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동하의 입술이 이번에는 사희의 손목에 닿는다.
동하는 가슴이 꽉 차도록 숨을 들이켰다. 그 숨에는 사희의 체향이 가득 담겨있다.
그 향을 채우고, 또 채운다. 그녀를 제 안에 채우는 일은 넘치도록 달고, 또 달아서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허파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행복했다.
지금껏 이동하의 인생은 언제나 결핍이었다. 그는 어떤 것도 욕심내어서는 안 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였다. 허락받지 못한 씨앗이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향해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 이를 바라만 보아야 하는 향일화였고, 배다른 형제의 안위를 위해 숨죽이고, 가진 것도 빼앗겨야만 했던 그림자였다. 평생을 그것이 자신의 업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그랬기에 그는 그것이 결핍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사희를 만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아무리 마셔도 물리지 않는 달콤한 샘물처럼 그의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가 목마르다. 참으로 황홀한 갈증이었다.
마음껏 욕심을 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고 애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행복이다.
“달아. 이사희.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아련하게 눈 감은 남자는 기도처럼 작게 속삭였다.
달콤함, 그에게 그것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었다.
사희는 맥이 뛰는 자리에 살포시 와 닿는 동하의 입술을 바라본다. 일순간 온몸의 피가 맹렬하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더운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온몸이 일순간 노곤해졌다.
사희는 순종하듯 그녀의 손목에 입 맞추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동그란 정수리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남자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짐승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볐다. 그리곤 무구하게 뜬 눈으로 사희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네 쪽으로 가도 될까?”
동하는 사희의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사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여느 여인과 다를 바 없이 친밀하고 다정하게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사희의 목덜미에서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 드는 것 같았다.
“목이 길구나.”
자신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시선에 긴장하고 있던 사희는 낮고 굵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사희는 괜스레 두 손으로 목을 감싸며 헛기침을 한다.
동하의 손가락이 사희의 손가락에 닿는다. 남자는 사희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더니 이내 손가락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가리지 마요. 보고 싶으니까.”
사희의 목덜미는 어느덧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사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사희의 목덜미를 간질이듯 약하게 만진다. 피부에 찌릿하게 소름이 돋아났다. 이내 살갗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하가 이번에는 사희의 목선에 코를 묻고, 콧날로 느릿하게 살결을 쓸어내렸다.
“난 당신, 여기가 특히 좋아. 다른 건 거짓말을 해도, 여긴 거짓말을 하지 않아. 진심을 말할 때, 선명하게 붉어지거든.”
“으으, 소름 끼쳐.”
사희가 몸서리치듯 팔을 쓸어내리며 소파 구석으로 몸을 피한다. 동하는 팔을 뻗어 다시 사희를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도망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히 밀착되니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이 더욱 여실하게 느껴졌다.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사희를 본 동하는 끝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사희, 그러다 목 없어지겠어.”
“익숙하지 않아요. 당신은 이런 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본데, 난 아니거든요.”
동하는 느슨하게 턱을 괴며 귓불까지 붉어져선 나긋하게 성을 내는 사희를 바라본다.
“이사희.”
“왜요.”
“예뻐서 그런 거야, 네가 예뻐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사희가 얼른 커피 잔을 동하 앞으로 밀어주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명랑한 체를 한다.
“알아요, 알아. 나 예쁜 거 충분히 아니까 제발 그만하고 이거나 마셔요. 응?”
동하가 턱을 괸 손을 풀고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그리곤 사희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의 담담한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심란해 보였다.
동하는 천진한 아이처럼 저를 보는 사희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느리게 속삭인다.
“당신이 많이 웃었으면 좋겠어.”
“…….”
“당신이 안전했으면 좋겠고.”
사희의 동그란 눈에 점점 더 의아함이 번진다.
“무슨 소리예요. 안전이라니…….”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희는 반반한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동하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무슨 일 있어요?”
사희가 조심스레 묻는다. 동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냥, 내가 더 많이 노력하겠다는 뜻이야.”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사희의 얼굴에 반짝 미소가 번진다. 사희는 마치 많이 웃겠다는 약속을 하려는 것처럼,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곤 들뜬 목소리로 명랑하게 대답했다.
“충분해, 지금도.”
동하의 품에 몸을 기댄다. 그의 품안에서는 시간이 평화롭게 지나가는 것 같아 좋았다.
사희는 동하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찍는다.
“내 생에 이보다 더 안전했던 때는 없었어요. 왜인 줄 알아?”
“왜?”
“당신이 나한테 복종하겠다고 했잖아. 생각해봐요. 세상에 이보다 더 든든한 게 어디 있겠어?”
“여우.”
동하는 사희의 코를 살짝 잡았다 놓으며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요. 알았지?”
“그래. 그럴게.”
“그럼 키스해 줄래요?”
동하는 사희의 매끈한 콧날에 제 코를 살짝 부딪쳤다. 그리고 다짐하듯 여자의 앙증맞은 입술에 입술을 찍는다. 달콤한 복종이었다.
***
프로젝트 진행은 순탄했다. 사희에게 프로젝트의 세부 진행을 일임할 수 있게 되니, 동하는 더 이상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세이브한 시간에 이동하 본부장은 해당 프로젝트 홍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NOVA, 반성하고 반전합니다.’라는 카피를 필두에 세운 홍보는 대기업의 반성이라는 점에서 고객들의 마음을 관통했다. 고객들로 하여금 대기업을 반성하게 한 똑똑한 소비자가 된 기분에 취할 수 있도록 홍보의 방향을 잡은 것이다.
고객들로 하여금 너그럽게 용서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심리를 일으키는 홍보 전략은 적중했다. 해당 기업을 소비하는 데에 정당성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노바를 터부시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노바가 공략의 화살표를 돌린 쪽은 지자체였다. 지자체의 호응을 얻는 것은 더욱 쉬웠다. 사실상 대기업 시설을 이용한 복지사업이니만큼 자치단체 입장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받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지자체는 ‘사회공헌 기업’, ‘착한 기업’, ‘지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쇼핑몰’ 등등, 구색 맞추기 좋은 타이틀을 붙여주며 얼룩졌던 NOVA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큰 몫을 했다.
홍보팀장은 이와 같은 소득을 일궈낸 데에 대한 자신감과 기쁨을 숨기지 못해 얼굴에 연신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인터넷을 주축으로 일어났던 불매운동은 자연스럽게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되레 착한 기업을 통한 착한 소비 운동 분위기가 조성되는 추세라는 농담도 나오고 있다더군요.”
“다행입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내주셨군요.”
칭찬을 기대하는 이에게 ‘기대 이상’이나 ‘훌륭하다.’는 식의 수식어를 충분히 넣은 찬사는 플러스 효과를 낸다. 동하의 칭찬에 홍보팀장의 어깨는 마치 파도치듯 넘실대는 것 같았다.
“지역신문에서 NOVA의 사회 기여 사업 관련 투고 요청이 들어왔는데, 본부장님께서 직접 하시겠습니까?”
동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부분은 대표이사님께 일임하는 것으로 하죠. 쇼핑몰 대표자의 얼굴이 실리는 편이 이미지 차원에서도 훨씬 나을 겁니다.”
대표이사로 하여금 자필 사과문 작성이라는 굴욕을 맛보게 했으니, 그에게도 적당한 당근을 쥐어줄 필요가 있었다. 과시하기 좋아하고 허세가 있는 사람이니 앞에서는 못 이긴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대표이사님께 원고 받으면 팀장님께서 쉽고 간결한 문체로 한 번 더 교정을 보세요. 쉬워야 합니다. 무조건. 그래야 고객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MBS의 예능프로그램에서 스포츠센터 대관 협찬 요청이 왔습니다.”
홍보팀장이 건넨 문서를 눈으로 빠르게 읽어 내린 동하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프로그램이죠?”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비인기 아이돌 멤버들과 사회적 약자 계층 참여자들을, 1:1 파트너로 하여 스포츠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고취시키고 자아 성장을 이루게 한다는 게 취지라고 합니다.”
동하의 짙은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활처럼 올랐다 내려간다.
“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현재 노바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성격이 맞아 홍보에 좋을 것 같다고 판단됩니다.”
“장소 협찬 조건은요?”
“자막을 통해서 장소를 공개하고, 총 방송 시간 중 장소 노출을 최소 20분 이상으로 하겠다는 조건입니다.”
“단순한 장소 노출 외에 시설물 이용 관련 스토리텔링이 가능한지 여부와, 정규방송 편성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해당 계약사항이 이어지는지 협의해보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동하가 홍보팀장을 향해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에 합의가 완료되면, PD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도 전하세요. 내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반사된 그의 눈동자가 연한 커피색 빛깔로 물들어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동자에 번진 오묘한 설렘은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설레게 하는 것이라면 단연 그 계획의 주인공은 하나, 이사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