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좋습니다. 검토해보고 답변 드리도록 하죠.”
서류를 내려놓으며 동하는 분명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의 반응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희의 얼굴에 반짝 반색이 돌았다. 거의 죽을 것 같던 표정을 짓고 있던 정아도 이제야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몰아 내쉰다.
그러나 동하는 그대로 그녀들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강사 충원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조율이 필요할 것 같은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할까요?”
반짝 화색이 돌았던 두 여자의 얼굴에 동시에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정아가 사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곤 “나 토할 거 같아.” 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한다. 그리곤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매우 아쉽게 되었다는 듯 눈썹을 여덟 八 모양으로 만들었다.
“본부장님,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잠시 후에 강습이 있어서요. 그 부분은 이사희 강사와 이야기를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죠.”
혹시나 본부장이 마음을 바꿀까 두려웠는지 정아는 얼른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줄행랑을 쳤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정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사희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동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럼 어떤 부분에 대해서 먼저 조율하면 될까요?”
“잠깐, 그보다 우선 이것부터.”
동하의 커다란 손이 사희의 머리카락을 파고든다. 제게로 이끌어 온 여자를 허벅지 위에 앉힌 남자는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혀와 입술을 빨아들이고, 핥고, 짓누르는 사이 동하의 손이 거침없이 사희의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본……부장님!”
사희는 도저히 양보를 할 뜻이 없어 보이는 그의 손을 억지로 끌어내리며, 그의 입술을 피해 힘겹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사희의 등을 받친 손에 힘을 주자 물러나 있던 그녀의 몸이 다시금 남자의 품으로 바짝 붙었다.
“참기 힘들어.”
동하가 코끝으로 사희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나른하게 속삭인다.
더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몸이 잔뜩 달아오른 지금으로서는 그녀도 그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쇄골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더운 숨결이 간지러워 사희는 얕은 신음을 뱉는다. 곡선을 타고 내려간 남자의 콧잔등이 사희의 봉긋한 가슴 사이에 묻혔다. 동하는 그곳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쉰다.
“음.”
그녀의 옷에서는 옅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은은한 향기를 한껏 들이마신 동하가 강아지처럼 고개를 들어 사희를 바라본다.
“이사희.”
“응?”
“우리 나쁜 짓 좀 할까?”
“나쁜 짓이요?”
토끼처럼 놀라는 사희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동하는 전화기를 들었다.
“최 실장. 따로 지시 있을 때까지 전화 연결하지 마.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고.”
사희는 동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밉지 않게 흘긴다.
“회사에서 이래도 돼요?”
“적응해 둬요. 앞으로도 상습적으로 이래 볼 생각이니까.”
“음란하기는.”
“잘 봤네. 그거 내 특기거든.”
장난스럽게 꾸짖는 사희의 티셔츠 자락을 올리며 동하는 짓궂게 씩 웃었다.
***
세령의 단정한 눈매가 눈에 보이게 찌푸려 든다. 그녀의 시선이 본부장실 문 쪽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최수찬 실장을 향해 돌아왔다.
“내가 온다는 걸 모르고 있나요?”
최 실장은 세령의 권위적인 질문이 기가 찼으나, 그것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무진 애썼다. 아니, 그보다는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가 불안해 보였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아십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본부장님께서 일정이 많으십니다. 지금도 회의 중이시고요. 기다리시거나, 아니면 다른 시간 약속을 잡으셔야 합니다.”
세령은 조금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차세령으로부터 본부장실을 방문하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은 1시간 전이었다. 그때도 분명히 오늘의 일정에 대해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수찬이 조심스럽게 권했으나 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령은 몹시 초조해 보였다. 수찬은 기억 속에 있던 차세령과 지금 눈앞의 그녀가 같은 인물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지금의 세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공된 보석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빛나지 않았다. 불안한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 신경질적인 태도 등등 모든 것에서 그녀의 불행이 드러났다.
도대체 차세령은 왜 여기에 온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이성이 흐려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버리고 간 남자를 찾아온 여자. 심지어 그녀는 자기가 버린 남자의 형과 결혼했다. 동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줘놓고, 그녀는 지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한 듯 그를 만나기를 요구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여전히 이동하의 심장을 쥐고 있다는 듯이.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도하는 기분이 영 씁쓸하다. 그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저마저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검은 기운에 기분이 씁쓸한데, 동하는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마주할까.
몹시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이제라도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수찬은 간절하게 바랐다.
하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기다리죠.”
세령은 차분하게 식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여기에 오기까지 쉽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마음을 다스려야 했는지 모른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조차 생각지 못했다. 위험을 감지한 아이가 제일 먼저 엄마를 찾듯, 본능적인 발걸음이었다.
한 발짝만 물러나면 벼랑 끝으로 떨어질 것 같은 극도의 불안 앞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스스로 믿음을 져버린 동하라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세령은 굳게 닫혀 있는 본부장실 문을 힐긋 돌아보았다. 자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열지 않는 저 문이, 저를 향한 원망과 미움의 발현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이 싸하게 시렸다.
‘그래, 동하야. 미워해. 얼마든지. 얼마든지 미워해도 괜찮아.’
너를 저버린 죗값, 지금 나는 끝없는 불행으로 돌려받고 있어. 널 떠나고 나 역시 하루도 행복했던 적 없다고 말하면 나를 가엾게 여겨줄까.
동하야, 내 잘못된 선택이 너와 나를 망쳤지만, 내가 너를 불행하게 하고 나 역시 불행 속에 빠트렸지만,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널 다시 찾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살고 싶어. 살고 싶은 게 죄는 아니잖아.
***
사희의 날씬한 허리를 천천히 문지르며 동하는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앵두 같은 입술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등허리 아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번져갔다.
그의 손이 바지 버클에 닿자, 꿈에 잠긴 것처럼 나른해 있던 사희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동하를 조금 밀어냈다.
“안 돼요.”
말랑말랑한 살갗을 입 안 가득 머금어 힘 있게 빨아들였다가 풀어놓은 동하가 야릇한 웃음을 짓는다.
“왜 안 돼?”
“……그, 근무시간이잖아요.”
사희는 저도 모르게 말을 조금 더듬었다.
“이런……, 이렇게 모범적인 직원이었어요?”
“아무튼 지금은 안 돼요. 이만 내려가 볼래요.”
시선을 외면하는 사희의 발그레한 얼굴을 귀엽다는 듯 보며 동하는 빙그레 웃었다.
“이 안에서 당신이 하는 모든 일, 하나도 빠짐없이 근무로 간주해 줄게요. 내 권한으로.”
“뭐라고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본부장 명령이야.”
동하는 거만하게 눈썹을 치뜨며 으름장을 놓았다. 씰룩이는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내가 안 된다는데, 일개 본부장 따위가 뭐라고 감히 강요야?”
사희는 슬금슬금 장난을 거는 동하의 도발에 맞춰, 역시 대범하게 한방을 먹였다. 동하는 당황한다거나,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특유의 눈웃음을 만들며 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내가 뭐가 되어야 이사희가 고분고분 굴복을 하지?”
“분명한 건 당신이 뭐가 되던 나한테 힘자랑은 안 통한다는 거예요.”
사희는 부러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동하가 가늘게 눈뜬다.
“그럼 다시 묻지.”
“……?”
“지금 네게 나는 뭐지? 날 뭐라고 생각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
사희는 대답을 하는 대신 새침하게 되물었다.
“음, 글쎄. 네 손가락만 닿아도 미치는 발정 난 짐승?”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분이시네요.”
사희는 말끔하게 다듬은 남자의 구레나룻 부근을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생긋 웃었다. 남자는 살짝 눈을 감으며 사희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자꾸 날 건드리는 이유가 그걸 유도하려는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나?”
“본부장님 머릿속에는 그런 불건전한 생각밖에 없어요?”
“완벽하게 건전해. 널 보고도 아무런 욕구가 들지 않는다면 그게 불건전이지.”
“말이나 못하면.”
사희는 말려 올라간 셔츠 밑단을 끌어내리며 남자의 허벅지에서 내려왔다. 엉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는 사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대신해서 느리게 쓸어내렸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남자의 긴 손가락 새로 해초처럼 미끄러졌다.
동하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들춰 새하얀 목덜미의 경추 돌기 부분,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 자리에 자극적으로 입을 맞춘다. 그리곤 울근불근 들썩이는 정맥을 혀로 핥으며 느릿한 목소리로 묻는다.
“정말 안 되는 거 맞아요?”
“그래요. 안 돼요.”
“심장이 이렇게나 빨리 뛰는데?”
“아, 정말!”
사희는 남자의 손길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이렇게 내밀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짓궂게 구는 남자가 밉다. 그런데 싱글벙글하고 있는 동하의 얼굴을 보면 미운 마음보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더욱 커지니 그것도 참 미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