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80화 (81/109)

#80

노바 쇼핑몰의 귀빈실, 연간 소비액이 수억에 달하는 회원들만을 위해 한정적으로 오픈된 그 공간은 왜인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VIP 위의 VIP. VIP들의 돈으로 진짜 VIP가 된 자를 위해 비워진 것이다. 그 막강한 권력의 힘을 자연스럽게 누리며, 이경민은 그림처럼 다리를 꼬고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앉아요.”

경민이 자기의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 자리에 앉았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이 화장기 없는 얼굴 옆으로 늘어져 있다. 화려한 색채가 없는 얼굴이 풋과일처럼 풋풋하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다시 노바에서 일하는 겁니까?”

“네.”

“내가 기억하는 이사희 강사 마지막 말이, ‘당신들 정말 질린다.’ 였던 것 같은데. 그때 그 당신들이, 혜석을 의미했던 거 아니었나? 그런데 다시 노바에서 일을 한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군. 뭐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아니, 반가운 거 이상이야. 보고 싶었거든.”

경민이 입술을 당기며 빙긋 웃었다. 사희는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어서 조금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왜요. 내가 보고 싶어 하면 안 되나?”

시시껄렁하게 반말로 묻는 경민의 말에 대꾸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사희는 즉시 말을 돌렸다.

“저를 왜 부르셨어요?”

“말했잖아요. 보고 싶었다고. 운명인가? 어떻게 이렇게 다시 만나지? 앞으로 좀 더 자주 보고 싶어 해야겠다.”

경민이 시답잖은 농담을 늘어놓으며 낄낄거린다. 왜인지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 어느 날보다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그의 말투에서는 더 이상의 예의도, 품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할 말 없으시면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경민의 눈빛이 순식간에 식는다.

“앉아.”

경고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운 그의 말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이 그의 한 마디에 겁을 먹었다는 것을 드러내, 그에게 상대를 굴복시켰다는 쾌감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할 수 있는 한 가장 빳빳하게 얼굴을 굳혔다.

경민은 저를 향한 거부감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희를 빤히 보았다. 당돌하고 솔직한 것이 저 여자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지금 경민이 그녀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류의 것이 아니다. 그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따듯하고 담담하게 저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네가 원하는 거, 넌 영원히 못 가져.’

세령의 말이 다시금 그의 마음을 후벼 팠다.

‘아니, 가질 거야.’

경민은 어금니를 꽉 깨문다. 갖고픈 것은 어떻게든 가질 수 있었다. 무엇이든 원하면 갖게 되는 것, 그것이 자신이 부여받은 황홀한 운명이다. 그러나 이제 힘들이지 않고도 얻는 것들은 더 이상 경민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런 것들은 시시하고, 지루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 경민은 눈앞의 것에 구미가 당겼다.

“오늘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알아요?”

잠시 후, 경민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

사희는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의외의 질문을 하는 경민을 보았다.

“강사님이 하고 있는 그 프로젝트, 나, 아주 관심이 많아요. 그 사업을 좀 더 크게 확장시킬 겁니다. 혜석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난 사실 그게 재민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경민은 재민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 띄게 둥글어지는 사희의 눈을 보았다.

“재민이, 잘 지내고 있나요?”

사희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도통 말을 안 하니까. 그래도 전에는 뭐라고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눈도 잘 안 맞춰. 친해지려고 노력해봤는데, 매번 실패합니다. 내가 주는 건 받지도 않아.”

“재민이와 하루에 얼마나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사희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어진 경민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얼마나라는 말조차 댈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의 머쓱한 표정에서 대충 상황을 짐작한 사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다가가셔야 해요. 부사장님이 100을 주고 싶어도, 재민이가 아직은 1밖에 받을 수 없는 마음이라면, 그것도 이해해주셔야 하고요. 올바른 관계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 주고받는 거예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사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민의 눈빛이 조금 흔들린다.

“주고받는다……? 그럼 나도…… 받을 수 있다는 건가?”

“그럼요. 당연하죠. 부사장님.”

사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술을 당겨 조금 웃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은 울컥함이 느껴졌다. 불쑥 눈물이 치솟을 것 같아서, 경민은 황급히 입술을 앙다물어 참았다. 그리곤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에는 내게 아버님이라고 했었는데…….”

“네?”

“이사희 강사가 내게 재민이 아버님이라고 했었다고.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 아무도 없었는데.”

“네? 제가 그런 미친 짓을 했다고요?”

사희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경민은 대답 대신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리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기가 무슨 짓을 했던가를 되돌아보는 사희의 심각해진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가슴 안에서 맹렬한 소유욕이 타올랐다.

나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반드시 받고 말 것이다.

***

“이경민이 이사희 강사를 호출했다고?”

동하가 불에 덴 것처럼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불똥이 쏟아질 것처럼 순식간에 눈빛이 타올랐다.

“네, 지금 MVG 라운지에서 미팅 중이라고 합니다.”

“누가 함께 있지?”

“그게……, 동행인 없이 단독미팅입니다.”

수찬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동시에 동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릴 틈도 없이 본부장실을 나온 동하는 부서질 듯 세게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아래층에서 머뭇거리고 올라오지 않고 있는 승강기를 몇 초간 기다리다가, 동하는 즉시 비상구 문을 열었다.

“본부장님!”

수찬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동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구둣발에서 성마른 발굽 소리가 들렸다. 두 번 다시는 이경민이 있는 쪽으로 향하지 않겠다던 그의 다짐이, 이사희라는 한 마디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가 자신의 자존심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단숨에 MVG라운지에 도착한 동하는 ‘통제’라고 적힌 안내판을 거칠게 손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판이 쓰러지며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이경민 부사장의 수행원 몇이 동하의 앞을 가로막는다.

“지금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비켜.”

동하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어떤 고함보다 위협적이었다. 수행원들의 눈빛에 당황의 기색이 돈다.

“비켜 드려요. NOVA의 이동하 본부장님이십니다.”

어느새 뒤따라온 수찬이 경고하듯 빠르게 말했다. 수행원들은 즉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지, 마는지를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사람이 하나 더 나왔다. 이경민 부사장의 비서, 고진영 실장이었다. 고진영은 동하를 보자 즉시 허리를 굽히며 그의 앞으로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이경민은 어디 있지?”

“지금 부사장님께서는 미팅 중에…….”

그러나 동하는 더 이상의 인내심을 발휘해 줄 마음이 없다는 듯, 고 실장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신의 고 실장이 동하의 팔에 밀려 뒤로 몇 걸음 주춤했다.

라운지 안쪽의 프라이빗 룸으로 향하는 동하의 걸음걸음에 분노가 실렸다. 그가 막 룸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앞에는 이경민과 사희가 서 있었다. 사희는 문 앞에 장승처럼 선 동하를 발견하자 등잔처럼 크게 눈을 뜨며 붉은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를 향한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었다.

동하는 사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빠르게 확인했다. 놀란 눈치였으나, 그것은 자신의 돌발행동에 의한 것일 뿐, 다행히 그녀가 이경민으로부터 어떤 위협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덕분에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뜨거운 분노가 조금 식었다.

이경민의 얼굴이 동하를 발견하자 무참하게 구겨졌다.

“뭐야?”

“부사장님이야말로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낮게 시작했지만 목소리는 엄청난 고함이 되어 커졌다. 동하의 굵은 목소리가 공간을 우렁우렁 울렸다. 최상위포식자의 포효만큼이나 거칠고 사나웠다.

사희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린다. 동하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이마에 선명하게 솟은 예민한 핏대와, 이글거리는 눈빛이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이동하 본부장, 아까는 안 보이던데. 무슨 바쁜 일이 있었나 봐?”

경민은 강하게 이를 악물고 애써 조금 웃는다. 동하는 사희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 이죽거리는 경민을 차갑게 쏘아본다.

“부사장이 내방했는데, 본부장은 어디 틀어박혀 있다가 이제야 얼굴 비추시나?”

“부사장님의 내방 목적이 내 직원을 사적으로 불러들여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거였습니까?”

동하의 날카로운 말에, 빙글거리던 경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내 직원?”

경민이 눈이 고양이처럼 가늘어졌다.

“내 영역에서는 간부의 권위적인 갑질 행위, 용인 못 합니다. 그게 부사장이라도 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