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본부장실로 들어온 사희는 반가워하는 동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저를 향해 내미는 그의 손대신, 소맷부리를 강하게 잡았다. 그리곤 이글거리는 눈으로 동하를 노려본다.
“무슨 짓이에요, 지금?”
동하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싸울 태세로 달려드는 여자를 본다.
“방금 홍보팀에서 오는 길이에요. 왜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런 일을 마음대로 계획해요?”
“아, 그거. 해요. 해서 당신한테 나쁠 거 없어요. 아니, 더 좋을 거야.”
“나 안 해요. 당신 회사 홍보 수단이나 되자고 그런 데 나가서 동정심 팔 생각 추호도 없어!”
사희의 관자놀이 부근에 핏줄이 또렷하게 솟아오른다. 그의 소맷부리를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동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금 내가 당신을 홍보에 이용한다고 했나?”
“그럼 아니에요? 뭐? TV 출연을 시킨다고? 이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요? 넙죽 엎드려서 절이라도 할 줄 알았어?”
몇 초간 여자의 노기 어린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동하가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럼, 평생 그러고 살 셈이야?”
“뭐라고요?”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앞으로 인생의 전성기가 끝났네 마네 비겁한 소리나 늘어놓고, 몸 부서져라 돈이나 벌면 끝이라 믿으면서 살 생각이냐고 묻는 거야.”
“……!”
사희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문다. 앙다문 입술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렸다.
“당신이 잃어버렸다는 인생의 전성기, 찾게 해주려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찾아.”
“……당신이 뭔데!”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네가 정하는 거지. 날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의 힘든 과거를 회사 홍보에 이용하는 양아치로 만들든, 쓰레기로 만들든 상관없이. 당신 원하는 대로 해.”
“…….”
“말했잖아. 복종한다고. 네가 정의 내린 결론, 순순히 받아들일게. 하란 대로 하겠다고.”
핏줄이 불거지도록 쥐고 있던 사희의 손가락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맹렬하게 치떴던 눈에 담긴 분노가 사라지고, 대신 눈시울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단단히 버티고 있는 사희의 곁으로 동하가 조금 몸을 기울였다.
“나는 믿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네가 네 스스로를 믿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거, 알아야 해.”
“…….”
“내가 널 아직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건 알겠어.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네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거. 이사희, 너, 가치 있어. 충분해. 차고 넘쳐. 대체 왜 웅크려있는 거야? 세상에 가시 돋친 채로 산다고 해서 자존심이 지켜지는 건 아니야.”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토록 순식간에 자신을 꿰뚫어 본 그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남자가 자갈밭 같던 인생에 나타난 것이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살면서 한 번쯤은 믿어보고 싶어 하는 운명의 상대라는 게, 어쩌면 영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철옹성 같던 벽을 허물어 버리고, 이사희의 세계로 거침없이 뛰어든 남자를 두 팔 벌려 안고 싶다.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영원히 어디로 가지 못하게 묶어버리고 싶다.
“……당신, 도대체 뭐야?”
동하를 바라보는 사희의 눈에서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거린다.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눈물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내가 뭐였으면 좋겠어?”
“…….”
“당신만 허락한다면 나, 당신이 언제라도 함께 걷고 싶어 하는 파트너가 되고 싶어. 부탁해, 이사희. 당신 옆에서 같이 걷게 해줘.”
사희는 대답 대신 동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답이 되었다는 듯, 동하는 한 품에 그녀를 안았다.
***
수영장 쪽으로 트인 글라스 월 밖에 선 동하의 시선이 느리게 사람들을 한 바퀴 훑는다. 안쪽에는 많은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하의 시선이 물처럼 흐르다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발걸음을 멈추고 글라스 월 쪽으로 반걸음 가까이 선다.
시선 끝에는 사희가 있었다. 내심 긴장하지 않은 척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까만 눈동자까지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촬영장 구석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다.
동하의 눈꺼풀이 살짝 찌푸려든다.
“원래 저렇게 사람을 하염없이 세워둡니까?”
동하의 질문에 홍보팀장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 아마 차례가 있어서 대기 중일 겁니다.”
“그럼 얼마나 저렇게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가 완전히 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원래 현장이란 게 계획대로 착착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오래도록 대기를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보시다시피 현장 스태프들의 일이 보통 고단한 게 아닙니다. 며칠 밤을 새는 것은 일도 아니고요.”
홍보팀장은 익히 알고 있는 현장의 상황에 대해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으며 젠 척을 한다.
그런데 왜인지 본부장의 얼굴이 점점 굳기 시작하더니 곧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그걸 지금 대답이라고 합니까?”
동하의 목소리가 매 발톱처럼 사납다.
“네?”
기습적인 질책을 받은 홍보팀장 온 얼굴이 숯불에 넣은 고구마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팀장님의 직원이 저기 저 스태프들입니까?”
동하는 일부러 좀 더 오래 사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마치 눈빛으로 고구마를 태워버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촬영장은 자기들끼리만 아는 암호 같은 단어들만을 쏟아내며 시끌벅적했다. 사희는 이리저리 지나가는 스태프들과 억지로 눈을 마주쳐보았지만, 그들 눈에 그녀는 늘어서 있는 촬영 장비 중 하나와 다름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사희에게 말을 거는 때는 그저 “잠시 후에 시작합니다”, 라는 전달을 할 때뿐이었다. 그리고 왜인지 그 약속은 몇 번이나 미뤄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한숨을 내쉬며 먼발치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녀의 시선 끝에 익숙한 실루엣이 걸렸다. 풀장의 글라스 월 너머에 동하가 있었다.
“어?”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만난 그의 모습이 반가워, 사희는 동하를 향해 저도 모르게 움찔, 손을 올릴 뻔했다가 얼른 황급히 허리 뒤춤으로 팔을 숨겼다. 그런데 반색을 하는 자기와는 달리 동하는 일행과의 대화로 바쁜 눈치였다.
사희는 잠자코 그 자리에 서서 동하가 자리를 알아보기를 기다렸다. 한참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동하의 시선이 이쪽으로 닿는 것 같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웃어 보일까?
그런데 남자는 사희를 본 것인지 만 것인지, 그냥 지나쳐 버렸다. 목이 빠져라 그쪽만 보고 있는 자기와는 다르게, 쌩하니 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이 서운했다.
“이사희 선수.”
한참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희는 저를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다. 터부성한 머리에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사희 앞에 서 있었다.
“네?”
“저는 메인PD 남주호라고 합니다.”
남자는 낡은 청바지에 손바닥을 쓰윽 닦더니 사희 앞으로 내민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당황했지만 사희도 얼른 남자가 했던 것처럼 옷 춤에 손을 닦곤 악수를 했다.
“이런 촬영은 처음이시죠? 작가들한테 대충 설명은 들으셨나요?”
“네.”
“예전에 아시안게임 때, 제가 참 팬이었습니다. 신문도 막 오려서 스크랩하고 그랬어요.”
평소라면 아시안게임에 ‘아’자만 꺼내도 불편했을 일이지만, 사희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빙긋 웃었다.
“오래전 일인데, 기억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연출자 뒤로 FD 하나가 의자를 하나 들고 엉거주춤 섰다.
“PD님, 이거요.”
“인마, 이런 건 미리미리 챙겨야지. 꼭 내가 일일이 말을 해야 되냐?”
PD의 꾸중을 받은 FD는 사희 앞으로 의자를 놓아주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배시시 웃는다.
“죄송합니다. 이사희 씨, 여기 앉으세요.”
“네?”
갑작스런 친절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희에게 PD가 빙긋 웃어 보인다.
“이동하 본부장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시던데요. 내 직원, 잘 부탁한다고.”
“네?
생각지 못한 말에 사희는 잠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앞으로 촬영하면서 어려운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하세요.”
PD의 목소리가 상냥하다.
사희는 또렷하게 피어오르는 분홍빛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뺨으로도 모자라 목까지 붉게 물들었다. 샐쭉 웃음이 난다. 좋다. 그의 힘이 주는 혜택이 아니라, 저 혼자서만 하염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던 게 아니고, 그 역시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