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응접실 문을 가볍게 노크한 뒤, 세령이 안으로 들어섰다. 윤여화와, 윤재화 남매는 세령이 들어오자 하던 말을 잠시 멈추었다. 다소 심각한 얼굴이었다.
새벽에 이종학 회장은 갑작스런 발열과 통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심장 내막에 염증 소견이 있다는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 재입원했다. 엑스레이상 심장의 크기가 한눈에 보기에도 꽤 커져 있었다. 심장 수술 후, 이 같은 증상은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이 회장의 재입원 사실은 윤재화의 지시에 의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성급하게 반응할 주주들의 반응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숨겨질 일은 아니었다.
“질부, 잠깐 앉지.”
차를 내려놓고 돌아나가려던 세령을 윤재화가 잡았다. 세령은 그들에게서 되도록 먼 자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명우재단에서 새로 기획하는 사업부에 질부를 책임자로 앉히려고 해.”
명우재단이라면 혜석그룹 산하의 교육문화재단으로, 시어머니인 윤여화 여사가 이사장이었다. 세령은 본능적으로 윤 여사의 안색을 힐끔 살폈다. 그녀는 줄곧 세령을 외면하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녀 역시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변변치 않은 며느리의 존재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질색하는 윤 여사가 무슨 이유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없어서 세령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 안 하니?”
줄곧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윤 여사가 세령을 돌아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제가 어떤 일을 맡게 되나요?”
“장애아동들을 위해 특수체육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거야. 지금 노바에서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결이 같지. 물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겠지만.”
세령의 큰 눈이 움찔한다.
“현재 혜석에 대한 대중의 분위기가 우호적이지가 않아. 질부도 알다시피 그 원인에 외종손이 얽혀있지. 그러니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 자네가 되어야 하네.”
“…….”
“남 좋은 일 할 수는 없잖아. 회장님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도 뭘 좀 해둬야지. 이러다 회장님 노망나 갑자기 마음이라도 바꾸시면 죽 쒀서 개 주는 꼴 되지 않겠나?”
윤재화가 뭐가 우스운지 껄껄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세령은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굳게 마주 잡곤, 입 안의 연한 살을 씹었다.
“질부가 못하겠다면 다른 적임자를 찾아보겠네.”
“하겠습니다.”
세령은 윤재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빨리 대답했다.
세령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윤재화의 얼굴에 잠깐 의외라는 기색이 돌았지만, 표정은 금세 다시 밝아졌다.
“난 머리가 아파서 먼저 일어난다.”
윤여화는 더는 앉아있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쌩하니 응접실을 나가버린다.
윤재화의 제안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긴 하겠지만, 세령에게 혜석의 일원으로서의 어떠한 책임을 맡긴다는 것이, 그녀의 꼬장꼬장 자존심에는 도저히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자네, 이 집 사람이 된 지 얼마나 됐지?”
이를 꽉 물고 앉아있는 세령을 보며, 윤재화가 물었다.
“7년 됐습니다.”
“7년이면 오래 참았구먼.”
윤재화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마치 그녀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세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한 번의 선택이 때로는 인생 전체를 뒤바꾸기도 하지. 동하가 아닌 경민이를 선택한 것이 자네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었을 테고. 그런데 그게 어떻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저 운명의 장난이지.”
세령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윤재화. 그는 적인가, 친구인가.
7년 전, 동하가 경민의 잘못까지 뒤집어쓰고 언론의 사냥감이 되었을 때, 경민을 철저히 등 뒤에 숨겼던 사람. 경민을 위해, 동하를 하루아침에 한국 땅에 설 수 없게 만들었던 사람. 그가 윤재화였다.
그때는 적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이제 와선 제 비련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동지처럼 느껴진다니. 정말이지 인생이란 기막힌 모순이었다.
“자네의 선택에 죄책감도 후회도 갖지 마시게. 그런 나약한 감정으론 이 집에서 살아남지 못하네. 자네도 이제 살아야지. 떳떳하게 혜석의 사람으로.”
세령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지금,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가 적이든, 친구든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제게 손 내민 상대가 설령 적이라 해도, 살기 위해서 그녀는 그 손을 잡을 수 있었다.
***
잠을 설친 탓에 눈이 무겁다. 혓바늘 선 혓바닥이 뜨거운 모래를 문지른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경민은 비척거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지 꽤 되었다. 원래 불면증이 좀 있기는 했지만 근래는 그 정도가 심해져 이제는 약이 없으면 한 시간도 잠을 자지 못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실체 없는 공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지는 것에 비해 사업에서는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저를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주관한 사업의 실적들은 철저하게 점수화되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것이 끊임없이 선대의 경영방식과 비교를 당한다는 것은 경민에게 있어 엄청난 부담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 비교 대상에 이동하까지 더해졌다. 차분하게 성과를 쌓고 유연하게 위기를 탈피하는 이동하의 경영방식이 아버지와 똑 닮아있다는 것이 점점 더 그를 두렵게 했다.
어쩌면 나는 자질이 없는 사람일까? 경민은 패배감을 느끼고 있다.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제는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곁에는 이 막막한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저를 믿지 않는 아버지, 의무를 가혹하게 밀어붙이는 어머니, 도무지 속을 모르겠는 외숙, 평행선처럼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 아내, 마음을 닫은 아들, 그리고 권력과 돈이 사라지면 당장이라도 돌아서 버릴 타인들. 그 곁에는 오직 그런 사람들뿐이다. 그게 그를 못내 외롭게 하고, 무기력하게 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고약한 우울에 빠지게 한다. 우울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경민은 저를 향해 손톱을 도사린 현실을 외면하는 것을 선택했다. 세령의 연락을 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나 외면은 잠깐의 도피처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부채처럼 짐이 됐다. 그리고 그 부채 의식은 점점 그에게서 잠을 빼앗아 갔다.
담배를 꺼내는 팔이 욱신거린다. 혈관주사를 놓은 자리에 검푸른 멍이 들어있었다. 경민은 심드렁하게 담배를 물고 멍든 자리를 한번 문질렀다.
주사를 맞고 드는 잠에는 엄청난 중독성이 있다. 오래도록 뒤척일 필요 없이, 몇 초 안에 곯아떨어질 수 있고, 그렇게 드는 잠에는 꿈도 없었다. 몇 시간 시체처럼 눈 감았다가 깨어나면,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몸도 가뿐해진다.
문제는 그 개운한 기분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그의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져,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불쑥불쑥 분이 치솟는다는 것 정도.
그러나 그것도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살아있는 시간 대부분이 죽는 것보다 나을 것 없는데, 몇 시간이라도 산 것처럼 사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잠시 후, 고진영 실장이 도착했다.
“10시에 채용박람회 참석하신 뒤, 임원들과 오찬 가지시고 바로 NOVA 방문 일정이 이어지십니다.”
오늘의 일정과, 동향을 늘어놓는 기계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경민은 깔깔한 입에 밥 한술을 떠 넣는다. 입에서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경민은 숟가락으로 밥그릇을 쳐서 밀어낸다. 그 서슬에 주스 잔이 넘어졌다. 케일주스가 쏟아진 바닥이 꼭 누가 구토를 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잖아도 없던 식욕이 뚝 떨어진다.
“됐고, 라면 좀 시켜 봐.”
쪼그려 앉아 주스를 닦아내는 고 실장을 발끝으로 툭 치며 말했다. 갈수록 유난스러워지는 그의 변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고 실장은 즉시 그가 시키는 대로 라면을 시켰다.
잠시 후, 주문한 라면이 도착했다. 나무 뚜껑이 달린 일본식 전골냄비에 담겨 나온 라면에는 딱새우와 전복, 그리고 송이버섯이 올라 있었다.
“뭐야, 이건.”
경민은 그 위에 거창하게 얹은 것들을 신경질적으로 쳐내며 라면 한 젓가락을 들었다. 라면을 입에 넣은 경민은, 곧 씹은 것을 삼키는 대신 다시 그릇에 뱉어냈다. 곁에 서 있던 고 실장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고 실장. 일부러 나 맛있게 먹으라고 이런 거로 시킨 거지?”
고 실장을 돌아본 경민이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런데 나는 이게 별로 맛있지가 않네?”
“지금 바로 다시 해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이거는?”
“네?”
“그럼 이건 네가 먹으면 되겠다. 먹어 봐. 맛있는지.”
경민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고 실장 앞으로 툭 하고 던졌다.
잠시 후, 사방으로 날아간 젓가락을 주워든 고 실장은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씹다 뱉어놓은 라면을 망설임도 없이 집어 드는 고 실장을 보면서 경민은 피식, 웃는다.
“됐어, 새끼야. 농담이야. 조크!”
경민은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면을 집은 젓가락이 바르르 떨린다. 편백나무 쟁반 위로 굵은 물방울 두 개가 후드득 떨어졌다. 물보다 뜨겁고, 짠 것이 라면에 섞여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고 실장, 아들 쌍둥이들은 잘 크고 있어?”
욕실에서 경민이 악을 쓰며 물었다. 고 실장은 자신의 아이들은 딸 쌍둥이며, 이미 그 사실을 몇 번이나 일러주었음을 말해주려다 만다. 대신 어금니가 아프도록 이를 꽉 깨물었다 놓으며 대답했다.
“네, 잘 크고 있습니다. 매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