃고 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랬던 적이 한 번 더 있긴 했다. 차세령이 자신과 밤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던 날도 이동하의 눈은 지금처럼 미쳐있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그때와 지금의 분노는 색깔이 조금 다르다. 그때는 자기 것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회한이 섞인 분노였다면, 지금의 분노는 두 번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긴 분노,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면 그게 누구라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투지의 분노였다.
목을 죄는 손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부러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경민의 얼굴이 검붉어지다 못해, 나중엔 허옇게 뜨기 시작한다.
“본부장님!”
안으로 달려 들어온 수찬과, 고 실장에 의해 경민은 겨우 동하의 손에서 풀려났다. 구역질을 하며 비틀거리던 경민은 고 실장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경민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동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개새끼가! 너…… 이리 와. 너, 이리 안 와!!”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의미 없는 손짓에 지나지 않았다. 동하를 상대하기에 경민은 너무도 허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괴롭혀도 싫은 소리 한번 않았던 유순하고 순종적인 이동하는 이제 없었다.
“한심한 자식.”
동하의 굳은 입술에서 차가운 힐난이 흘러나왔다.
발악하던 경민이 멈칫, 의미 없는 몸짓을 멈추고 동하를 올려다본다. 동하는 동정의 여지도 없는 냉정한 눈으로 경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어?”
“넌 앞으로도 지금처럼 결핍 속에 살겠지. 네가 뭘 가졌는지, 무엇을 누리는지 영영 모르는 채로. 네 것이 아닌 것을 끊임없이 기웃거리면서. 그게 널 가난하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 돌리지 마. 또다시 그런다면 그때는 네 목을 부러트려 버릴 거야.”
동하의 목소리와 눈빛이 살을 벨 것처럼 날카로웠다.
“이리 와! 당장 이리 오라고, 이 개새끼야!”
차갑게 돌아서는 그를 향해 경민이 하염없이 소리쳤지만 동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약 꼭 그래야만 한다면 그때는 너를 내 손으로 베어내겠다는 뜻일 테니까.
***
“여기 세워주세요.”
사희는 창밖으로 최수찬 실장의 얼굴을 발견하자 다급히 택시를 세웠다. 줄곧 동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사희는, 자정이 넘은 시각, 최 실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수찬은 자못 미안한 표정으로 사희를 맞이한다.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왔는지 사희는 얇은 실내복 차림이었다.
수찬을 따라 들어간 곳은 어둑한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술집이었다. 수찬이 문을 열자 희미한 기타 소리가 들려온다. 군데군데 녹이 슨 철제 계단을 밟아 아래로 내려오자 연주 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작은 무대 위에는 머리가 센 마른 남자가, 잔잔한 드럼 반주에 맞춰 기타를 연주 중이었다.
연주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동하의 뒷모습이 보인다. 바에 기대앉은 남자의 뒷모습이 몹시 지쳐 보였다. 마치 커다란 산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찬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하자, 사희는 천천히 동하를 향해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곁에 다가와 선 사희를 본다. 풀린 눈으로 물끄러미 사희의 얼굴을 살피던 동하가, 비로소 조금 웃으며 제 옆자리를 손가락을 톡톡 쳤다.
“앉아요.”
“이렇게 근사한데 초대할 거였음 일찍 말해줬어야죠. 내 차림 좀 봐요. 사람을 이 꼴로 달려오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
사희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 차림의 저를 좀 보라는 듯 그 앞으로 몸을 조금 내밀었다. 동하는 뾰로통하게 구는 사희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미키마우스가 이렇게 섹시한 캐릭터였나?”
“많이 취하셨네요, 이동하 씨.”
“이리 와. 옆에 앉아요.”
동하가 사희의 팔을 잡아 옆자리에 앉혔다. 사희가 다리가 긴 스툴에 엉덩이를 붙이자, 동하는 그녀가 저와 마주 볼 수 있게 의자를 조금 돌려세웠다. 그리곤 그녀 앞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짙은 알코올 향기가 끼쳤다. 옅게 팬 눈자위 주변이 운 것처럼 붉었다.
“뭐 마실래요?”
“난 괜찮아요. 이제 그만 일어나요. 밖에서 최 실장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나랑 한잔만 합시다. 딱 한잔만.”
동하가 느슨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입술은 비죽비죽 웃고는 있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지금 동하는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사희는 결국 살짝 걸쳤던 엉덩이를 조금 더 깊숙이 붙여 앉는다.
“그럼 여기에서 제일 비싸고, 제일 독한 술로 시켜줘요.”
“역시, 화끈해. 이사희.”
잠시 후, 사희 앞으로 위스키 한잔과 얼음 잔이 놓였다. 사희는 망설임 없이 위스키를 털어 마시곤 재빨리 얼음 하나를 입에 문다. 동하는 비스듬히 턱을 괸 채로, 얼음을 입 안에서 사탕처럼 굴리는 사희를 바라본다.
“이사희.”
“응?”
“오늘 예쁘다.”
“나 예쁜 거 뭐 하루 이틀인가.”
“사희야.”
“응.”
“내가 너 사랑한다고 말했었던가.”
귀에 닿는 동하의 목소리가 새털구름처럼 감미로웠다. 사희는 수줍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했어.”
“사랑해. 잊어버리지 마. 절대로.”
“안 잊어요.”
사희의 대답을 들은 동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조금 웃었다. 그리곤 제 몫의 술잔을 비웠다. 입술을 적신 위스키를 핥은 동하는 마른세수를 하며 바에 몸을 기댔다. 비스듬히 턱을 괸 채로, 사희를 보던 동하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이사희.”
“응.”
“사희야.”
“응, 말해요.”
“나 버리지 마.”
물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사희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동하를 바라본다.
“너는 나…… 버리지 마.”
동하의 몸이 허물어진다. 사희가 재빨리 팔을 잡아보았지만, 그는 그대로 Bar 위로 쓰려져 정신을 잃었다. 동하의 긴 속눈썹이 물기로 젖어있다. 죽은 듯 잠든 남자의 얼굴이 오래도록 숨죽여 운 사람처럼 서러워 보였다.
***
동하의 집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가구와 소품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고, 적재적소에서 각자의 질서를 지켜 차분하게 놓여있었다.
사희는 침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잠들어 있는 동하를 바라보고 있다. 적지 않은 밤을 함께 보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것도 그의 집에서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최 실장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왠지 그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이곳에 남았다.
잠든 동하를 바라보며, 사희는 조금 전 최 실장과의 대화를 곱씹는다.
“실장님, 대체 뭐가 본부장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예요?”
“요즘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많으셨습니다. 회장님 건강도 좋지 않으시고. 여러모로…….”
“진실을 말해줘요. 누가…… 저 사람을 버렸나요?”
사희의 기습적인 질문에 수찬은 잠깐 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버려질까 봐 두려워해요. 버리지 말라고 애원했어요. 누구예요, 누가 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사희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은 최 실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눈앞에 선 이 여자를 동하가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하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에게 자신의 상처를 더 숨기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알아요. 최 실장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섣불리 그런 말을 해도 될까 고민하시는 거……. 하지만…… 언제까지고 저 사람을 저렇게 홀로 둘 수는 없잖아요. 저 사람, 너무 외로워 보여요.”
마치 저의 슬픔을 말하듯, 사희의 눈이 흐려진다. 눈시울에 차오른 눈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았으나 여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물기를 닦아내곤 꿋꿋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맑아진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단단해 보였다.
강한 사람이구나.
수찬은 그녀에게 강한 신뢰를 느꼈다. 그 순간, 동하가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도 분명 이런 것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찬은 동하가 자신을 묶어두고 있는 과거의 사슬을 풀어내기를 오래도록 간절히 바라왔다. 만약 눈앞의 그녀가 그 기회라면, 우물쭈물하지 않고 잡아야 했다.
수찬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