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윤여화는 음식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심드렁하던 식사를 멈추고 와인만 한잔 더 비웠다.
부드럽게 요리된 농어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재화는, 그녀가 잔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술을 채워주었다.
“재화야, 기억나니? 우리 언젠가 아버지 몰래 술 훔쳐다 마시고 취해서 거의 죽었다 살아났던 거.”
“어떻게 기억 못하겠어요. 그때 누님이 포도 주스라고 속이고 내게 술을 줬잖아요. 그때 누님은 대학생이셨지만 저는 미성년자였습니다. 누님이 제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하셨는지 알아요?”
과거를 회상하는 윤재화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그때, 아버지 반응은 기억나?”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그때 기억 때문에 저는 지금도 와인은 별롭니다.”
그의 너스레에 윤여화는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술은 아버지 성공의 상징이었으니까. 혜석백화점 회장이 기천만 원짜리 술을 들고 찾아와 허리 굽혀 인사했을 때, 아버지는 본인의 완벽한 성공을 확인하셨겠지. 그런데 그걸 훔쳐다 마셨으니 화가 날만도. 취해서 눈도 못 뜨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밤새 얼마나 소리를 지르시던지…….”
“그래도 누님은 맞지는 않으셨잖아요. 저는 거의 반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고요.”
윤재화는 그때 호되게 맞았던 뺨따귀의 얼얼함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듯, 진저리를 치는 시늉했다.
“차마 나를 때릴 수는 없었겠지. 아버진 그 술 한 병에 딸을 팔아넘겼으니까……,”
낮게 읊조리는 윤여화의 목소리에서 짙은 씁쓸함이 느껴졌다. 윤재화는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았다. 윤여화는 와인 잔의 스템 부분을 손으로 느리게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그때 나 같은 여자들의 숙명이었다지만. 재화야, 나는 그 결혼이 하기 싫었어.”
“…….”
“내 정혼자가 정재계에 딸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탐을 낼만큼 근사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이지 그 결혼이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럼 끝까지 싫다고 하지 그랬어요.”
이제 와선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최대한의 위로였기에 윤재화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랬어야 했는데…….”
말끝을 흐린 윤여화는 술잔에 남은 술을 모두 비웠다. 입술에 묻은 적포도주의 흔적을 닦아내는 손이 굼뜨다. 그녀는 이미 취한 상태였다.
“그만 일어나십시다. 취하셨어요. 모셔다드릴게요.”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야.”
윤여화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씁쓸하게 말을 흘렸다. 이는 윤재화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부모들에 의해 억지로 약속이 잡힌 자리, 그것도 양쪽에 양가 부모까지 앉혀놓은 지옥 같은 자리에서 윤여화는 무심한 눈빛의 그 남자, 이종학을 처음 만났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준수한 외모의 남자였다.
부모들이 떠나고 두 사람만 남겨진 어색한 자리. 묵묵히 커피를 마시는 남자에게 윤여화는 말했다.
“이런 식의 결혼은 옳지 못하다고 봐요.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구.”
그러자 찻잔을 굴리던 이종학이 답했다.
“옳지 못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조선 시대는 아니어도 그때와 지금을 관통하는 이 세계의 룰이라는 게 있으니까.”
워낙 감흥이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기에,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입장일 거라 생각했던 윤여화는 생각지 못한 답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그쪽은 나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건가요?”
“어차피 누구와 하던, 내가 하게 될 결혼의 색깔은 비슷할 겁니다. 그런 거라면 부모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하는 편이 최선 아니겠습니까?”
“허…….”
굴욕감이 훅하고 끼쳐왔다. 그러나 분해서 이글거리는 윤여화의 눈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며 이종학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난 이 결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쪽. 만난 여자 중 가장 미인이기도 하고요.”
“이봐요!”
“이 세계의 룰을 깨트리려면 큰 각오와 용기가 필요할 겁니다.”
“…….”
“내게는 없는 용기가 당신에게는 있는 거라면, 존중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세 번 정도 더 의무적인 만남을 가졌다. 낭만은 없지만 철저한 예의가 있었고, 날뛰는 감정은 없었지만 정중한 절차가 있는 만남이었다.
그를 만나고 있는 동안은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상하게도 내내 그가 생각났다. 분했던 첫 감정이 조금 지나서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대한 동정심으로 변했고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는 그 남자와 있는 갑갑한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누구와 하던 자신의 결혼은 비슷한 색깔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룰 밖으로 뛰쳐나갈 만큼의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윤여화는 결심했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겠노라고.
그들은 도합 네 번을 만나고, 석 달 뒤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이 치러진 그 날, 호텔은 화환을 다 수용할 수 없어, 나중엔 보낸 이의 이름이 적힌 리본만을 벽에 매달아 놓아야 했다.
턱을 괸 윤여화의 뺨 밑에 짙은 우울감이 내려앉았다.
“늘 차갑던 그 사람의 눈에 온기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직감했어. 여자가 생겼다는 걸.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어. 어쩌면 나는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아버지에게도 늘 여자가 있었다. 어머니가 내색하는 일은 없었지만 윤여화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외부의 공식 모임에는 자신의 부인을, 사적인 자리에는 내연녀들을 대동한다는 것을. 그것이 이 세계에서는 일종에 능력 표시의 일환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그랬기에 이종학의 외도도 그런 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 말고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결혼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가진 귀한 아이였다. 시어머니가 손수 받아온 길일에 성실히 합방을 하고 들어선 아이.
그런데.
“소윤혜가 임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됐지. 내 애와 같은 주수에, 그것도 사내아이를.”
남편이 그녀에게 큰 집을 사주었다는 것,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낸다는 것 등등, 수많은 것들을 알고도 태연했던 윤여화를 돌연 분노케 한 것은 소윤혜가 ‘아들’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종학이 그 아이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사랑이 아닌 양가의 이득을 위해 한 결혼이라 하더라도, 부부는 부부였다. 그랬기에 서로에게 마땅히 지켜야 하는 예의와,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이종학은 기어이 그 선을 넘었다.
그의 여자는 참을 수 있었으나, 그들의 아이까지 용인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윤여화를 격노케 한 것은 그들의 어리석은 사랑이 만든 무책임한 결과물이 훗날, 자신의 아들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숙명이라 여기고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분노가 폭발했다.
“무엇이 그 사람을 가장 괴롭게 하는 일인지를 생각했어. 그리고 무엇이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인지도 생각했지. 그래서 그 애를 데려온 거야.”
소윤혜는 아이를 낳고,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지병이 있었다고는 하나, 윤여화는 그녀의 병이 무력하게 아이를 보내야 했던 처지에 대한 비관, 아니면 끝내 자신이 속한 세계를 탈출하지 못하고 굴복했던 남자에 대한 실망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그녀가 처음부터 그렇게 한철을 살다가 낙화하는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그 애는 내가 낳은 아이가 되어, 내 밑에서 컸지. 나를 친모라고 믿으며. 그러나 그 애는 한 번도 친모라고 믿었던 그 여자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 난 알아. 그 애가 얼마나 애정에 굶주렸는지를.”
윤여화는 차갑게 끌끌, 웃었다.
“그게 내가 이종학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어.”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난처럼 꼿꼿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회한이 섞인 눈빛으로 물끄러미 먼 곳을 보다가 흡, 숨을 들이켰다. 그 바람에 그녀의 가슴이 잠깐 들썩였는데, 그게 꼭 흐느낌 같았다.
“이종학을 보면서 나는 매일 다짐한다. 편하게 죽게 두지 않겠다고. 죽는 그 날까지, 마지막 그 순간까지 괴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윤여화는 후련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재화를 보았다.
“재화야.”
“네, 누님. 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주마. 뭐든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니…… 내 아들. 우리 경민이를 지켜다오.”
윤재화의 눈썹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온갖 복잡한 감정이 그의 눈동자 위로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그는 어색하게 볼을 떨며 조금 웃었다.
“누님. 약한 소리 마세요. 왜 이렇게 초조해하십니까? 동하가 지금 아무리 날고 긴대도, 잠깐입니다. 사람들 관심 얼마 못 가 사라져요.”
그러나 윤여화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윤재화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충혈된 눈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강하게 목소리를 짓누른다.
“절대로 동하가 그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해. 어서.”
윤재화는 잠깐 사이에 수분이 다 빠져나간 듯 까칠해진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가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걱정 마세요, 누님. 절대로 동하에게 혜석을 내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