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79화 (80/109)

#79

“이경민 부사장, 2시에 NOVA 정문에 도착입니다.”

수찬의 보고를 들은 동하가 시간을 확인한다. 이경민이 도착하기까지 약 15분 정도가 남아 있다.

방문목적은 단순 시찰. 부사장이 계열사에 방문하는 일이야 특별할 것 없는 일이지만, 이경민이 이동하가 있는 곳으로 온다는 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지만.

동하는 다시 시선을 서류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할까요?”

수찬이 초조한 듯 다시 묻는다. 대표이사까지 정문으로 나가 기다리는 만큼, 본부장도 마땅한 의전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일 것이다.

“내가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게 더 나을걸.”

동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경민 부사장 성격에, 분명히 나중에 이 일을 트집 잡을 텐데요.”

“어차피 내 존재 자체를 트집 잡는 사람이야. 이경민은.”

동하는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하며 조금 웃는다.

“내가 이경민에게 가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더 이상은.”

동하는 의자를 돌려, 맹렬하게 타오르는 한낮 여름 도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해 여름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아주 어렸을 때, 경민이 동하가 자기의 이복동생이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 그리고 무엇보다 경민이 동하에게 끔찍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쌍둥이라기엔 닮은 데가 별로 없는 두 아이는,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달랐다. 경민은 늘 큰소리를 내고 씩씩하게 뛰어다니는 장난꾸러기였지만, 실은 겁보였다. 그와 달리 동하는 유난할 만치 말이 없어서 답답하고, 물러 보였지만, 실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 강심장이었고.

“야. 이동하. 얼른 일어나 봐.”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에 놀라 동하가 눈을 떠보면, 경민이 침대 맡에 서 있곤 했다. 낮에 또 무언가 무서운 걸 본 모양이다. 그런 날이면, 경민은 홀로 잠드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럴 때 여느 집 아이들처럼 부모의 침실로 뛰어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경민은 자신의 큰 방만큼이나 부모를 무서워했다. 그런 그가 믿을 것이라곤, 아무리 귀찮게 해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유순한 동생뿐이었다.

“내 방에 가서 놀자.”

경민은 늘 그렇게 말했다. ‘무서워서 왔어.’라든지, ‘나랑 같이 자자.’ 같은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동하는 늘 한마디 말대꾸도 없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그리곤 경민의 방으로 건너가, 그가 꾸벅꾸벅 졸다가 쓰러져 잠들 때까지 놀아주다가 함께 잠들었다.

그런 다음 날이면 늘 엄마에게 혼이 났다. 자초지종을 물어 따지는 야단도 아니었고, 매를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를 몇 초간 강하게 쏘아보며 “앞으론 경민이 방에서 자지 마라.” 말하고 돌아서는 것뿐이었는데, 그 눈빛이 마치 뱀을 보는 것처럼 냉정했다.

엄마가 야단을 칠 때면 경민은 입을 꾹 다물고 딴청을 부렸다. 경민의 비겁함은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도 엄마를 무서워했으니까. 그러나 경민 때문에 엄마가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것만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먼저 간 거 아니에요. 경민이가 자기 방에서 놀자고 했어요. 난 가기 싫었어요.”

하루는 그렇게 항변한 적이 있었다. 일부러 경민 모르게 엄마의 방까지 찾아가서 한 고백이었다.

‘그랬구나, 엄마가 오해했네. 미안해.’ 같은 말들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저의 억울함을 위로해주기 위해 한 번쯤 안아주실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이전에 저를 보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경민이가 뭐라던, 네가 가지 않았으면 될 일이지.”

그날 이후, 동하는 절대로 경민의 방에 가지 않았다.

하루는 경민이 제 말을 따르지 않는 동하의 코를 세게 때렸다. 즉시 검붉은 코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동하는 끝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경민을 문밖으로 내쫓고, 방문을 잠가 버렸다. 열리지 않는 손잡이를 몇 번 잡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나쁜 새끼야!”

잠시 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민이 울고 있었다.

동하는 그게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매번 혼이 나는 것도 저고, 얻어맞아 코피가 터진 것도 저인데, 저 애는 뭐가 저렇게 억울해서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동하는 손등으로 코를 틀어막고 침대에 누워,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경민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경민의 울음소리가 멈췄다.

동하는 살며시 문고리를 비틀어 열어, 문 틈새에 살짝 눈을 붙였다. 그 틈으로 동하는 보았다. 파자마 차림으로 올라온 엄마가 서럽게 울고 있는 경민을 안아주는 것을.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반쯤 서서, 경민의 머리를 끌어다 품 안에 따듯하게 품어주는 엄마, 그녀의 눈에 피어오른 따듯한 온기를.

그날 목구멍 뒤로 넘어가던 찝찔한 맛의 정체가 코피였는지, 눈물이었는지, 동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불쾌할 정도로 묵직한 짠맛이었다는 것만이 기억날 뿐이다.

***

차에서 내린 경민의 눈이, 그를 향해 늘어선 사람들을 빠르게 훑는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도 몇 보였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 임원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경민이 다시 사람들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경민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진다. 이동하가 보이지 않는다. 자기가 오늘 몇 시에 여기에 도착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뜻이 분명했다.

‘이 개새끼가!’

만나서 반가울 것 없는 얼굴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저여야지, 절대로 그 자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 새끼에게는 절대 그런 선택권이 주어질 수 없다.

윤재화는 경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을 알아챘다. 차에서 내린 그가 제일 먼저 누구를 찾았는지 윤 전무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경민이 찾는 그 존재가 당당하게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몹시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다.

“부사장님. 들어가시죠. 다들 너무 오래 서 있습니다.”

윤재화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경민을 에스코트했다.

경민은 아래턱이 도드라지도록 어금니를 꽉 깨문 뒤, 발짝을 뗐다.

***

“강사님들, 잠깐 하던 것 좀 멈추고 이리 좀 와주세요.”

풀장으로 들어온 사무실 직원이 손나팔을 하고서 소리쳤다. 강의에 한창이던 사희와 정아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곧 어깨를 으쓱한다.

“무슨 일이에요?”

“잠시 후에 VIP의 수업 참관이 있으실 거예요. 아이들 잘 좀 단속해주세요. 소리 지르지 못하게. 돌발행동도 못 하게 하시고. 절대 VIP 심기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조용히. 얌전히. 입 꽉. 알았죠?”

직원의 말이 마치 아이들을 개처럼 묶어놓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기에, 사희는 이맛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우리 아이들이 하는 돌발행동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것까지 강제로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오늘 상태가 심한 애들은 먼저 보내요. 눈에 안 띄게.”

직원의 무성의한 대답에 사희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런 생각과 처사 때문에 노바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거, 잊으셨나요?”

사희의 불같은 성미에 대해서 익히 들은 바가 있는 터라, 직원은 즉시 태도를 바꿨다.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서 그래요. 굉장히 예민한 VIP라서. 제발 부탁 좀 할게요. 좀 살려줘. 혹시라도 사고 생기면 사무실 사람들 다 그날로 이거 될 수도 있어요.”

직원은 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사정한다.

씩씩거리는 사희 대신 정아가 대충 알았다고 대답하고 직원을 돌려보냈다.

“누군데 그러지? 바짝 쫄아 있네. 되게 중요한 사람인가 봐.”

“그게 누구든, 대통령이 온대도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사희는 떨고 있는 아이들의 몸을 타월로 덮어주며 이를 꾹 깨물었다.

***

“노바에서 새로 진행 중인 사회공헌 프로젝트 중, 그 첫 번째인 특수스포츠교육이 현재 안에서 진행 중입니다.”

대표이사의 안내와 함께 무리는 풀장 안으로 들어섰다. 소독약 냄새가 섞인 청량한 물 냄새가 코를 스친다.

안에서는 몇몇의 아이들이 강사의 지시에 맞춰 수영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귀청을 때리는 비명이 들려온다. 물에 떠 있던 아이가 물 밖으로 나가겠다고 지르는 비명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괴성이 수영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경민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 들자, 그의 반응을 민감히 관찰하던 수행원이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무리 중 하나가 다급하게 강습이 이뤄지고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무어라 이야기를 하자, 물속에 있던 강사들이 동시에 경민의 무리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그중 하나가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만류하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거의 뛸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무리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사 이사희라고 합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서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지금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인데, 긴장상태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발행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전 상황 역시 그런 것이고요.”

사희의 눈이 빛을 킨 것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하지만 지금은 교육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여러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저 아이들이 방해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를 조용히 시켜달라는 말씀을 지켜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자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사과였지만, 결코 사과가 아닌, 되레 엄포에 가까운 말이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 가운데 어디선가 풉, 웃음이 터진다. 사희는 고개를 들어 웃음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터트린 남자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사희의 눈이 커진다.

“이사희 강사님, 당돌한 건 여전하시네.”

경민이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놀란 여자의 얼굴을 빤하게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당겨진 새총처럼 팽팽한 생기가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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