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71화 (72/109)

#71

“복수?”

“그래.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은 거잖아. 내가 네게 준 상처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은 거잖아! 그래서 아까 그 애도 일부러 다시 데려와 노바에서 일하게 하는 거 아냐? 나 보라고!”

세령의 말에 동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녀를 본다.

“누구……, 이사희 강사를 말하는 거야?”

“그래. 걔가 재민이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이렇게 된 것도 다 걔가 언론에 입을 놀려서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걔를 다시 노바로 데려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성을 잃고 퍼붓는 세령의 목소리가 쉬어 갈라져 있었다. 여린 몸을 바들바들 떠는 세령은 초조해 보였다.

동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차분하게 물었다.

“이사희 강사가 그랬다는 증거는?”

“증거 따위 필요 없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세령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고 몽니를 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용이할 테니까.

동하는 피가 식는 느낌을 받았다.

“증거가 없어?”

“재민이를 맡았던 강사들 중 하나야. 걔든, 걔가 아니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것들 중 하나에게서 말이 나왔다는 거지.”

어금니를 무는 동하의 턱이 꿈틀거린다. 어금니를 무는 동하의 턱이 꿈틀거린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눌러 담으며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했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어. 그런데 네가 그 앨 다시 데려왔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대답해 봐. 이게 우연이야?”

세령은 씹어 뱉듯 말하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동하를 쏘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동하는 내내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었던, 그날 사희의 눈물을 떠올렸다. 누가 당신을 울렸느냐고, 그게 남자인지 아닌지, 난 단지 그게 궁금할 뿐이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장이라도 사희를 찾아가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쳐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곧 그마저도 식었다. 이제 와 따져 묻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가 다치는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있었던 자신의 무능함만 재확인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터인데.

설령 그것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의 위험이 그가 속한 세계의 어지러운 모순이 만들어낸 결과라면 그것은 분명한 자신의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려지는 남자의 눈을 보는 세령의 눈이 원망으로 일렁인다.

“내게 상처를 주고 싶은 의도였다면 성공했어. 이동하. 나 괴로워, 지금. 괴롭고 아파. 그런데 내가 괴롭고 아프다고 해서 이제와 네가 얻는 게 뭐야?”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동하의 눈이 식는다. 세령을 향했던 마음이 이보다 더 차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동하는 서릿발이 날릴 듯 스산한 눈으로 세령을 보며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차세령, 내가 왜 널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

“여전히 내 모든 것이 너를 축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동하의 비소에, 순식간에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세령의 눈이 때꾼해졌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세령의 낯에 혈색이 사라진다.

“너, 내게 그랬었지. 살고 싶은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그게 네가 날 버리고 이경민을 선택한 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었어.”

“…….”

“괴로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말을 이해하고 싶어 했는지 네가 안다면, 너, 내게 이렇게 쉽게 복수라는 말. 하지 못할 거야.”

“내가 온전히 날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해? 아니야! 내 불행이 너까지 바닥으로 끌어내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야. 나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세령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 넘쳤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밑에 모여 뚝뚝 떨어진다.

그러나 동하는 그녀의 눈물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가엾지도, 안타깝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마치 돌덩어리를 보는 것처럼 무덤덤한 자신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 나도 네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널 원망하지 않는 거야.”

동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살고 싶은 거, 죄 아니야. 그러니 계속해서 살아. 그렇지만 내가 영원히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주길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야. 난 이제 널 위해 살지 않아”

“…….”

“그리고 이것도 알아둬. 네가 살기 위해서 나를 비롯한 내 사람들을 해친다면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아. 그때는 나, 기꺼이 네 적이 될 거야.”

동하는 하얗게 질린 세령을 향해 경고했다. 화살을 날리듯 단호한 음성이었다.

심장이 쿵 떨어진다.

“네 사람이라고?”

“그래.”

동하의 표정이 단호하다.

“설마……, 너…….”

세령은 귓가에서 옅은 이명을 느꼈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가물가물하게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조금 전과 다름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완벽한 복수였다. 이동하의 복수가 아닌. 함부로 저버린 인생이 돌려주는 잔인한 복수.

바닥이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스스로를 느끼며 세령은 질끈 눈을 감았다. 오한이 든 듯 떨리는 손을 맞잡는다. 부서질 듯 강하게 힘을 준다. 그래야만 했다. 이제는 자신 말고는 누구도 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

시나몬과 시럽에 졸인 사과가 곁들어진 토핑을 한입 가득 입에 떠 넣는다. 파이는 입에 들어가기 무섭게 사르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완벽한 디저트였다.

사희가 각성된 눈빛으로 단 음식을 탐하는 것을, 동하는 즐거운 공연을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다. 간간이 커피로 입술을 축일 뿐, 그 몫의 포크는 처음 놓았던 그 자리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생각 없어요?”

사희가 스푼을 문 입술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별로. 주전부리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

“어련하시겠어.”

“무슨 뜻이지?”

“설탕, 소금, 밀가루 같은 건 안 먹는, 몰인간적인 부류일 것 같단 뜻.”

동하가 부인하지 않고 피식 웃는다. 오른쪽 뺨을 씰룩이며 미소 지을 때, 늘 같은 자리에 어김없이 옅은 웃음 주름이 생겼다. 웃음기를 지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그 신기루 같은 흔적이 그와 똑 닮아있다.

“그러는 이사희는 인간적이라 단 음식을 좋아하나?”

“내 군것질에는 명목이 있어요. 이건 평화를 위한 거거든.”

“평화?”

동하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눈썹을 비틀어 떴다.

“스트레스를 설탕으로 치유하는 거예요.”

“뭐가 그렇게 스트레스인데?”

동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사희는 씹던 것을 멈추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그에게 이야기해도 좋을 것인지를 잠시 고민했다.

언니 이야기를 하면 이 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아니야, 그런 말을 해서 뭘 해. 뭐가 자랑이라고. 그 말이 어렵다면, 이런 건 어떨까. 이런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어서 불안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때가 있다는 고백 정도는, 청춘의 한 조각 고민처럼 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런 것도 하지 말자. 부질없으니까. 저 남자가 이런 원초적인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저 이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느낄 일이 없는 문제인 것을. 행여 그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억지로 공감해보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 느껴지기라도 한다면, 그 말을 꺼낸 자신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상대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는, 나의 초라한 본질마저도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처절한 애원이라고 생각했다. 애원하고 싶지 않다. 매달리고 싶지 않고, 애걸복걸하고 싶지도 않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그냥. 벌거벗는 기분이라 싫어. 내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건.”

사희가 파이 부스러기를 포크로 건드리며 대답했다.

순식간에 테이블에 침묵이 감돌았다. 사희는 이내 후회했다. 그녀는 얼른 명랑한 척을 하며 사과 절임을 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좋은 이야기만 하자고요. 구질구질한 이야기까지 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아.”

“누가 당신 괴롭게 해요?”

질문하는 동하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그러나 사희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그런 일 없어?”

동하는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사희는 동그란 눈동자를 크게 뜬 채로 잠시 생각해보는 척을 하다가 곧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감히 날 괴롭게 해. 죽고 싶으면 그러라지?”

우스갯소리를 한 사희가 다시 애플 크럼블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으려던 순간, 동하가 사희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스푼 위에 얹어진 파이 부스러기와 사과 조각을 말끔하게 먹어 치웠다.

“내가 단 걸 즐기지 않는 건,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야.”

“…….”

“그렇지만 당신은 예외.”

동하는 코끝을 찡그리며 조금 웃었다. 콧잔등에 잡힌 세 가닥 주름이 도에 넘치게 매력적이다. 보는 눈이 다 황홀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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