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68화 (69/109)

#68

방으로 돌아온 세령은 화장대 거울 앞에 힘없이 앉았다. 두통이 인다. 마치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던 세령은 휴대전화를 들어 경민의 번호를 찾았다.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세령은 이를 악물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경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재다이얼을 눌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세령은 결국 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걸린다.

“연결 좀 부탁해요.”

짧게 용건을 전한다. 건조한 목에서 쉰 듯한 소리가 났다.

-지금은 부사장님께서 통화가 어려우십니다.

반반한 미간이 일그러진다.

“받으라고 해요. 급한 일이라고.”

-죄송합니다, 사모님. 지금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화는 이례적으로 저쪽에서 먼저 끊겼다. 그리고 세령은 멀어지는 수화음 말미에 ‘끊어’, 라고 말하는 경민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화기를 내려놓는 손가락이 바르르 떨린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경민은 세령의 전화를 먼저 끊은 적이 없었다. 상처를 내고, 악을 쓰고, 으르렁거렸어도 늘 전화를 끊는 쪽은 세령이었다. 그렇기에 경민의 변화는, 세령에게 있어 더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세령이 잠시 멍하니 넋이 빠진 채로 앉아있는데, 그녀의 전화기가 울렸다. 움찔 눈썹을 찌푸린 세령이 전화기를 든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사모님?

병약한 그녀의 목소리와 상반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녀는 마치 미리 왼 것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진소영이에요. 전에 뵌 적 있는데. 기억하시죠? 방배동 프리미엄 캐슬에서…… 지금 좀 뵙고 싶어요.

멍해 있던 세령의 눈이, 여자의 이름을 듣자 가늘게 휜다. 그것은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을 때, 무섭게 번득이는 맹수의 눈과도 같았다.

***

세령을 불러낸 여자는 몇 달 전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달라진 바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녀의 눈에서 적잖은 다급함과 초조가 느껴진다는 것 정도. 이경민이 근래 아예 발길을 끊었으니, 그럴 법도 할 것이다.

“잘 지내셨어요?”

여자는 입술을 당겨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용건만 말해요.”

세령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차갑게 대꾸했다.

여자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곧 생과일주스를 빨대로 어수선하게 휘저었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탁자 위로 무언가를 꺼내 스윽 밀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여자가 내민 것을 보던 세령의 눈이 일순 번뜩했다. 숨을 참는 것처럼 강퍅하게 팬 목덜미가 그녀의 당황과 긴장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여자가 내민 것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선명하게 뜬 두 줄의 붉은 선 쪽을 친절하게 세령 앞에 밀어놓은 여자는 다시 꿀꺽 침을 삼켰다.

“저 임신했어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세령은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스커트 위에 슬쩍 문지르곤 천천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병원은 다녀왔어요?”

“병원이요? 그건 아직……. 그런데 이거 세 개나 해봤어요. 분명해요.”

“일어나요. 같이 가 봐요, 병원.”

여자의 시선이 어수선하게 흔들렸다. 세령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눈빛이었다.

세령은 머뭇거리는 여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당겨 조금 웃었다.

“아이 아빠는 알고 있어요?”

“그건……, 아직이요.”

여자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트린다.

“그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내게 먼저 말하는 이유는요?”

“그게 도리니까요.”

풉, 세령의 입술에서 웃음이 터졌다. 내연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본처에게 보고하는 것이 언제부터 세상의 도리가 되었던가. 그것도 이 세계이기에 가능한 농담인가.

“어쨌든 지금 당장 병원에 가보죠. 일어나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빽, 소리를 지른 여자가 다시 빨대를 들어 주스를 신경질적으로 휘젓는다. 지켜보는 세령의 눈이 싸늘하게 식는다. 이미 여자의 잔수작은 모두 짐작하고도 남았다는 듯, 그녀를 보는 세령의 눈에는 차갑고도 건조한 조소가 담겨있었다.

“당신이 내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리는 도리를 취했으니까, 나도 그 애가 잘 붙어있는지 확인해주는 도리를 취하려는 거야. 정말로 붙어있는 게 맞는다면 말이야.”

뱀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세령의 입술 새에서 흘러나온다.

주스를 젓던 여자의 손이 멈칫하더니 곧 얼이 빠진 얼굴로 세령을 바라본다. 멍하니 벌린 여자의 붉은 입술이, 초조해하는 검은 눈동자가, 젊음이 완연한 싱그러운 얼굴이 너무도 어렸다.

넌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아니?

세령은 마음으로 물었다. 네 인생, 네 젊음을 걸고 네가 얻으려는 것이 얼마나 추잡한 쾌락인지 알고 있는 거니. 그게 과연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 못 믿으시나 본데, 다, 다음번에는 초음파 사진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그럼 되잖아요!”

세령은 여자의 눈에 똬리 튼 순진한 욕망을 보았다. 한 번만 더러우면 된다. 한 번만 인간이기를 포기하면 그다음부터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진짜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여자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고 무모한 눈에서 세령은 스물일곱 살의 저를 보았다. 그때는 세령도 한 번만 눈 감으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한번이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한 번만’의 시초가 되었다. 그걸 미리 알았다면, 그때 동하를 떠나지 않았을까? 나무뿌리를 씹은 것처럼 입 안이 쓰다.

세령은 느리게 찻잔을 들어 버적버적 마르는 입을 축였다.

“나는 당신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이상 무모한 짓 하지 말아요.”

“거짓말 아니라니까!”

“필요한 게 돈이라면, 내가 줄게요. 내 남편이 낭비한 당신의 젊음 값으론 충분치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당신이 만져본 금액 중에서는 가장 클 거예요. 욕심내지 않으면 보통 사람처럼은 살 수 있어요. 어떡할래요? 이쯤에서 받아들일래요. 아니면 끝까지 그 어설픈 연극, 계속할래요?”

“…….”

여자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 정하면 연락해요.”

세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분한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던 여자가 홱 고개를 돌리더니 발칙한 눈으로 세령을 노려 본다.

“잘난 척하지 마! 재수 없게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

“네가 본부인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 웃기지 마. 너도 나랑 똑같아. 나는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진짜가 나타날 거야. 그럼 너도 꼼짝없이 네 병신 아들이랑 같이 쫓겨나는 신세……. 꺄악!”

여자의 발악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머리채 잡힌 여자의 얼굴이 테이블에 무지막지하게 처박힌다. 온몸에 체중을 실어, 발버둥 치는 여자의 머리를 몇 번 더 짓찧은 뒤, 세령은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손을 뗐다.

“입조심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기 전에.”

잇새로 말을 이겨 뱉은 세령은 힐끔대는 사람들 틈을 유유히 걸어 나왔다. 겉으로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것처럼 꼿꼿했으나, 세령의 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 같았지만 견뎠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무너질 수도 없었다.

***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본부장 비서실 최수찬 실장은 사희와 정아에게 자못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다고 대답한 사희는 굳게 닫힌 본부장실을 힐끔 보았다. 안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안에서 꽤 열정적인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 너무 떨려서 못 들어가겠다.”

정아는 아까부터 서류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부산스럽게 다리를 떨었다. 덩달아 떨리는 것 같아 사희는 정아의 허벅다리를 손으로 꽉 잡는다.

“처음 들어가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떨어요.”

“그때야 시작 전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일하는 거잖아. 본부장이 엄청 깐깐하대. 사희 쌤은 안 떨려?”

안 떨리긴 왜 안 떨리겠습니까. 떨리는 것만 따지면 내가 열 배는 더 떨릴걸. 그와의 관계가 분홍빛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연애를 하자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직원으로서 결재권을 가진 자를 설득하고, 승인을 이끌어 내야 하는 자리다.

그녀가 아는 한 이동하는 사적인 감정을 담아 편의를 봐주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녀 역시 그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잠시 후, 본부장실 문이 열리고 간부들이 밖으로 나왔다. 하나같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방에 들어가면 자기들도 저들처럼 물기 쪽 빠진 모습으로 나오게 될 것 같아 한층 더 긴장된다.

두 사람은 최 실장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본부장님, 강사님들 오셨습니다.”

본능적으로 동하를 찾는 사희와는 달리, 동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알겠다는 손짓만을 취했다. 그는 아직 자리에서 나가지 않은 홍보팀장과 무언가 남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진행 과정 빠짐없이 보고하세요.”

“네, 본부장님.”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침내 동하도 고개를 들었다. 그는 즉시 자석에 이끌리듯 사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주친 시선이 몇 초간 격렬하게 부딪쳤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동시에 사희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리 와 앉으세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동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숨 돌릴 틈 없이 본론으로 들어간다.

“바로 시작할까요?”

“…….”

“강사님?”

방심한 눈빛으로 동하를 멍하니 보고 있던 사희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그, 그러니까.”

말을 조금 더듬는다. 허둥지둥 파일을 꺼내 건네는 사희의 귓불이 꽃물이 든 듯 붉었다.

“우선 커리큘럼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페이지를 봐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사희의 목소리는 이내 차분해졌다. 처음엔 긴장으로 약간 빠른 듯했던 말도 점점 여유를 찾아 본래의 속도로 돌아왔다.

“해당 프로젝트를 일회성 이벤트로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시다면, 그에 걸맞은 지원과 투자가 필요합니다. 예산 관련 부분은 7페이지를 넘겨주세요.”

제안하기 껄끄러운 부분에서도 사희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쓸데없는 추임새나 불필요한 표정 변화도 없이 약간은 건조한 음성으로 맹랑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확실히 담이 작은 타입은 아니었다.

한동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동하가 살짝 눈동자만 움직여 사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약간 내리깐 눈으로 파일을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잇고 있다. 떨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는 분홍색 귓불이 그녀의 긴장을 대변해준다.

동하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기가 번진다. 저 말랑말랑한 살점을 입안에 머금고 희롱하고 싶다는 불손한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로 돌아왔다. 그녀의 열정을 그런 식으로 방해해서는 안 되었기에, 지금은 이사희를 안고 싶은 남자가 아닌, 직원의 보고를 받는 까다로운 본부장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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