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그날 저녁, 동하는 사희의 식구들과 다 같이, 어색하기에 더욱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고급 중식당에서 값비싼 백주를 곁들인 만찬에 어른들은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우리는 먼저 들어가서 쉴게. 수아가 졸린가 봐.”
식당을 나온 강희가 일부러 뒷걸음을 하며 말했다.
“엄마, 나 안 졸린데.”
“아니야, 너 분명히 졸려.”
강희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말대답하는 수아의 손을 끌고 종종걸음을 친다. 엄마의 손에 잡혀 따라가던 수아가 사희를 돌아본다.
“이모는 같이 안 가?”
“응, 이모는 아저씨랑 조금 더 논대.”
“나도 아저씨랑 같이 놀고 싶은데.”
“아저씨가 네 친구야? 이모 친구지.”
강희는 자꾸 토를 다는 수아를 번쩍 들어 안는다. 그리곤 발이 안 보이게 부리나케 뛰어가기 시작했다. 모녀의 귀여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동하와 사희는 조금 웃었다. 동하의 팔이 사희의 허리에 감겨 온다. 그가 마치 오랜 습관처럼 익숙하게 사희를 안았으므로, 사희도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조카가 걱정되면 돌아가도 돼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티 나나?”
“많이.”
“그럼 내가 지금 뭘 하고 싶은지도 보여요?”
“나랑 뒹굴고 싶어요?”
사희가 묻고, 동하는 웃는다. 그는 부러 게슴츠레 눈을 뜨며 목소리를 한껏 낮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어떤데요? 당신도 나랑 뒹굴고 싶나?”
“어때 보이는데요?”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어. 난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니까.”
이번엔 동하가 대답하고, 사희가 웃었다.
“좀 걸어요, 우리.”
사희는 동하의 몸에 다정하게 기대 이슥해진 가로수 길을 걸었다. 지나는 사람 하나 없는 길은 조용했다. 가로수의 나뭇잎에서 뿜어져 나온 수액이 안개처럼 몸에 감겼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사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보다는 왜 내게 아무런 말도 없이 휴가를 냈는지부터 묻고 싶은데? 다른 놈이랑 휴가 간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미친 듯이 달려왔는지 압니까? 아무튼 경고하는데 행여나 그런 일 생기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거예요. 내가 진짜 미칠지도 모르거든.”
“내가 다른 놈이랑 휴가를 간다고?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잖아.”
“내가 언제요?”
사희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치뜨며 되물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내가…… 당신에 대해서 알면 안 되는 거야? 우리 아직 그런 이야기 나눌 사이가 아닌가?”
사희는 아련하게 둥글어진 시선으로 서운해하는 동하의 이목구비를 느리게 훑는다.
“나 정말 많이 좋아하는구나, 본부장님.”
“본부장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너무 먼 것 같으니까.”
사희는 발꿈치를 들어 성을 내는 남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찍었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동하가 투덜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뜬다.
“뭡니까, 갑자기?”
“한 번 더 해줄까요?”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나 동하 씨 좋아해요, 많이.”
사희가 동하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으며 그의 뺨에 얼굴을 묻었다. 사희의 한마디에 동하의 화는 눈처럼 녹았다. 졌다는 듯 한숨을 쉰 동하는 사희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하여튼 얄미워. 내가 어쩌다 이런 말 안 듣는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왜 좋아하게 됐는데?”
사희가 남자의 가슴에 묻었던 뺨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젊고 예뻐서?”
동하의 장난스런 대답에 사희는 그의 허리춤을 아프도록 꼬집는다.
“그렇게 정떨어지게 솔직할 건 없잖아요.”
“사실이야. 당신은 너무 예뻐. 위험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남자들로 하여금 뜨거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지. 혹시 귀에 거슬리나? 그럼 멈추고.”
사희는 오른쪽 입가를 당겨 미세하게 웃는다. 맹렬한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알고 싶다. 저 이가 나의 어떤 모습에 뜨겁게 타올랐는지, 그 은밀하고 솔직한 이유를.
“아니, 어디 한번 해 봐요. 좀 더 노골적으로.”
“진심이야?”
“하라면 할 것이지, 왜 이렇게 몸을 사려요. 하라니까.”
사희가 빠르게 속삭였다. 동하는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더니 사희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빗어 내렸다. 곧, 그녀의 귓가에 묵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령, 이런 거야. 눈앞에 있는 여자가 마음에 들면 남자는 종종 이성을 놓쳐. 점잖게 타이를 매고 앉아서도,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 여자의 벗은 몸을 상상하지. 그리곤 또 생각해. 섹스를 하면 어떨까. 아, 로맨틱한 건 기대하지 말아요. 일단은 당장 그 여자, 옷을 벗기는 것도 급하니까.”
동하의 농담에 사희는 몸을 비틀며 키킥, 웃었다.
“그런 다음은? 질척하게 지분거리나요? 더듬고, 만지고, 주무르기 시작해?”
“아무래도 나, 지금 좀 말려드는 기분인데?”
동하가 사희를 품에서 조금 떨어트리더니, 마치 억울한 것처럼 눈썹을 내려 뜬 채로 우는소리를 한다. 사희가 손을 뻗어 동하의 턱 밑을 살짝 어루만진다.
“나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요?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고 싶었어?”
“이 상황에 가장 모범적인 대답은, 나는 다른 놈들이랑은 다르다고 대답하는 거겠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사희의 대답을 들은 동하가 그녀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귀가 간지러울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네 옷을 만 번도 더 넘게 벗겼어.”
피가 더워진다. 저속한 말이 주는 은밀하고 퇴폐적인 쾌감은, 듣는 이로 하여금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만든다.
사희는 동하의 가슴팍에 몸을 바짝 붙였다. 가슴이 일그러지도록 밀착해 동하의 허리를 꽉 끌어안자 단단하게 부푼 그의 사타구니가 느껴졌다. 사희가 무릎을 조금 세우자 허벅지에 동하의 단단해진 남성이 닿았다. 흐음, 동하에게서 목구멍을 긁는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언제까지 생각만 하고 있을 거예요?”
사희의 도발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며 동하가 물었다.
“유혹이야?”
사희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명령이야.”
***
뜨거운 정사를 마친 연인이 잠의 문턱에서 나른한 대화를 나누는 새벽 시간.
“오늘 고마워요. 이렇게 좋은 데 데려와 줘서. 난 기껏해야 기차여행 정도 생각했는데. 덕분에 즐거웠어요.”
“먼저 알았으면 이보다 더 좋은 데로 갈 수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론 미리 말해요. 나중에 알고 헐레벌떡 뛰어오게 하지 말고.”
“일부러 말을 안 한 건 아니었어요.”
사희는 동하의 단단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 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참 의미 없는 손짓을 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던 사희가 어렵게 운을 뗀다.
“언니가 아파요.”
동하는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는 사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의 커다란 눈 가득 깊은 슬픔이 번져있었다. 상처에 소금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던 사희는, 곧 천천히 말을 잇는다.
“자살을 하려고 했어요. 몰랐는데…… 몇 번이나 그랬대요. 그래서 지금은 수아도 키울 수 없고……. 언니가 형부랑 안 좋게 이혼했거든요. 그런 이야기들을…… 당신한테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하고 싶지 않았어.”
쥐어짜 내듯 하는 목소리 끝이 떨린다.
“너무 쪽팔리잖아…….”
사희는 일부러 거칠게 말하며 억지로 조금 웃어 보였지만 곧 시들해졌다.
동하는 고개 숙인 사희의 턱을 손끝으로 조금 일으켰다.
“누구에게나 어두운 부분은 있어. 내게도 있고.”
“당신한테도 그런 게 있어?”
사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누가 더 쪽팔릴지 하나하나 까서 이야기 하다 보면, 아마 내가 당신 이길걸?”
사희의 눈빛이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조금 흔들렸다.
“거짓말…….”
“그래도 넌 이야기하잖아. 이렇게 용감하게. 난 그런 것도 못해.”
동하는 윤곽이 또렷한 아름다운 입술을 당겨 씁쓸하게 웃는다. 사희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순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슬픔이 머물렀다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언젠가, 나도 너처럼 이렇게 용감하게 네게 털어놓을 수 있을 날이 올 거야.”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요. 그 마음 이해하니까.”
“아니, 하고 싶어질 것 같아. 들어주는 사람이 너라면.”
동하는 따듯하게 웃으며 사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검은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크게 일렁였다. 그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희는 얼른 그를 기분 좋게 할 말을 떠올렸다.
“수아가 당신 좋아해요.”
“그래?”
“아까 나한테 귓속말로 그러던데? 동하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것 같다고. 수아 안목 믿어도 돼. 심미안이라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거든.”
“그건 이모를 닮았네.”
“어머, 거기서 왜 내가 나와요?”
“아니야? 당신이 당신 입으로 말했었잖아. 내 껍데기가 유별나게 근사해서 관심 가졌다고.”
“뭐 그렇긴 하지만 꼭 그런 것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래. 그것만은 아니겠지. 얼굴만 잘생겼나? 몸도 좋지. 매너도 좋지. 돈도 많고. 무엇보다 매번 오르가슴을 주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고.”
“아, 뭐야!”
능청스런 동하의 대답에 사희는 쑥스러운 듯 동하의 가슴을 툭 때린다.
“아니야?”
“몰라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그래야 더 좋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사희는 남자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광대뼈를 들썩이며 피식 웃은 동하가 사희의 볼을 살짝 잡았다.
“앞으론 이보다 더 좋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럼 난 뭘 하면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넌 이미 날 그렇게 만들고 있으니까.”
하루하루 어제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까.
동하는 사희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리곤 물 흐르듯 눈가와 콧날 뺨과 입술에 차례대로 키스했다. 따듯한 눈으로 사희를 바라보면서, 동하는 낮고 분명하게 말했다.
“사랑해. 사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