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66화 (67/109)

#66

“혹시 형님이 당신에게도 구영이 이야기하시던가요?”

구영이라면 영국에서 유학 중인 큰아들이었다. 건성으로 말을 받던 윤재화가 비로소 관심을 가지고 신 여사를 돌아본다.

“구영이?”

“네. 당신한테 아무 말 안 하세요?”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왜?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신 여사는 슬쩍 발을 뺀다.

윤재화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든다.

“말을 꺼냈으면 제대로 해요. 여러 번 묻게 하지 말고.”

신 여사는 슬그머니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 퇴원하시고도 못 가봐서 얼마 전에 잠시 들렀어요. 형님하고 잠깐 이야기 나누다가 구영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말미에 갑자기 물으시더라고요. 구영이 언제 학위 마치냐고. 돌아오면 무얼 시킬 생각이냐고.”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슬쩍 물었더니 형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구영이가 경민이 밑에서 일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윤재화의 눈이 삵처럼 가늘게 좁혀진다.

“경민이 밑에서?”

“그때는 우리 구영이를 좋게 봐주셨나 싶어서 고맙다고 하고 나왔는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까 그게 꼭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아서…….”

신 여사는 금색 펄 섀도우가 칠해진 눈꺼풀을 과장되게 몇 번 깜빡이며 넌지시 운을 띄우곤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누님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칼같이 냉정하게 그편에 서는 윤재화의 극성스런 우애를 모르지 않았기에 나오는 본능적인 몸사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윤재화는 금시에 눈을 부릅뜨고 예민하게 따져 묻는다.

“그런 뜻이 아닌 것 같다니.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말해요.”

“실은 슬쩍 농담인 양 떠봤거든요. 우리 구영이 똑똑하니까 계열사라도 하나 맡게 해주시면 경민이한테 큰 힘이 될 거라고.”

“그런데?”

“그런데 그 말엔 대답 없으시고. 그저 구영이가 제 아버지 닮았으면 오죽 꼼꼼하겠냐며. 당신이 하는 것처럼 구영이가 그렇게만 해주면 마음이 든든하시겠다고. 가족 말고 누굴 믿을 수 있겠냐고요.”

“…….”

“왠지 난 그게 꼭 우리 구영이가 경민이 뒷바라지 해줬으면 하는 말로 들리더라고요.”

신 여사의 말을 듣는 윤재화의 볼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는 이내 굳은 얼굴을 돌리곤 대수롭지 않은 척 목소리를 꾸몄다.

“예민하게 들을 것 없어요. 경민이 걱정에 그냥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윤재화가 언짢은 표정으로 신 여사를 돌아본다. 신 여사는 슬쩍 기죽은 체를 하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리 구영이, 경민이보다 모자랄 것 하나도 없는 애예요. 그 집서 태어났으면 경민이 앉은 자리에서, 구영이는 그 애보다 열 곱절은 더 잘했을 거예요.”

신 여사는 퉁퉁 부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아들을 두둔한다고 하는 말이, 윤재화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신 여사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한때는 4선 국회의원을 한 권세가 집안이었다지만, 권력이란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뜬구름처럼 사라지는 옛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 그가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자존심으로 삼으며 혜석그룹에 기대 사는 처지가 되었음을 신 여사의 푸념이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윤재화는 쯧, 얕게 혀를 찼다.

“그만합시다. 당신 말대로 구영이 똑똑한 아이니 차근차근 쌓아나가겠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 윤재화는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그러나 설움이 받쳐 올랐는지 신 여사는 기어이 말을 덧붙였다.

“왜 우리 구영이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해요? 하물며 동하한테도 노바를 내줬어요. 그런데 어떻게 구영이는 경민이 뒷바라지나 시키겠다는 생각을 하신답니까? 우리 집을 물로 봐도 정도가 있지.”

“어허, 여보!”

“말이 나와서 말인데, 회장님 그렇게 되시고 지금까지 혜석을 누가 지켰어요? 형님? 경민이? 아니에요. 당신이에요. 그뿐이에요? 지금껏 그 댁 온갖 궂은일 다 해 준 사람은 또 누군데요?”

“그만하래도!”

기어이 윤재화의 언성이 높아졌다.

“속상해서 그래요. 당신 세월이 이렇게 무시당하는 게 속상해서…….”

신 여사는 짐짓 울먹이는 척을 하곤 쌩하니 방을 나가버린다.

드레스룸의 거울 속에 언짢은 얼굴의 남자가 비친다. 염색물이 빠진 주변 머리카락이 희끗하다. 꺼진 눈 밑과, 탄력을 잃어가는 마른 목덜미가 어느새 중년의 뒤안길에 선 나이를 고스란히 설명해준다.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지.

윤재화는 거울 속 시들어가는 육체에게 물었다. 주름진 사내는 말이 없다. 다만 꺼져가는 운명을 받아들인 연약한 짐승처럼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굳게 다물린 갈색 입술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온다.

「부사장입니다. 존중을 해주셔야죠. 여기 회사입니다. 집 아니에요. 윤 전무님.」

그 순간, 왜 그 목소리가 떠올랐을까. 싱싱한 육체를 꼿꼿이 세우고 오만한 눈빛으로 저를 보며 이죽거리던 경민의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윤재화는 신경질적으로 셔츠 단추를 풀어헤쳤다. 거친 손짓에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와 바닥으로 툭 굴러갔다. 단추를 줍던 윤재화의 주름진 손이 일순 바르르 떨린다. 떨어져 나간 단추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건만, 그의 몸에 걸쳐진 셔츠는 여전히 건재하기만 하다는 것에 난데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 볼품없어진 단추의 신세가 꼭 저 같아서 분하고 억울했다.

최선을 다해 앞섶을 여미고 있던 단추의 공은, 셔츠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꼭 이 단추가 아니라도 그 자리는 얼마든 다른 단추로 대체될 것이다. 손쉽고, 믿을만한 대체재로. 일테면 제 아들 같은.

윤재화는 문득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정수리 위에서 쏟아지는 조명 탓일까, 왜곡된 윤재화의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었다.

***

레저스포츠사업부 스포츠센터의 특수교육 파트가 모습을 갖췄다. 흐지부지해지다 말 것이라던 주변의 장담과는 다르게 정말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벼락 치듯 몰아치는 윗선의 기세와는 달리 정작 사무실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본부장이 밀어붙인 프로젝트라곤 해도, 여전히 실무진 사이에서는 이 건에 대한 의심이 깊은 상태였다.

사무실로 향하는 정아의 걸음이 무겁다. 여기 말고, 저쪽으로 난 복도 안쪽에 있는 강사휴게실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간 늘 실전에서 아이들을 지도해왔던 그녀가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는 일에 통 익숙하지 않은 것도 원인이겠지만, 출근길이 즐겁지 않아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며칠째 사무실 직원들 누구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짠 듯이 말을 아꼈다. 정아가 무슨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서로 대답을 미루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기까지 했다.

사무실 직원 대다수가 구조조정으로 정리된 상황에서 새로 꾸려진 이 파트가, 마치 박힌 돌을 빼낸 구르는 돌처럼 느껴진 것일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근했던 직원들의 태도가 부쩍 쌀쌀맞았다.

그들의 냉대에는 적잖은 괄시도 담겨있다. 어려운 입사 관문을 거쳐 자리에 앉은 화이트칼라인 저희들과, 풀장에서 몸으로 일하던 수영강사가 한 사무실에서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논리일 것이다.

언제나 자유로운 차림으로 출근하던 그녀가 요 며칠 옷차림에 신경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놀랍도록 노골적으로 쓱 훑어본 직원들은 저희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불쾌하게 웃곤 했다.

웬만해선 남들의 시선을 그러려니 하는 편인 정아도 갑자기 바뀐 분위기는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은 늘 입고 다니던 레깅스를 벗고, 경조사가 있을 때나 입는 정장 차림을 했다.

정아는 사무실에 들어서며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목소리를 꾸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출근한 사무실 직원 몇이 고개를 들어 정아의 차림을 슥 보더니,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예의 그 눈빛을 또 주고받았다. 어제와는 좀 다른 눈빛이었지만, 역시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인사가 시들하니 씩씩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초라해진다. 정아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사무실 제일 구석, 파티션으로 구분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녀의 책상과 마주 보게 붙어있는 책상은 아직 비어있다. 본부장 최종면접을 마치고 입사 결정을 마쳤다는 파트너가 빨리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차 그쪽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인 건 똑같겠지만 그래도 한 자루보단 두 자루인 것이 덜 외로울 테니.

정아는 문득 마냥 이렇게 주눅 들어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이런 불편한 인간관계를 별로 겪어본 바 없는 그녀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탈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특기인 친화력에, 뇌물을 좀 곁들여 봐야겠다. 강사들 사이에서 웬만하면 거부감 없이 통하던 방법이었으니, 여기에서도 통하겠지.

“커피 드실 분 있으세요? 저, 지금 밑에 사러 갈 건데.”

직원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긋 보더니 다시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다.

“제가 살게요. 사무실 새 식구 된 기념으로.”

아차, 뒷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친근감 있게 덧붙인 말에 직원들 표정 썩는다. 덕분에 ‘비싼 것도 괜찮아요,’라고 덧붙이려던 말은 나오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꼬르륵 넘어갔다. 얼굴이 화끈하고, 손에 땀이 찬다.

나이가 몇 살인데 텃새에, 따돌림을 하고 있는 거냐고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입 밖으로 낼 용기까지는 나지 않는다. 남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따돌림을 받고 나니 한없이 긍정적이던 자신의 성격이 ‘타고난 장점’ 이 아닌 ‘운이 좋아 얻은 기질’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견고하다 믿었던 자신감과 자존감이 이렇게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가. 당혹스럽다.

시들하게 처진 어깨를 움츠리며 구겨진 기분으로 자리에 앉으려는데, 어디선가 명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끝이 아주 약간 허스키한 매력적인 음성이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물론, 정아도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들의 표정이 바뀐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아의 얼굴이 형광등을 켠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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