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70화 (71/109)

#70

“나, 내려가요. 딴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새침하게 대꾸한 사희는 참새처럼 종종거리며 뛰어나갔다.

하루를 초 단위로 나눠 그야말로 부서져라 일하고 있는 저에게,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소리치는 맹랑한 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구석도 밉지 않은 사랑스러운 여자. 동하는 그 사랑스러운 존재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사희, 그런데 아직 말해주지 않은 게 있잖아?”

“뭘요?”

“나, 당신한테 뭐야? 대답해 봐요.”

순간 가슴 속에서 울근불근한 기운이 치솟았다. 지금 이 속에 담겨있는 감정을 모두 털어놓아도 될까? 잠깐 망설이던 사희가 새침하게 턱을 치켜든다.

“뭐긴요. 음란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 사람이지.”

“하핫, 뭐라고?”

동하의 웃음소리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희는 다소 수줍은 마음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녁 같이 할래요? 오늘은 내가 살게요. 손해는 아니죠?”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새침하게 재연하는 사희를 보며 동하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데리러 갈게요.”

문고리를 잡은 사희가 문을 열려다가 말고, 살짝 그를 돌아본다.

“본부장님.”

“응?”

“나 퇴근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모범 직원 안 할 거예요.”

“……!”

“늦지 말아요. 이동하 씨.”

동하의 눈에 반짝 빛이 돈다.

그녀에게서 ‘본부장님’이라는 호칭이 아닌, 다시 ‘이동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 당신에게 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대답이다.

***

태연한 척하며 본부장실을 나섰지만, 문이 닫힌 순간 다리에서 힘이 쑥 빠져나갔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마다 후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함께 있으면 순식간에 날 것 그대로의 본능을 끌어내는 그의 손길은 명백히 위험하고 도에 넘치게 매력적이다.

사희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꽉 주고 고개를 들었다. 비서실 직원에게 가볍게 묵례하고 막 발짝을 떼는데, 그와 동시에 대각선 자리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부장실 쪽으로 몸을 돌린 그이와 사희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움찔 놀라는 이쪽만큼이나, 그쪽도 몹시 놀란 눈치였다.

세령의 놀란 눈꺼풀이 두어 번 크게 깜박인다. 그 눈이 묻고 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세령의 노골적인 의아함이 담긴 시선을 받고 나서야 사희는 정신을 차렸다. 사희는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세령의 얼굴을 태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곤 빳빳하게 질려있는 그녀를 향해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령의 귀밑 살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예의 그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차가운 시선을 받아줄 이유가 없었기에, 사희도 그녀에게 던졌던 눈길을 거두고 자리를 피한다.

“여기는 어떻게?”

스쳐 가는 사희의 등에 세령의 질문이 날아와 꽂혔다. 그 말투에는 ‘네가 절대로 다시 올 수 없는 자리’라는 뜻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노바에서 다시 근무합니다.”

등지고 있던 세령이 사희를 향해 몸을 조금 돌려 섰다.

“여기에서 다시 강습을…… 한다는 건가요?”

“스카우트되었습니다. 노바의 스포츠센터에서 새로 기획한 프로젝트의 담당자로요.”

역시 세령을 향해 몸을 돌려 선 사희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리곤 담담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모님 덕분입니다. 의도하신 바와는 다른 방향이겠지만.”

언젠가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반드시 웃겠단 그 다짐도 지키기로 했다. 사희는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당당한 표정으로 세령을 보며 붉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완벽한 미소였다.

세령의 미간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하게 일그러진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굳어있던 눈동자가 일순 분주하게 흔들린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진 눈빛에는 여러 가지 의혹이 담겨 있었다.

설마……. 세령의 뇌리에 경민의 얼굴이 잠시 스쳐 갔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빠르게, 그리고 거침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간다.

“누가 당신을 스카우트했지?”

줄곧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던 세령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내가 했습니다.”

차분하고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사희와 세령이 동시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열린 문 앞에는 동하가 산처럼 우뚝 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세령은 그녀가 생각했던 오만가지 생각 중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변수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리고 그 변수는 그녀에게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타격을 입힌 것 같았다.

***

살포시 내리깐 시선의 끝이 어디에 닿아있는지 모르겠다. 외면한 듯 앉아 있는 세령의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가냘픈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앙상하다고는 볼 수 없다. 과장된 굴곡이라곤 없는데도 여자는 부드러워 보였으며, 되레 그 완만한 실루엣 덕에 나이보다 더 풋풋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침묵을 깨고 동하가 운을 뗐다.

경직된 목소리, 그 마지막 한 자까지 참을성 있게 똑똑히 듣고 나서야 세령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어깨에 닿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조금 웃는다. 씁쓸한 미소였다.

“어색하다. 그런 말투.”

“적응하셔야죠.”

동하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세령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눈으로 오래도록 동하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더 이상 재민이에게 수영장을 개방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오해를 하시는군요. 정확하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적으로 노바의 시설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그래, 뭐 그걸 따지러 온 건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노바에서 새로 기획한다는 그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와 연관해서 재민이가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없었던 일로 해줬으면 해. 재민이가 세간에 오르내리는 거, 어머님께서 몹시 불편해하고 계셔. 너도 그걸 원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듣고 있던 동하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 든다. 그녀가 굳이 덧붙인 윤여화 여사의 심기에 대한 설명이, 마치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그가 일평생을 어떤 마음으로 계모를 바라보며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령이, 그 약점을 이용해 겁박을 하고 있다. 애써 지키고 있던 냉정이 무너진다.

“그분 심기가 불편해져서 그러잖아도 불안정한 네 입지가 흔들리는 게 겁나는 건 아니고?”

세령이 당황한 눈으로 동하를 본다. 저를 바라보는 동하의 시선이 너무도 차가워 세령은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동하는 격양된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강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후, 느리고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날 찾아온다기에 많은 생각을 했어. 어쩌면 아주 잠깐은 우스운 기대를 했던 것도 같아. 네가 나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이런 협박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

“협박 아니야.”

세령이 다급히 동하의 말을 잘랐다.

“……부탁하는 거야. 부탁해. 동하야.”

동하의 큰 눈이 애잔한 빛으로 흐려졌다.

“부탁이라고?”

“……그래. 네 말대로 나, 많이 흔들려. 네가 뭘 할수록 난 점점 더 흔들릴 거야. 그러니까 제발 부탁해.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

치맛자락을 잡는 세령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동하를 보는 세령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것이 그에 대한 미안함의 눈물인 것인지, 아니면 소름 끼치게 이기적인 스스로에 대한 환멸의 눈물인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동정심을 얻기 위한 악어의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비 맞은 새처럼 접힌 여자의 마른 어깨를 오래도록 바라보던 동하는 천천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곧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세령을 쏘아보았다.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다.”

차가운 대답.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세령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당황한 듯 좌우로 떨리는 눈동자는 그에게서 거절을 들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야. 네가 원하는 대답은 못 들려준다는 거. 난 여기 책임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어.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네 아이가 세간의 입에 오르는 건 나로서도 유감이지만, 그게 없었던 일에 대한 비판은 아니잖아? 감수해야지.”

“감수……하라고?”

“그래, 이게 네가 선택한 세계야. 이 세계에서 소문은 때로 돈이 되거든. 그러니 각오해야지. 마음 단단히 먹어. 앞으로 이보다 더 많은 일이 생겨날 텐데 그때마다 그렇게 울 수는 없잖아.”

동하는 차갑게 일축했다.

세령은 번개가 정수리를 내려찍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령의 눈이 벼린 칼처럼 날카로워진다. 그녀의 눈에 강한 배신감이 묻어 있었다. 꿰뚫을세라 동하를 노려보던 세령의 눈시울이 가늘게 좁아진다.

“이러려고 돌아왔구나.”

“……?”

“나한테 복수하고 싶었어?”

세령의 그 말에 동하는 짙은 눈썹을 강하게 모았다. 그리고 반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