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전무님, 지금 확인해 보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윤여화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고진영 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속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하게 느껴졌다. 고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는 늘 이경민 부사장님의 일과 연관이 있었던 바, 윤재화도 본능적으로 긴장의 끈을 당긴다.
“무슨 일이 있나?”
-지시하셨던 대로 이사희 강사를 마킹하던 중에 알게 된 내용입니다.
“부사장과 관련된 건가?”
-그건 아닙니다.
윤재화의 표정이 일순 시들해진다.
오늘은 여러모로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자신을 향한 윤여화의 절대적인 신뢰를 재확인 한데다, 그녀 몫의 혜석 지분까지도 약속을 받은 지금으로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차근차근, 그리고 조심조심 자신의 계획을 실천해나가기만 하면 될 일. 성공적으로 첫 삽을 뜬 오늘, 들뜬 기분을 이런 영양가 없는 통화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다음에 하지.”
윤재화는 귀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대체 뭔데 그러나?”
눈치 없이 말을 잇는 고 실장을 향해 윤재화는 조금 짜증을 냈다. 그런데 그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이동하 이사가 커넥팅 되어있습니다.”
자동차 시트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윤재화가 바짝 몸을 일으켜 세운다.
“뭐?”
“두 사람이 연인관계인 것 같습니다.”
윤재화의 주름진 눈꺼풀 속 회색 눈동자가 하이에나처럼 번쩍 빛난다. 기이하게 비틀린 그의 미소가 환희를 말하고 있었다.
***
“TV 출연이요? 어떤 프로그램요?”
정아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되묻는다. 곁에 앉은 이사희의 표정도 비슷하긴 매한가지였다.
“예능.”
놀라는 그녀들과는 다르게 홍보팀장은 성의 없게 대답했다. 이 젊은 팀장은, 근래 본부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깨에 날개가 돋아, 마치 발을 땅에 딛지 않고도 걸을 수 있을 것처럼 거만하게 굴었다.
“어머! 진짜요? 그럼 우리가 거기 나오는 거예요?”
정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가 너래? 너 말고, 이사희 말이야.”
무안을 주는 팀장의 말에 정아는 아랫입술을 뚜하고 내민다.
사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저는 왜요?”
“이유가 중요해? 지상파 프로그램이야. 그것도 시작부터 대박 난 프로.”
“그쪽에서 이유도 목적도 없이 섭외를 하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과하게 미백한 치아가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남자는 거슬린다는 듯, 눈썹을 휘어 뜬다.
“피곤하게 뭘 그렇게 따져.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나가면 되지. 얼굴도 알리고 좋잖아.”
사희는 TV 프로그램 출연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팀장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쎄요. 우리 가문은 그런 걸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아서요.”
팀장의 이맛살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의 눈빛에는 또박또박 따지고 드는 여자가 괘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프로가 인생 실패의 쓴맛을 본 사회적 약자들이 스포츠를 통해 갱생하는 목적의 프로그램이라지? 이만하면 왜 이사희였을지 감이 오지 않아? 부상으로 불명예 은퇴한 국가대표에, 대표선수들 코치도 못됐고. 게다가 현재는 평범한 수영강사. 여러모로 스토리텔링이 되잖아.”
일부러 ‘실패’, ‘갱생’, ‘불명예’ 같은 단어를 골라 일부러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 팀장은 뻣뻣하게 굳는 사희의 얼굴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분한 듯 어금니를 꽉 깨물던 사희는 곧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냈다.
“그럼 전 안 되겠네요. 스포츠 하다 망한 사람이, 스포츠로 무슨 갱생을 하겠어요? 제 거절의 뜻은 팀장님께서 잘 전달해 주세요. 정중하게. 존댓말로요. 우리한테 하듯 예의 빠트리지 마시고.”
사희는 까딱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이 다급한 것은 팀장이었다. 이사희가 수락을 해야 홍보팀 실적이 올라가는데, 그녀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팀장이 다급하게 사희를 불러 세웠다.
“이사희 씨! 이거, 본부장님께서 연출자에게 직접 제안한 거예요. 무료로 장소 제공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이 강사가 거절하면 노바, 큰 손해예요.”
사희의 걸음이 우뚝 자리에 멈춰 선다. 심장이 쿵쿵, 폭발적으로 뛰고 있었다.
***
프레젠테이션 내내 경민은 몸은 여기에 있지만, 영혼은 저 멀리에 가 있는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세상만사가 지루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근래 경민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다.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으나, 스스로 노력한 것은 어떤 것도 손에 쥘 수 없는 이경민. 눈 가리고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모순적인 삶의 급소에 세령이 비수를 박아 넣은 후, 그의 우울감은 한층 더 심해졌다.
‘네가 원하는 거, 너는 영원히 못 가져.’
눈을 뜨고 감은 모든 순간마다, 그에게 저주를 퍼붓던 세령의 목소리와 차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이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발표자가 말을 조금 더듬는다. 준비한 자료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 듯했다. 당황한 발표자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땀이 쏟아져 내린다.
경민은 스캔이라도 할 기세로 빤히 그를 보며 입을 연다.
“지금 뭐 해?”
“죄,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자료에 약간 문제가 발생해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됐으니까 집에 가.”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경민에게로 집중된다.
“가라고. 그리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 너, 그렇게 대충 일하라고 내가 돈 주는 줄 알아?”
“부사장님.”
윤재화 전무가 낮은 목소리로 경민을 말린다. 경민은 쯧, 혀를 차곤 말릴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재화는 경민을 뒤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경민은 재킷 단추를 풀고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으며, 굳어있는 외숙의 얼굴을 본다.
“왜요, 내가 또 잘못했나? 걔가 프로답지 못했던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 친구가 프로답지 못했습니다.”
윤 전무가 그렇게 바로 수긍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경민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평소라면 온갖 잔소리와 충고를 늘어놓으며 일장 연설을 하고도 모자랐을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윤재화는 경민의 대각선 자리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두 손을 정중하게 모아 허벅지 위에 올렸다.
“요즘 어디서 지내십니까?”
“몰라 물어요? 난 외숙이 나에 대해서라면 머리털이 몇 개인지도 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고정된 거처를 정해서 지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호텔은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요즘도 잠드는 게 어려우십니까?”
지독한 피로가 내려앉은 경민의 거뭇한 눈 밑을 넌지시 보며 다시 물었다. 경민은 저를 꿰뚫어 보는 윤재화의 눈을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주 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말 말고, 일 이야기나 하세요.”
“이동하 이사가 홍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노바부터, 개인 이미지 메이킹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여기에 영업이익까지 오른다면 주주들도 점차 그를 신뢰하게 될 겁니다.”
경민의 얼굴이 못마땅한 듯 일그러졌지만, 뭐 하나 반박할 수 있는 구석이 없었기에 그저 똥을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 분위기를 우리 쪽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조금 구미가 당기는지 경민이 넌지시 묻는다.
“어떻게요?”
“노바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본사가 투자를 하는 겁니다. 판을 키우는 거죠. 결론적으론 노바의 성과가 아니라 혜석의 성과, 이동하의 성과가 아니라 이경민 부사장의 성과가 되게 할 겁니다.”
경민이 코밑을 슬쩍 문지르며 눈썹을 찌푸린다.
“그러니까 나보고 이동하가 깔아놓은 판에 발을 담그라?”
“아니죠. 부사장님께서 빼앗는 겁니다.”
윤재화는 경민 앞으로 들고 들어온 서류를 꺼내 펼쳤다. 그리곤 흰 종이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일단은 이것부터입니다. 자폐아동 회원가입 거부로 문제가 됐던 일을 사과하는 의미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사회적 사업으로 홍보되어, 노바를 착한 기업으로 만들었어요. 대중들의 심리를 잘 주물렀죠. 이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지원해 혜석 전체를 착한 기업 이미지로 만들 겁니다.”
나쁜 생각은 아니라는 듯, 경민의 눈빛이 호응을 하는 듯했으나 여전히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알아서 하세요.”
서류를 손끝으로 밀어내며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경민을 보며 윤재화는 조금 웃었다.
“노바에 한번 방문하시죠. 우리가 무엇을 가져올 수 있을지 직접 확인도 해보실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