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67화 (68/109)

#67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어? 아니지. 지금 이런 쓸데없는 걸 물을 필요가 없지. 잘했다. 잘 왔어! 사희 쌤이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커피숍으로 들어선 정아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사희의 손부터 덥석 잡았다. 정아의 표정이 반가움을 넘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기에 사희는 흥분한 그녀에게 따듯한 커피를 들려주며 일단 마음을 가라앉힐 것을 권했다. 정아는 커피 몇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흥분이 조금 가라앉혔다.

“사희 쌤한테 몇 번 연락해보려고 했는데 면목이 없더라고. 미안해.”

“아녜요. 그땐 저도 너무 감정적이었어요. 제가 죄송해요.”

“아냐, 내가 미안해.”

“선생님 그런데 이 옷은 대체 뭐예요? 퇴근하고 선보러 가세요?”

이러다가는 사과 릴레이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사희는 얼른 말을 돌렸다. 정아는 정장 차림의 저를 놀리는 사희의 말에 피시식 웃음을 터트린다.

“아, 이거……. 그냥. 사무실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눈치를 줘요?”

사희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건 아닌데. 원래 풀에서 일하던 사람이 사무실에 앉아있으려니까……. 맘이 불편해.”

“앞으로도 우리가 풀에서 일하는 건 변함없어요. 다만 사무실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약간 추가되었을 뿐이지.”

“그건 그렇지만…….”

정아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사희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는 반드시 확실하게 해두고 가야 할 것 같아 목소리를 단호히 한다.

“눈치 보지 말아요, 우리.”

자신감과 확고함으로 꽉 찬 음성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정말로 잘하면 돼요. 우리가 할 일은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선생님 옆에는 제가 있잖아요. 이 구역의 미친 쌈닭, 이사희. 누구든 조금이라도 눈치 주면 내가 다 물어 뜯어줄게요. 어때요, 이만하면 든든하지 않아요?”

사희는 우스갯소리를 던지자 잠시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비로소 조금 풀렸는지 정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곤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듯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동하 본부장 만났어?”

“네?”

사희는 갑작스러운 정아의 질문에 들고 있던 커피를 놓칠 뻔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게 꼭 둘이 무슨 사이냐는 질문처럼 들렸다.

“직접 면접을 보고 결정했다고 그랬거든. 본부장이 설득한 거야? 어떻게?”

“아, 뭐. 그냥 이런저런…….”

말할 수 없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요. 제갈공명을 설득했던 유비 못지않게 찾아왔고, 그래서 자꾸만 정들게 만들고, 그러다 마음까지 맞게 만들더니 끝내는 몸도……. 아니, 뭐 그렇다고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사희는 붉어지는 뺨을 손등으로 슬쩍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 정아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되레 다른 쪽에 더 구미가 당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알까?”

“누구요?”

“부사장 사모 말이야.”

정아가 주위를 살피더니 낮게 속삭였다.

“지가 앞길 막았던 이사희를 무려 본부장이 직접 스카우트해서 데려온 거 알면 엄청나게 열 받겠지? 망할 년. 부들거릴 모습 꼭 한번 보고 싶네.”

사희는 대답 없이 빨대를 홀짝 빨았다. 알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언젠가 그녀를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그 날을 위해 꽁꽁 아껴둘 것이다.

***

찻잔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다. 윤재화는 찻잎을 불어 밀어내 후 한 모금을 마신 뒤 입 안에서 느리게 차를 굴렸다. 혀 위를 부드럽게 노니는 백차의 향이 일품이다.

-전무님, 부사장 비서실 고진영 실장입니다.

곧 문이 열리고 고 실장이 이사실 안으로 들어왔다. 공손히 인사하는 남자를 본 윤재화는 입 안에 오래 머금고 있던 차를 삼키곤 곧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한다.

고진영 실장은 경민이 혜석유통의 상무이사로 승진했을 때부터 그의 곁에서 일했다. 그를 그 자리에 보낸 것은 윤재화 전무의 뜻이었다. 미래전략실 조명진 실장이 추천하는 인물 대신 고진영을 선택한 것은, 총수 일가의 시시콜콜한 내막을 알고 처리하는 위치임을 뻐기는 그쪽 인간들 특유의 거만함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권력은 이종학 회장의 은퇴와 함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옳다.

“어떠신가?”

윤재화가 주어를 뺀 질문을 던졌다. 선문답 같은 질문을 받은 고진영은 한마디 되묻는 법 없이 즉시 그가 알고자 하는 내용을 늘어놓는다. 주로 이경민 부사장의 근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매번 특별한 사항은 없지만 그럼에도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요즘 방배동은?”

“이제 그쪽으론 발걸음 끊으신 듯합니다.”

윤재화는 머릿속으로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보고 이즈음이면 그럴 때도 되었노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소리 없이 혀를 찬다.

또 싫증이 났군. 이제 그것도 쓸모가 없어졌어.

쓸모가 사라진 폐품은 적당히 처리해 뒷말이 나오지 않게 마무리 지어야 한다. 애초에 그 물건을 경민의 곁에 붙인 것도 그였으니 처리 역시 그쪽에서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이 부분은, 윤여화는 모르게 진행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경민도 알지 못한다.

오로지 윤재화가 단독으로 지시하는 일들이다.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총수 일가의 사생활을 관리하는 일이 미래전략실에서도 하는 일이지만, 윤 전무 차원에서 하는 일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

쉽게 말하면 외부로 알려지면 곤란해질 수 있는 사생활을 필요에 맞춰, 받는 이도 모르게 조달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처음엔 경민을 통제하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생각해 낸 비책이었는데, 어느새 그것이 그를 묶어버릴 거대한 올무가 되었다.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까 적당히 관리해. 단독 행동하지 않게 잘 단속하고.”

“네, 알겠습니다.”

“상천동 쪽은.”

“재민 군이 언론에 노출된 이후로 줄곧 좋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모두 철저하게 막으며 철통 대응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인터넷 여론이라는 것이 증권가 지라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라 당분간은 시끄러울 듯합니다.”

“여러모로 민감한 때니까.”

혼잣말처럼 말하는 윤재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며칠 전 부사장님 내외분 간에도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불화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 대수롭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윤재화는 아직 무언가 남은 듯 어미를 늘려 대답하는 고 실장의 낌새를 알아챘다.

“그런데?”

“최근 부사장님이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재민 군의 퍼스널 강습을 담당했던 수영강사입니다. 일전에도 그 강사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지시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무드는?”

“노멀한 무드는 아닙니다.”

윤재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찻잔을 들었다.

“검토해야겠군.”

차는 어느새 마시기에 적당한 온도로 식었다. 한 모금을 크게 머금는다. 향이 한결 더 짙어져 있었다.

***

조찬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윤여화 여사의 얼굴은 마치 불이라도 붙이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밖에서 누굴 만났던 것인지 윤여화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늘 단정하게 올라 붙어있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스산한 기운을 냈다. 그 분노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마주 선 세령은 살갗이 델 것만 같았다.

윤여화가 세령 앞으로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던졌다. 퍽, 하는 파열음을 내며 날아온 서류봉투는 곧 바닥으로 날리듯 흩어졌다.

“네가 결국은 경민이 발목을 잡는구나.”

“이게……무슨…….”

“눈이 있으면 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령은 조용히 무릎을 꿇어 흩어진 문서들을 끌어모았다. 그 안에 적힌 것들이 무엇인지는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었다. 근래 증권가와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온갖 추문들이다.

재민이 연관된 기사가 나는 것까지는 이쪽 선에서 막을 수 있었으나 문제는 달궈진 여론이었다. 소위 증권가 지라시라고 이름 붙은 온갖 소문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고, 성격도 점차 대범해졌다. 마치 누가 일부러 이런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경민 부사장 내외의 불화설. 여성편력. 부풀려진 경영능력에 관한 것들. 그리고 최근엔 차세령, 그녀에 관한 내용도 거론되었다. 일명 ‘신데렐라 스토리’로 포장된. 그녀가 어떤 배경도 없이 재벌가에 운 좋게 입성했으나,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나 다름없다는 것이 그 소문의 주된 내용이었다.

한번 일어난 흙탕물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더구나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금은 더욱더 그랬다. 이종학 회장이 수술을 받은 뒤에도 전혀 기력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미 승계 문제는 더는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상황에 줄곧 경영권 밖에 머물러있던 차남 이동하까지 등장하면서, 그의 등장이 왕좌 싸움의 시초가 되지 않겠느냔 추측과, 그로 인해 혜석그룹의 주가에 적잖은 변동 있을 것이란 희망이 어지럽게 뒤엉켜있는 상황이었다.

윤여화 여사의 심기는 나날이 불편해지고 있는데 경민은 야속할 정도로 무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원망과 불안은 세령 앞으로 돌아와, 그러잖아도 불안한 그녀의 입지를 더욱 갉아먹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윤여화는 여전히 분이 삭지 않는지 악다구니를 쓰더니,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보나 마나 윤재화 전무를 찾는 전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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