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65화 (66/109)

#65

경민은 그의 곁에서 허리를 바짝 세운 체, 긴장한 자세로 앉아 있는 고 비서의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경민은 곧 무릎이 꺾여 휘청 넘어졌다. 경민의 몸이 태풍을 맞아 쓰러진 나뭇등걸처럼 후들후들 흔들리더니 곧 완전히 힘이 풀려 쓰러진다.

“부사장님!”

재빠르게 일어나 팔을 부축한 고 비서의 어깨에, 경민은 넝마처럼 널브러진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재킷에 떨어진 눈물이 얼룩을 만들어내며 조금씩 크게 번져간다.

생의 끝을 향해 가는 짐승처럼 가물가물한 눈으로 안겨있던 경민이 강하게 입술을 깨문다. 짓씹은 입술 안쪽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고 실장.”

“아닙니다.”

고 비서에게 부축을 받으며, 경민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새벽이 오고 있는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공중에서 스프레이를 흩뿌리는 것처럼 가늘고 뿌연 부슬비였다. 조용한 어둠이 깔린 도시는 짙은 물비린내를 풍기며 죽은 듯 숨죽이고 있다.

차 근처에 다다랐을 때, 비틀비틀하던 경민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풀썩 바닥에 무릎을 찍으며 넘어졌다.

“부사장님!!”

고 비서가 재빨리 그의 허리를 감아 일으켰다.

비척비척 딸려 올라간 경민이 옅은 신음을 내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무어라 중얼거린다.

“이……사희…….”

“네?”

고 비서는 자세를 고치던 몸짓을 멈추고 경민의 입술 가까이로 귓불을 붙였다.

숙성된 술 냄새와 함께 흘러나온 경민의 더운 숨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희미하게 감은 눈꺼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비 날개처럼 낮게 떨렸다. 그리곤 다시금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며 경민은 한 번 더 그 이름을 불렀다.

“이사희…….”

차에 오른 경민은 정신을 잃고 시트에 널브러진다. 그는 끄응, 신음을 내며 몸을 떨었다. 술기운이 사라지고 있는지, 뼛속에서부터 오한이 치밀어 이가 딱딱 맞부딪힐 지경이었다.

고 비서는 짚이 빠진 허수아비처럼 처량하게 쑤셔 박혀 잠든 경민를 바로 눕혔지만, 그는 다시 고치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그리고 울먹이듯 낮게 신음했다.

“추워…….”

잠깐 사이 습기를 가득 품은 옷이 경민의 식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체온을 앗아가고 있었다. 빗방울이 가늘면 옷가지는 더 깊은 곳까지 젖어 든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더 깊고, 더 은밀하게.

***

두 사람이 다시 사희의 집 앞에 도착한 때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간간이 불 켜진 창문을 제외하곤, 대부분 불이 꺼진 고층 아파트는 마치 커다란 무덤 같다.

내릴 채비를 하는 사희를 아쉬운 듯 보며 동하가 입을 열었다.

“집 앞까지 같이 올라가 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늦은 밤, 너무 위험하잖아.”

“글쎄요. 내 생각엔 본부장님이 더 위험할 것 같은데, 지금은.”

한 번으로는 모자라 몇 번이나 사희를 품에 안았으면서도 아직도 갈증이 채 가시지 않아 허덕이는 그의 마음을 꿰뚫은 말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사희의 말에 동하는 머쓱한 듯 픽 웃는다.

“이사희, 당신 가장 큰 장점이자, 가장 큰 단점이 바로 그거야.”

“어떤 점이?”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거.”

안전벨트를 풀어준 동하는 사희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며 슬쩍 눈을 찌푸린다.

“사람 그렇게 쉽게 안 미쳐요.”

사희는 동하를 밉지 않은 눈길로 흘기며 빙긋 웃는다.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그가 다시 손목을 붙든다.

“이사희.”

“왜요?”

“그냥, 한 번 더 불러보고 싶어서.”

“싱겁기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조금만 더 같이 있자.”

동하가 감아 잡은 사희의 손목을 조금 더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투정하듯 말했다.

“늦었어요. 내일 출근 안 해요?”

“여기에서 출근하는 좋은 방법도 있는데.”

“글쎄요, 난 그게 별로 좋은 방법 같지 않은데요. 그리고 나, 너무 피곤해.”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우면 아침까지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을 만큼 온몸이 노곤했다. 격정적인 정사의 피로가 온몸에 짙게 묻어있었다.

“너무하네. 이사희.”

“너무한 건 본부장님이에요. 사람이 뭐 그렇게…….”

“그렇게 뭐?”

“너무…….”

“너무 뭐?”

“아, 아무튼. 아무튼 오늘은 우리 더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사희는 자꾸만 말꼬리를 잡으며 빙글거리는 동하의 시선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앙큼하게 입술을 앙다무는 사희를 귀엽다는 듯 보며, 동하는 사희의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른다. 그의 손길에 잠시 식었던 몸이 다시 화르르 달아오른다. 명치 한가운데를 깃털로 문지르는 것처럼 간지럽고, 가슴에서 뭉근한 것이 벅차게 치미는 느낌이 든다.

자고 가도 괜찮다며 미적거리는 그의 등을 떠밀어 굳이 집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다. 손끝만 닿아도 불처럼 타오르는 두 사람이 결코 얌전히 아침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참기 힘들지만 참아야 한다.

“배고프지 않아?”

사희가 도통 양보할 기세가 없자, 동하는 다른 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었다.

“전혀요.”

“난 갑자기 좀 배가 고픈데. 이럴 때 이사희가 내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빙빙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동하를 보며 사희는 살짝 눈을 찌푸린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데요?”

“뭐, 흔히 하는 말들 있잖아. 들어가서 라면 먹고 가라던가……. 뭐 그런.”

동하는 장난꾸러기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수작을 건다. 저도 모르게 광대뼈가 씰룩이며 웃음이 치밀었지만 사희는 입술을 앙다물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날 꼬셔볼 생각이라면 창의성을 좀 발휘해 봐요. 빤한 수작 부리지 말고.”

사희가 짐짓 새침하게 대꾸하곤 동하가 붙들고 있는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동하는 되레 더 힘주어 사희의 팔을 잡아당겼다. 사희를 품에 안는 동하는 능숙하게 여자의 입술을 빼앗는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농염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붉게 달아오른 사희에게서 입술을 뗀 동하는 이내 그녀를 품에 가득 끌어안는다.

“넌 창의성 같은 걸 발휘할 여유가 있어? 난 아닌데.”

으스러트릴 것처럼 세게 힘주어 안은 그는 곧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욕망을 억누르는 인내의 숨이었다.

그저 말뿐인데 듣는 이의 심장은 발칵발칵 뛰며 반응했다. 그러나 사희는 강하게 치솟는 뜨거운 욕구를 차분히 눌러 담으며 남자를 안았다. 사희는 동하의 등을 손으로 토닥이며 그의 뺨에 제 뺨을 붙였다.

“우리 시간 많아요. 급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이 위안이 된 것인지, 동하는 사희를 한번 꽉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곤 흐트러진 사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빙긋 웃는다.

“진짜 가야겠다. 못 참고 여기서 잡아먹기 전에.”

“잘 가요.”

“좋은 꿈 꿔요.”

사희는 동하의 차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후미등의 붉은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서는데, 문득 코끝에 남자의 향기가 스쳤다.

코를 어깨춤에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약간 습기가 남아있는 옷에서 그의 향수 향기가 났다. 마음이 파도를 탄 것처럼 일렁인다. 흡, 사희는 그 향기를 간직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폐부 깊은 곳까지 들이마신다.

비가 그친 새벽,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담요처럼 세상을 덮고 있다. 조금 서늘했지만 마음은 왠지 포근했다.

***

신 여사는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줄곧 서재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있는 남편이 걱정되었다. 벌써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있었다.

남편이 이렇게 서재에 박혀 홀로 있을 때에는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초조한 마음이 그녀의 인내심을 마르게 만들었다.

“여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윤재화는 대답이 없다. 신 여사는 문을 조금 밀고 안으로 들어간다.

“여보?”

의자에 깊게 기댄 채, 고목처럼 앉아있던 윤재화가 기척을 느끼고 서서히 눈을 떴다.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남자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고 여전히 외출복 차림 그대로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신 여사는 책상 근처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물었다.

“아니요, 그냥 좀 피곤해서.”

윤재화는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도 안 하셨잖아요.”

“괜찮아요. 밖에서 가볍게 했어요.”

윤재화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서재를 나와 안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한술 뜨세요. 한우 도가니 고았는데…….”

종종걸음으로 뒤따라 들어온 여인의 둥그런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내일, 내일 할게요.”

윤재화는 부인의 팔을 툭툭 두둔하며 희미하게 웃어준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고개를 돌린 순간 바로 사라졌다. 표정 관리를 할 여력도 없을 만큼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반평생을 함께 살아온 신 여사는 즉시 그 변화를 알아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이런 낯으로 집에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는 남편이었다. 과묵한 편이긴 했어도 진중한 남편에 다정한 아버지다.

“혹시, 상천동 다녀오셨어요?”

신 여사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근래 윤여화 여사에게서 잦은 호출을 받고 있고, 그때마다 기분이 썩 유쾌해 보이지 않았기에 오늘도 그런 것인가 싶어 하는 질문이었다.

“상천동?”

“네.”

“오늘은 아니고 며칠 전에 다녀왔지. 그런데 상천동은 왜?”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윤재화는 재킷을 벗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재킷을 받아든 신 여사는 얇은 입술을 살짝 물어뜯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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