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거부하는 아이를 억지로 끌어내던 경민이 손을 멈추고 그것을 집으려는데, 그보다 한발 앞서 재민이 그것을 잡았다. 그리곤 누가 볼세라 얼른 허리춤 뒤로 숨긴다.
“뭐야, 그게?”
경민이 물었으나 재민은 대답 대신 발바닥으로 땅을 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다.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경민은 재민이 더 도망가지 못하게 아이의 발목을 손으로 잡았다.
“뭔데. 안 빼앗을 테니까 그냥 보여주기만 해 봐.”
“…….”
“진짜 안 빼앗는다니까. 건드리지도 않을게.”
경민은 발목을 붙들고 있던 손을 풀곤, 항복한 사람처럼 손을 들어 보였다. 일말의 사심도 없다는 듯, 눈까지 동그랗게 떴다. 결백을 주장하는 눈동자였다.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재민은 주춤거리던 것을 멈추고 커다란 눈을 들어 경민의 눈을 본다. 까맣게 빛나는 아이의 눈동자와 경민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의 눈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느껴졌다.
손을 뒤로 숨긴 경민은 턱짓으로 한 번 더 아이를 얼렀다.
“자, 봐봐.”
한참 숨 막히게 뜸을 들이던 재민이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인다. 평소 같았다면 다 뒤집어엎고도 말 성미였지만, 경민은 최선을 다해 마음을 억누르며 인내했다.
잠시 후. 재민이 등 뒤에서 숨겼던 것을 슬쩍 꺼내 보인다.
‘슬라임,’ 경민은 플라스틱 통에 붙은 스티커 글씨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정체불명의 액체에 목적을 알 수 없는 반짝이들이 떠 있는,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장난감이었다.
“뭐야, 이게…….”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경민이 그것을 집었다. 동시에 재민도 손에 힘을 준다. 빼앗으려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실랑이가 인다. 그러는 사이 플라스틱 통의 뚜껑이 열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기분 나쁘게 물컹거리는 액체의 촉감에 질겁한 경민이 얼른 손을 떼어냈다. 그 틈을 타 통을 차지한 재민은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을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안으로 잘 밀어 넣었다. 잘 담긴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붉은 입술이 달싹이더니 재민이 조금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데 경민은 가슴에서 무언가 옅은 울림을 만들며 번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반가움 같기도 하고, 어쩐지 울고 싶은 심정 같기도 했다.
“그게 좋아? 너, 그런 거 좋아해?”
경민이 고개를 기울여 재민의 얼굴을 빤하게 바라본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민은 대답 대신 통 안에 든 것을 손가락으로 쿡쿡, 몇 번 눌렀다.
“너 좋아하는 거면 더 사줄까? 나, 그거 엄청 많이 사줄 수 있는데.”
경민이 조금 신이 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러나 재민은 똑같은 동작만 반복할 뿐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경민의 급한 성미가 말릴 새 없이 확 달아오른다. 원하는 게 뭐든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뭐든 해주고 싶은데 통 말을 않는 재민이 몹시 야속했다.
“그렇게 답답하게 있지만 말고 말을 해보라니까!”
기어이 경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동시에 재민의 작은 어깨가 비 맞은 새의 깃털처럼 바싹 오그라들었다.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 순식간에 공포가 차올랐다.
아들의 눈에서 발산되는 강한 거부감을 경민은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가슴에서 시린 통증이 느껴진다. 차가운 바늘에 명치가 찔리는 것 같았다.
「재민이가 아빠를 싫어한다는 상상, 하지 마세요. 그건 너무 아픈 일이에요.」
언젠가 아들의 수영강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다. 가장 내 편에 두고 싶은 이들에게서 받는 거부에서 오는 절망감을 부인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혹은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감싸주었으면 하는 이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정인 것도 같다. 그저 누구라도 하나쯤은 이 차가운 외로움 속에서 저를 구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었다.
「내가 내 아이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아버님께서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의 질문에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내가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 날 싫어하는 게 아닐 거야. 그저 내 나쁜 생각일 뿐이야.
경민은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효과가 있었던지 찌르는 것처럼 아팠던 마음에 약간의 위안이 찾아왔다.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그냥…….”
잘 모르겠어서 그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내 마음을 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혼잣말을 하듯 변명한 경민은 씁쓸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재민.”
그때 재민을 부르며 세령이 방으로 들어왔다. 세령은 방 안에 있는 경민을 보고 놀라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왜 재민의 방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방문이 열렸기에.”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경민은 괜한 변명을 하며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놀라서 잠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세령이 경민의 시선을 피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재민이, 목욕해야 해요.”
“어? 아, 응. 그래.”
경민은 머쓱한 듯 쭈뼛쭈뼛 돌아섰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슬라임이 뭐야?”
불쑥 던지는 질문에 세령이 고개를 돌려 경민을 본다.
“재민이가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건 어디에서 사는 거야?”
세령은 고양이처럼 가늘어진 눈시울로 재민을 돌아본다. 경민의 말은 이미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세령의 무서운 눈길을 받은 재민이 등 뒤로 감춘 물건을 초조하게 주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세령은 시선을 피하는 재민 앞으로 손바닥을 내민다.
“이리 내.”
재민은 보일 듯 말 듯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름의 소극적인 반항이었다.
“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재민의 팔이 세령의 손에 잡아 잡힌다. 그 서슬에 아이는 들고 있던 장난감을 놓쳤다. 떼구르르, 굴러와 발끝에 부딪혀 멈춘 물건을 보는 세령의 안색이 파랗게 굳는다.
세령이 무서운 눈으로 재민을 노려본다. 아이의 동공이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마지막 간청을 해보려는 듯, 엄마 앞으로 조심스럽게 내밀고 있던 아이의 조그마한 손이 의지를 잃고 고사리처럼 오그라들었다.
세령은 손끝으로 욕실 문을 가리킨다.
“욕실로 가.”
반항의 의지를 잃은 아이는 작은 어깨를 접고 순순히 욕실로 향했다. 생기를 잃은 눈빛이 안개처럼 흐리다.
경민의 미간이 좁게 찌푸려 든다.
“왜 그래?”
세령은 경민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은 채 휴지통 페달을 밟아 열더니 재민이 놓치고 간 물건을 집어 던져버린다. 물건은 퍽, 소리를 내며 휴지통에 처박혔다.
경민의 눈에 불똥이 튄다. 뒷골 어딘가가 뜨끔하더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뭐하는 짓이야?”
“재민이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에요.”
“그거 재민이가 좋아하는 거라니까!”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말했어요.”
온기 없는 목소리, 눈빛도 그만큼이나 차다. 보고 있는 경민의 몸이 스산해질 정도였다.
경민은 문득 그녀에게서 익숙한 이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경민이 자신이 바라는 아들이 되어주지 못할 때마다 윤여화는 그렇게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그가 가장 경멸하고 또 두려워했던 눈빛이다.
경민은 질린 듯 표정을 굳혔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네가 뭔데.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재민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라고. 그게 재민이 숨 쉬게 하는 길이라고.”
“당신이야말로 무슨 상관이에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네가 하는 것들, 재민이 위한 거 아니야. 네가 그럴수록 저 애, 점점 마음만 닫을 뿐이야.”
“상관 말아요. 재민이는 내가 알아서 해요.”
“네가 알아서 한다는 게 대체 뭔데?”
“……?!”
“네 그 말 같지도 않은 교육이 애를 저렇게 만든 거야.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따위 훈육이 재민이를 망친 거라고. 너, 좋은 말로 할 때 재민이 교육에서 손 떼. 더 이상 재민이 망치지 마! 알아들어?”
세령의 눈이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날카롭게 좁아든다. 세령은 목 밑에서부터 끼쳐 오르는 뜨거운 열감을 느꼈다.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였다. 치욕과 핍박 속에서 오직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바쳤던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했다.
그 모욕을 준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경민이라는 것이 그녀 안의 괴물을 끌어냈다. 잠시나마 경민을 향해 느꼈던 애련한 연민의 감정이 총알을 맞은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는 넌?”
“…….”
“넌 그동안 도대체 뭘 했지?”
잠깐 사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차갑게 희번덕거리는 세령의 눈빛에 놀라 경민은 조금 주춤했다. 세령은 같지도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왜 이래, 갑자기. 새로운 취미가 필요해 졌어?”
“뭐?”
“술, 여자, 도박 이제 다 지겨워졌나 봐. 그래서 갑자기 아빠 놀이가 하고 싶어진 건가? 그런데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바리바리 가져다주면 그때부터는 당신이 좋은 아빠가 되는 거야? 참 쉽네. 이경민, 당신 인생은 어쩌면 그렇게 쉬울까?”
풉, 조소를 쏟아낸 세령이 애잔한 눈빛으로 경민을 쏘아본다.
“이경민, 내가 충고 하나 할까?”
“……?”
“네가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은 돈으로 못 사. 껍데기라면 몰라도.”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진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멈출 것처럼 쿵쾅거린다.
세령의 입술이 경민을 차갑게 비웃는다.
“그러니까 이경민. 네가 원하는 거, 넌 절대 못 가져. 죽어도.”
하얗게 질리는 경민을 죽일 듯 노려보며 이죽거리는 세령의 붉은 입술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흡사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섬뜩한 표정이었다.