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동하는 오늘 아침 막 홍보팀과 협의를 끝낸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프로젝트팀을 불렀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이사희가 오지 않았다.
“휴가라고요? 휴가를 갔단 말입니까?”
동하의 눈썹이 날 선 각을 만들며 꿈틀거렸다.
정아는 동하의 예민한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갑작스럽게 소집된 회의에, 사희가 참석하지 않은 것을 몹시 의아해하는 것 같기에 사실을 전했을 뿐인데, 그의 반응이 몹시 민감했다. 심지어 표정에는 괘씸하다는 기색까지 어려 있었다.
프로젝트의 전결권이 본부장에게 있다고는 하나, 직원의 개인 휴무 같은 것은 팀장 선에서 결정이 되는 일이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괘씸해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정아는 당황스러웠다.
“꼭 이사희 강사가 있어야만 진행할 수 있는 회의인가요?”
“아, 아닙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동하는 당황하는 정아의 표정을 보고서야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음을 자각했다. 급하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긴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미심쩍은 기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휴가인데, 왜 내게 말을 안 했지?’
그녀가 반드시 그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 어제 집 앞에 잠깐 얼굴을 보러 들렀을 때도 그녀는 오늘 휴가를 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은 금요일. 주말 붙여 하루를 휴가 냈다면 3일이나 쉰다는 것인데, 그렇게 만든 여유시간을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니, 섭섭했다.
“이 건은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야겠군요.”
동하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다시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온 동하의 얼굴을 보자 정아도 곧 의아해하던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슬쩍 농담을 건넨다.
“전 본부장님께 혼나는 줄 알았어요. 바쁜 시기에 휴가 썼다고.”
“휴가는 직원의 권리인데 내가 뭐라고 화를 내겠습니까. 전혀 그런 거 아니니까 휴식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쓰세요.”
“제 생각에 휴가는 본부장님께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나요?”
동하는 저를 빤히 보는 정아의 시선을 느끼고 볼을 스윽 문지른다.
“네, 소문났어요. 본부장님 지독한 워커홀릭이시라고.”
“아, 뭐…….”
동하는 머쓱한 듯 조금 웃었다. 정아는 본부장이 단단한 경계를 무너트리고 웃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그게…… 본부장님께서 먼저 좀 쉬어주셔야, 아랫사람들도 휴가 낼 때 눈치가 덜 보이지 않을까……요?”
동하는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는 듯 조금 이맛살을 찌푸린다.
“직원들이 내 눈치를 봅니까?”
“아무래도 안 볼 수는 없죠.”
“음, 글쎄요. 그렇다기엔 이사희 강사님은 전혀 내 눈치를 보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동하는 사희에 대한 섭섭함을 다시금 느끼며 일부러 조금 비꼬아 말했다.
“이사희 강사, 이번 주 내내 야근했어요. 얼마나 열심히 일했다고요. 요즘 어린 친구들 쿨하잖아요.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고.”
정아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본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사희를 두둔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사희가 몇 주간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는, 누구보다 동하가 잘 알고 있었다. 살짝 마음이 누그러든 동하는 다시 멈췄던 손을 움직이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요. 열심히 일했으면 확실하게 쉬는 게 맞죠.”
“네, 그러잖아도 이 강사 확실하게 쉴 거예요. 여행 간다고 했거든요.”
“여행이요?”
“네, 아마 남자친구랑 같이 갔을 거예요.”
동하는 목 뒤에서 뜨끔하고 정전기가 튀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친구라니. 이게 무슨 소리죠? 이사희 남자친구는 지금 당신 앞에 앉아 있는데?
그러나 정아는 그가 어떤 기분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싱글싱글 웃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썸남이 있었거든요. 요즘 잘 되어가는 분위기였는데. 여행까지 가는 것 보면 빼박이겠죠?”
동하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은 알지 못하고 수다스럽게 떠들던 정아는, 말을 다 쏟아내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입을 가리며 ‘어머나, 제가 너무 주책이었네요.’ 하곤 돌아나갔다.
동하는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더 이상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하게 만년필을 주물럭거리던 동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이 여자,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
어디선가 울리는 진동을 느낀 수아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소리는 이모의 가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잠깐 꺼지나 싶었던 전화는 잠시 후, 다시 걸려왔다.
전화기를 꺼내 보니 액정화면에 ‘본부장님’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받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부들거리는 전화기를 들고 수아는 잠시 망설인다. 엄마는 잠시 화장실에 갔고, 이모는 아까부터 뭐가 그리 분주한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수아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사희, 어디야!
다짜고짜 버럭 하는 남자의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수아는 전화기를 떼고 다시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다.
‘본부장님.’
수아는 입술을 빼죽 내밀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곤 성이 난 듯한 전화 너머 상대에게 순진하게 물었다.
“이름이 본부장이에요?”
***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자, 언니와 수아는 벌써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설렘,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으로 언니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언니는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면서도, 또다시 나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이미 한참 전에 퇴원을 권고받았음에도 오래도록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오늘에 다다른 것이다.
사희가 언니와 여행을 계획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니가 돌아갈 이 세상에 아름다운 구석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반대하는 형부를 설득해 수아도 데려왔다.
오랜만에 딸을 보아서인지, 언니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사희는 병실 입구에 서서, 똑 닮은 모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언니는 수아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곤 짧은 머리를 솜씨 좋게 땋아주고 있었다.
“빠진 것 없이 다 잘 챙겼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사희는 부러 부산스럽게 가방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사희야,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병원을 나오며 언니가 물었다.
“기차 타고 바다 보러 갈 거야. 가서 조개구이도 먹고. 수영도 하고.”
사희의 대답에 언니와 수아의 표정이 동시에 밝아진다.
세 사람이 여행계획을 이야기하며 병원 문을 나서는데, 그들 앞으로 차 한 대가 급하게 섰다. 브레이크 소리에 놀란 사희가 매너 없는 운전자를 향해 무어라 한마디를 할 참으로 얼굴을 구기는데, 차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내렸다.
“이사희!”
찡그려있던 사희의 얼굴이 일순 반반하게 펴지고, 동시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치 두 발로 뛰어온 사람처럼 다급해 보이는 얼굴. 동하였다. 짐짓 섭섭한 표정을 해 보이지만, 사희를 보자 미처 숨기지 못하는 반가움에 바로 환하게 밝아지는 수려한 눈빛. 태양을 머금은 듯 빛나는 그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다.
***
수아는 천부적인 개헤엄을 선보여 수영장을 얼추 건너더니, 물 밖에서 저를 보고 있는 가족들을 향해 번쩍 손을 들었다.
“엄마! 이모! 나 잘하지?”
사희와 강희는 손뼉을 치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수아 참 잘한다, 그치? 꼭 어릴 때 너 보는 것 같아.”
자랑스러움으로 물든 눈으로 딸애를 보면서 언니가 말했다.
“그 피가 어디 가나.”
사희도 웃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사희가 도착점까지 빠르게 헤엄쳐 가서 가슴을 쭉 펴고 우쭐해 할 때면,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박수를 쳐주곤 했던 언니.
「언니! 봤어?」
「응, 봤어. 여기에서 보니까 너 꼭 인어공주 같아.」
「인어공주 싫어. 왕자 때문에 죽잖아. 바보같이. 나 공주 말고 그냥 돌고래 할래.」
「그래, 그럼 돌고래 하자.」
사희는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이 괴로워 애써 지우고 살았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모든 날이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마, 언제고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던 언니가 있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희는 슬그머니 언니의 손을 잡았다. 강희는 제 손을 붙잡는 사희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인다.
“고마워, 사희야.”
“고마우면 나한테 잘해. 앞으론 쓸데없는 생각 말구. 알았지?”
사희는 언니의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다짐을 받는다.
“응, 알았어.”
강희는 토끼 같은 대문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수아는 다시 이쪽으로 열심히 헤엄을 쳐서 돌아오더니 이번엔 물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동하를 향해 소리쳤다.
사희는 “아저씨, 나 봤어요?” 묻는 수아와, “응. 정말 빠르던데?”라고 대답하는 동하를 물끄러미 본다.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수아를 힘도 들이지 않고 번쩍 들어 물에서 꺼낸 동하가 사희를 돌아본다.
사희는 저를 향해 손 흔드는 두 사람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 속에서 수천 마리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벅찬 느낌이었다.
“네 남자친구, 정말 잘생겼다.”
강희가 사희의 팔을 슬쩍 치며 속삭인다.
“그런가? 난 자주 봐서 잘 모르겠네.”
마음속으로는 100000% 공감하고, 팡파르까지 울리고 싶으면서도 사희는 괜히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전에 말했던 그 사람이지? 너 속 타게 했던 그 남자.”
“언니, 내가 언제 속을 태웠다고 그래.”
“죽을상하고 한숨도 푹푹 쉬어놓고 내숭은.”
“난 그런 적 없어. 기억 안 나.”
사희는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돌리며 시치미를 뚝 뗐다.
“지금도 너 속 타게 해?”
강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사희는 수아를 목마 태우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동하를 보며 슬쩍 고개를 젓는다. 석양을 등진 남자와 수아의 모습이, 다정하게 한 덩어리져 마치 큰 나무 그림자 같아 보였다.
“아니. 안 그래. 좋은 사람이야. 내게 과분할 만큼.”
사희의 대답을 듣는 강희의 얼굴이 비로소 안심한 듯 부드럽게 펴진다.
“네가 받을 만하니까 받는 거야. 너는 얼마든지 받아도 돼.”
강희는 사희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